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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의 도전 - 고린도전서 15장

by pooh_in_the_Way 2021.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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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라이트의 《예수의 도전》에서 발췌

 

06 부활절의 도전

바울: 고린도전서 15장

가장 먼저 바울은 자신의 사상과 실천이 부활과 철저히 얽혀 있어서 그것을 제거하면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지는, 초기 그리스도인의 전형적인 본보기다. 더 나아가 바울은 바리새파 출신일 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가장 엄격한 바리새인으로,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과 하나님이 온 세상을 심판하시고 그분의 백성을 구출하실 새 시대가 도래할 것을 열렬히 믿었던 인물이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읽을 때는 저자가 바로 이런 인물임을 유념해야 한다.

 

고전15: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고전15:2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고전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고전15: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고전15: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고전15: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고전15: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고전15: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린도전서 15:1-7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공유했던 매우 초창기의 전통을 바울이 묘사하는 내용이다. 바울은 그것을 받았고 또 그것을 전해 주었다. 이것은 전통을 전수하기 위해 사용된 전문적인 용어들이고, 우리는 이것이 주후 30년대 초반, 그러니까 교회의 아주 초창기에 믿었던 내용이라고 가정해야 한다. 이 전통은 예수의 장사를 포함한다. 바울의 세계에서는 누군가 장사되었다가 3일 뒤에 다시 살아났다고 말하는 것은 곧 그 무덤이 비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빈 무덤은 20세기의 논의에 매우 중요한 점이지만, 바울이 굳이 강조할 필요는 없었다. 그에게 ‘부활’이란 말은 빈 무덤의 의미까지 포함하기에 충분했고, 실은 그 이상을 의미했다. 1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교육받은 유대인에게 이 단어는, 그 인물의 몸은 아직도 무덤에 있지만 그가 비신체적인 영역에서 살아 있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었다.

 

바울은 예수의 출현을 열거하는 이 목록에서 여자들에게 나타난 것은 언급하지 않는다. 이는 (때때로 주장되듯이) 바울이나 그 전통의 구성자들이 남성 우월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 전통이 복음 전파에 사용하기 위한 것이기에 부활의 증인으로 확실히 간주되는 인물들만 열거했기 때문이다. 당시 문화에서는 여성들을 믿을 만한 증인으로 여기지 않았다. 바울은 한번은 500명이 동시에 예수를 목격했다고 말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 체험에 융합시키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왜냐하면 그 출현은 야고보에게 나타난 일 이전에 일어났고, 오순절에 이르면 야고보는 이미 초기 운동에 합류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5장의 첫 단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울이 부활의 의미를 잘 이해했다는 점이다. 바울에게 부활은 새로운 종교적 체험이 아니었다. 또한 죽음 이후의 삶, 곧 생존의 증거도 아니었다. 부활은 성경의 내용이 이루어졌다는 것,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것, 새 시대가 현 시대의 중엽을 뚫고 들어와 미처 준비되지도 않은 세상에서 시작되었다는 것 등을 의미했다. 이 모든 일은 ‘성경대로’ 발생했다. 이 말은 바울이 성경을 열심히 뒤져서 몇 가지 증거 본문을 찾아냈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성경 이야기 전체가 마침내 그 절정에 도달했고, 이 놀라운 사건들을 통해 실현되었음을 의미 했다.

 

8절,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이것은 제왕절개 수술, 즉 만삭이 되기 전에 찢어진 자궁으로 나온 아기가 갑작스러운 빛에 놀라 눈을 깜박거리며 새로운 세상에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광경을 떠오르게 하는 끔찍한 이미지다. 여기서 우리가 포착하는 것은 단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느꼈던 감정을 되돌아보는 자서전의 한 장면만이 아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다른 이들에게 일어난 일과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부활한 예수께서 나타나시는 일들이 중단되기 전에 부활을 목격한 증인의 대열에 겨우 들어 갔다. ‘맨 나중에’라는 말은 기도와 믿음과 성례의 삶을 통해 부활한 예수를 아는, 교회를 통한 일반적인 경험은 그에게 일어났던 일과 다른 것임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그는 다메섹 도상의 경험을,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한 이전의 모든 경험 및 이후에 일어난 교회의 경험과 확실히 구별한다.

 

그 결과 바울은 12-28절을 통해 새 시대의 도래는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먼저는 메시아의 부활이고, 마지막에는 메시아에게 속한 모든 사람의 부활이다. 유의할 점은, 현 시점에서 그가 메시아를 하나의 영혼이나 영이나 천사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예수께서는 죽은 채로 다시 살아날 때를 기다리시는 중이 아니다. 그분은 이미 부활하셨고, 한 인간으로서 이미 하나님의 존전으로 승천한 상태셨고, 단지 신의 자격으로서만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세상을 다스리시며 창조의 여섯째 날부터 인류에게 주어진 운명을 실현하시는 중이다.*10

 

이런 사실을 기초로 29-34절에서 바울은 죽은 그리스도인과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이 모두 장래에 몸으로 부활할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죽은 그리스도인의 몸이 재결합되고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이 변화된 몸을 입게 되리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행습, 즉 죽은 자를 위해 세례를 받는 이상한 행습과 그가 사도로서 행하는 수고를 유대교 세계관을 가진 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유일한 방식이라고 말한다(34절은 58절을 내다본다). 달리 말하면, 교회는 ‘영혼 만들기’를 하는 중이 아니라는 것이다. 장래에 몸이 없을 생명을 위해 현재 몸이 없는 존재들을 생산하거나 훈련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메시아의 모델을 따라 마지막 날에 몸이 재결합될 100퍼센트 인간과 함께 일하는 중이다.

 

그러면 부활한 몸은 어떤 몸인가? 잠시 50-57절로 건너뛰어 보자. 이 단락에서 바울은 몸이 장차 버림을 받지 않고 ‘변화될’ 것이라는 자신의 믿음을 명확하게 진술한다. 일시적이고, 부패하고, 연약함과 질병과 죽음에 종속된 현재의 몸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다”라는 말의 의미다. 여기서 ‘혈과 육’은 ‘몸’(per se)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패될 수 있고 썩는 우리 몸의 현 상태를 의미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썩을 수 없는 몸’이다. 죽은 자들은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날 것이고(52절), 그 위대한 날까지 살아 있을 우리는 변화될 것이다.

 

고린도후서 5장에서와 같이 바울은 현재의 몸이 새로운 몸을 ‘덧입는’ 것, 즉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것을 초월하는 새로운 양태의 몸을 상상한다. 이것은 단순한 소생도 아니고 몸이 이탈된 상태도 아니다. 따라서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부활한 몸에 대해 이렇게 믿었다면, 이것이 바로 예수의 부활에 대한 바울의 견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그의 논증은 후자에서 전자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방금 살펴본 두 단락의 중간에 가장 복잡한 대목인 35-49절이 나온다.

 

고전15:35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고전15:36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고전15:37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고전15:38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고전15: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고전15:40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고전15:41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고전15:42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고전15: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고전15: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고전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15: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고전15: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고전15:48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고전15: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여기에서 바울은 상호 간에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모두 존재하는 서로 다른 몸들에 관해 말한다. 이 대목에서 장래의 부활의 몸을 ‘영적인(신령한) 몸’으로 지칭하는데, 이는 ‘비(非)신체적인’ 몸이란 의미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가장 유대적인 성격을 지닌 15장에 엉뚱한 헬레니즘 세계관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는 현재의 몸(soma psychikon)과 장래의 몸(soma pneumatikon)을 대조시킨다. ‘소마’는 ‘몸’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이것을 수식하는 두 개의 형용사는 무슨 의미인가? 이 그리스어 단어들을 ‘신체적인 몸’과 ‘영적인 몸’으로 번역하면 오해의 소지가 많아진다. ‘프쉬키콘’(psychikon)의 어원인 ‘프쉬케’(psyche)는 보통 ‘영혼’(soul)으로 번역하기 때문에, 바울이 현재의 몸을 비신체적인 것으로 생각했다고 여기기 쉽다. 하지만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이며, 양자 모두 신체적인 몸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옳다. 전자는 ‘영혼’의 생명을 지닌 몸이고, 후자는 ‘영’(하나님의 영)의 생명을 지닌 몸이다.

 

하나님의 영이 그리스도인의 부활을 일으키는 행위자로 묘사되는 롬 8:10-11과 비교해 보라.

 

롬8: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롬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바울은, 현재의 몸은 ‘영혼’의 생명을 지닌 ‘[신체적인] 몸’이고, 장래의 몸은 ‘하나님의 영의 생명을 지닌 [변화된 신체적인] 몸’이라고 말한다.

 

바울의 부활관에 대해 한 가지만 더 말하겠다. ... 예수의 승천은 부활과 분명히 구별되었다. 물론 부활하신 예수는 승천하신 주님과 동일 인물이고, 그분의 부활은 승천의 전제 조건이기 때문에 양자 사이에는 밀접한 연속성이 있다. 바울은 논증을 위해 필요한 경우(예컨대, 빌 2:5-11) 얼마든지 부활은 언급하지 않고 승천만 언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다른 어디에서보다 충분히 설명하는 이 단락에서는 그 두 가지가 혼동됨 없이 잘 정렬되고 혼란 없이 잘 구별된다.

 

바울은 50년대 초에 주류 교회의 믿음을 대변하는 글을 썼다. 여기서 그는 예수의 부활에 관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편다.

 

1. 부활은 창조주 하나님이 그 옛날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 즉 그들을 ‘그들의 죄’와 포로 상태에서 구원하겠다는 약속을 성취하신 순간이었다. 이로써 ‘마지막 날’이 시작되었고, 그 마지막에는 부활절에 시작된 ‘죽음을 이긴 승리’가 마침내 완성될 것이다.

2. 부활은 예수의 몸을 변화시켰다. 그것은 예수의 죽은 몸이 이전과 동일한 몸으로 소생된 것도 아니고, 몸은 분해되도록 버려진 채 영혼만 살아난 것도 아니었다. 바울의 이야기는 빈 무덤을 전제로 삼는다.

3. 예수께서는 아주 제한된 기간 동안 살아 있는 모습을 보이셨고, 이후에는 교회에 대해 그와 다른 방식으로 현존하시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모습을 목격한 사람들은 사도로 세워졌다.(고전 9:1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4. 부활은 마지막 날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부활할 것임을 보여 주는 원형이었다.

5. 부활은 그리스도인이 품은 장래 소망의 근거일 뿐 아니라 현재 수행하는 일의 근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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