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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의 도전 - 부활 운동으로서의 초기 기독교의 발흥

by pooh_in_the_Way 2021.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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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라이트의 《예수의 도전》에서 발췌

 

06 부활절의 도전

부활 운동으로서의 초기 기독교의 발흥

 

이미 지적했듯이, 초기 기독교 가운데 부활에 대한 믿음을 중심으로 삼지 않는 유형은 하나도 없었다. ... 그것은 이 운동 전체를 움직이는 핵심 추동력이었다.

이 논증의 두 번째 단계에 이르렀으니 이 단계의 두 번째 기본 단계를 다루겠다. 1세기 유대교에서는 부활이 명확한 의미를 지녔다. 다소 논란이 있고 복잡한 사안이기 때문에 좀더 상세하게 설명하겠다.

첫째, 1세기 유대교에는 사람들이 죽은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있었다.

 

몇몇 저술은 궁극적으로 비(非)신체적인 축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필로와 희년서를 들 수 있다.

 

어떤 저술들은 의로운 사람의 몸이 회복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예컨대) 순교자들은 다시 합체되어 고문관과 사형 집행자를 대면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가장 분명한 예는 마카비후서다.

또 어떤 저술들은 한동안 몸이 이탈된 상태로 있다가 다시 결합된다고 말한다. 솔로몬의 지혜서 2-3장이 바로 이 범주에 속한다. ... 그 지혜서는 ‘의인의 영혼들’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그들의 최후의 안식처가 아니라 한시적인 피난처에 불과하며, 이후에 다시 살아나서 “그루터기를 관통하는 섬광처럼 달릴 것이고”, 주님에 의해 온 나라와 왕국을 다스리는 자리에 앉을 것(3:1-8)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입장 같다. 그가 유식한 로마인 청중에게 호소력을 발휘할 만한 내용을 자신의 영웅들이 말했던 것처럼 가장할 때와 달리, 적어도 동료 유대인들이 실제로 믿었던 것을 주의 깊게 묘사할 때는 그런 입장을 취했다는 말이다.

 

끝으로, 당시에는 죽음 이후에 어떤 존재로 이어진다는 것을 아예 부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두개인들이 그랬다.


이처럼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두 가지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첫째, ‘부활’이란 단어는 몸이 없는 축복의 상태가 아니라 몸이 재결합된 상태를 묘사하는 말로만 사용되었다. ‘부활’은 ‘죽음 이후의 삶’을 일컫는 일반적인 단어가 아니었고, ‘장차 하나님과 함께 있을 것’을 가리키는 단어도 아니었다. 그것은 중간 상태가 어떠하든 간에 그 후에 하나님이 새로운 몸을 가진 인간을 창조하신 경우를 가리키는 단어였다.

둘째, 궁극적인 부활 이전에 몸이 없는 한시적인 상태를 가리킬 때는 다양한 어휘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 상태는 영혼(soul)으로, 혹은 천사 내지는 이와 비슷한 존재로, 혹은 영(spirit)으로 묘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태를 부활한 몸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부활은 몸의 재결합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에스겔 37장의 시대 이후로 ‘부활’은 다양한 의미를 지녔다. 포로 생활에서 위대하게 복귀하는 것과 언약이 갱신되는 것을 나타내는 이미지였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지닌 죄와 죽음의 문제(포로 상태)가 해결되었고 야웨께서 자기 백성과 맺은 언약을 갱신하셨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이미지였다.

이처럼 죽은 자의 부활은 하나의 은유이자 환유가 되었고, 새 시대의 도래를 가리키는 상징이자 핵심 요소이기도 했다. 야웨께서 그분의 백성이 번영하도록 회복시키실 때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물론이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죽은 순교자들을 포함한 모든 하나님의 백성도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에서 몸이 재결합되어 새 생명으로 살아날 것이다.

 

그렇다면 제2성전기의 유대인이 부활을 믿은 것은 한편으론 예전에 죽은 사람들의 몸이 재결합되는 것과 관련이 있고, 다른 한편으론 죽은 모든 의인이 동시에 살아나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언약의 출범과 관련이 있다. 아마 이 때문에 예수께서, 인자가 역사의 흐름에 속한 한 개인으로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을 말씀하셨을 때(막 9:10) 제자들이 무슨 의미인지를 몰라 어리둥절해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1세기 유대인이 누군가 “죽은 상태에서 살아났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몸이 없는 축복의 상태에 들어가서 영원히 안식을 취한다거나 몸이 재결합할 위대한 날이 오기까지 기다리는 중이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이 점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테스트할 수 있다. 주전 150년에 마카비 반란의 순교자들이 의로운 참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열심히 믿었던 한 사람이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혹은 주후 150년에 시므온 벤코시바(Simeon ben-Kosiba)가 진정한 메시아라고 믿었던 한 사람이 있었다고 해 보자. 이 사람들이 단지 자신들이 따르는 사람의 대의가 의로운 것이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존전에 있는 명예로운 자리에서 살아 있다는 것을 말할 의도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말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뻔하다. 방금 묘사한 그들이 순교자들이나 벤코시바가 천사 혹은 영의 형태로 살아 있다고 말하거나, 그들의 영혼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그들이 죽은 상태에서 이미 살아났다고 말하는 것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부활은 몸의 부활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몸의 부활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그 의미가 사뭇 우리의 이해 정도를 뛰어 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 어느 1세기 유대인에게 “부활이 일어났다”라고 말했다면,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족장들과 예언자들과 순교자들이 다시 살아나서 걸어 다니지 않고, 에스겔 37장이 말하는 회복의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부활이 일어났을 리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 반응을 보고서 당신이 해명하느라고, 실은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라 당신이 하나님의 치유와 용서를 새롭게 깨닫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거나 당신이 속한 운동의 지도자가 부끄러운 고문과 죽임을 당한 뒤에 하나님의 존전에 살아 있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라고 대답하면, 상대방은 그런 체험을 해서 축하한다고 말하거나 그런 믿음에 관해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상대방은 당신이 그런 일을 묘사하기 위해 왜 하필이면 ‘죽은 자의 부활’이란 말을 사용했는지에 대해 여전히 의아해 할 것이다. 한마디로 부활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셋째, 새로운 시대는 1세기 유대인들이 상상했던 모습으로 도래하지 않았다.[앞에서 이미 언급했다]

 

또한 예전 하나님의 백성이 모두 부활한 것 아니다. 그러나 아주 초창기 교회는 예수께서 죽은 상태에서 살아나셨을 뿐 아니라 ‘죽은 자의 부활’이 이미 일어 났다고 망설임 없이 선포했다(행 4:2).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 새로운 고정점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세계관을 재정립하느라 바빴다. 그들 특유의 행습, 지배적인 이야기들, 상징적인 우주 그리고 기본 신학을 다시 정립한 것이다. 그들은 마치 새로운 시대가 이미 온 것처럼 행동했다. 이것이 이방인 선교의 내적 논리였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계획하셨던 일을 이제 행하셨기 때문에 이방인들도 마침내 축복을 공유하게 될 것이라는 논리였다.

 

그들은 마치 새로운 종교적 체험을 한 것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또한 마치 그들의 예전 지도자가 (마카비 반란 순교자들의 추종자들이 그 영웅들에 관해 말하는 것처럼) 천사나 영으로 하나님의 존전에 살아 있다는 듯이 행동한 것도 아니다. 그들의 행동, 그들의 이야기, 그들의 상징, 그들의 신학을 제대로 설명하려면, 그들이 정말로 예수께서 몸을 되찾으셨다고, 예수의 몸이 죽은 상태에서 살아난 것으로 믿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네 번째 기본 단계는 당연히 조기 교회가 과연 옳았는지를 묻는 일이다. 우리는 이 1세기 유대인 집단을 설명할 수 있을 만한 어떤 것을 가정해야 한다. 그 집단에는 고등 교육을 받은 바리새인인 바울도 포함되는데, 당시 유대인들이 현 시대의 종말이 오면 모든 죽은 의인이 되살아날 것이라 기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인물이 현 시대의 중엽에 다시 살아 났다는 결론을 매우 빨리 내렸고 이를 매우 강하게 주장했던 인물이다.

 

이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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