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라이트의 《예수의 도전》에서 발췌
06 부활절의 도전
결론: 복음 전통과 부활
사복음서의 부활 이야기들은 수수께끼 같고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음 세 가지 점만은 매우 분명하다.
첫째, 예수를 목격하고 만난 사람들은 하늘의 환상을 본 것도 아니고, 유대교의 묵시적 전통에 나오는 눈부신 빛이나 영광, 혹은 구름에 둘러싸인 인물을 본 것도 아니다. 그들이 묘사한 내용을 보면, 예수께서는 신의 자리나 하늘의 영광스러운 자리로 승천하신 것 같은 모습이 아니다. 이 이야기들에 나 오는 예수의 모습은 ‘초자연적인 출현’에 관한 이야기들에 나오는 인간의 모습을 닮지 않았다. 그것은 기대감을 바탕으로 해서 꾸민 이야기가 아니었다.
둘째, 예수의 몸은 신체적이면서도 초(超)신체적인 상태인 듯하다. 전자는 비(非)물질적인 천사나 영이 아니었다는 뜻이고, 후자는 잠긴 문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복음서의 기사들을 읽을 때면 마치 “이것이 무척 특이한 이야기인 줄 알지만, 사실이 그랬다”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이 든 다. 바울은 그들이 묘사하는 내용에 대한 이론적 틀을 제공한다. 즉, 그것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이었고, 단순한 소생이나 신체적인 몸의 폐기가 아니라 새로운 양태의 몸으로 변화된 것을 내포하는 사건이었다.
셋째, 이 기사들은 예수의 출현이 초기 교회가 존속하는 내내 거듭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밝힌다. 누가는 그의 독자들이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를 만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마태는 그의 청중이 어느 산 위에서 예수를 만날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다. 요한은 사람들이 바닷가 에서 조반을 요리하는 예수와 마주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마가는 그의 독자들이 “(그들이) 두려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이라 예상하지 않았다.
... 나는 요한과 누가가 최종 원고를 탈고했을 때, 그 마지막 장들에 담긴 전통들이 진정한 초기의 기억, 즉 그 공동체가 들려주고 다시 들려주고, 형성하고 다시 형성했지만 기본 메시지는 고스란히 담았던 그 기억으로 되돌아간다고 주장한다.
... 우리가 역사학자로서 한 걸음 더 전진하려면, 우리가 언어와 철학과 역사와 신학의 경계선에 서 있음을 깨닫고 이러한 곤경에 맞서 싸워야 한다. 우리는 모든 초기 교회의 증언, 곧 나사렛 예수께서 처형된 지 3일 만에 그 몸이 새로운 종류의 생명으로 부활했다는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나의 견해는 초기 교회가 발흥한 이유를 가장 잘 설명해 준다. ... 특히 나의 견해는 왜 교회가 그렇게 빨리 새로운 시대가 동텄다고 믿게 되었는지, 그 결과 왜 예수의 죽음을 칙칙한 사고나 아름다운 꿈의 종말이 아니라 온 땅의 유일한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시는 결정적인 행위로 믿었는지, 그리고 그 결과 왜 그들 자신도 놀라면서 나사렛 예수께서 성경대로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을 행하셨다는 결론에 도달했는지를 설명해 준다.
이런 의미에서, 부활은 결국 그들로 하여금 불과 20 여 년 만에 완전한 기독론을 고수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중요했던 것은 예수의 부활이 다음 몇 가지 사실을 증명해 주었다는 점이다.
- 예수께서 참으로 메시아이셨다는 것,
- 그분은 실로 이스라엘의 운명을 어깨에 짊어지신 채 성벽 밖에서 로마의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
- 그분은 성경 이야기에 따라 또 그 이야기를 성취하려고 이스라엘이 겪는 포로 생활의 절정을 통과해 3일 뒤에 거기서 되돌아오셨다는 것,
- 따라서 이런 일의 증인인 그분의 추종자들은 그분이 승리하셨다는 소식을 들고 땅끝까지 가라는 사명을 받았다는 것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