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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부터 처음 읽기/마 7:1-29 산상수훈 3

마 7:15-20 열매로 스스로를 알리라

by pooh_in_the_Way 2021.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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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마7: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마7: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마7: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마7: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마7: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여기 갑자기 등장한 “거짓 선지자들”이라는 말을 어느 특정 집단을 가리키는 일종의 전문 용어로―또는 좁은 의미로―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또한 19절 때문에, 이 단락을 종말론적으로 해석할 이유도 없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분명히 “나쁜 열매”를 맺는 자들일텐데, 그들이 바리새인들이건, 은사주의적인 광신자들이건, 자유주의자들이건, 또는 심지어 교회 내부의 위선자들이건, 그들을 총칭하는 말로 이해하여,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는 상태로 보면 무난하리라 생각됩니다. 마태복음 7장15절에서 27절까지, 산상수훈을 마치면서 예수가 주는 세 가지 경고를 보게 됩니다. 모두 예수 안에서 확인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의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예수의 결론은 “(앞에서의 모든 가르침으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에 빠지지 말고 내 안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의로서, 누구를 판단할 것 없이 먼저) 스스로의 신앙을 점점해 보라”는 것으로 읽어보면 분명해집니다. 굳이 이 단락의 제목을, 성경도 제목으로 달아 놓은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를, 그래서 “열매로 스스로를 알리라”로 바꾸어 봅니다.

산상수훈에서 드러난 예수의 모든 가르침은 당연히 종교성을 가지고 있고, 그런 차원에서 윤리와 도덕을 상회하는 고급한 이상이거나 가치이라는, 관념의 차원에서의 가치로서 소개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요, 내용이며 조건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이 정도로 착해야 된다”라는 도덕적 가치로서만 인정받으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오해하는 것은 이런 윤리와 도덕적 차원에서의 가치들입니다. 모든 신앙적 행위들, 대표적으로 성경 읽기와 기도와 봉사, 이런 것들은 그 행위 자체의 도덕적 가치 때문에 신앙의 차원에서도 힘을 발휘하는 것은 아닙니다. 양보나 용서가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 속에서 발생한 내용이요 행동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라는 존재의 상태가 변하지 않은 상태에서 선한 것들을 수집하여 치장하여야 하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서 나타나는 덕목들은 모두 우리라는 존재가 바뀌었기 때문에 나타난다는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바뀌어서, 이제까지 내가 내 존재의 근거와 주인이었던 것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존재의 중심이 된 존재로의 변화, 이것이 만들어낸 결과로서, 윤리적인 것이든 도덕적인 것이든 어떤 결과들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이 단락의 내용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안에서의 하나님의 의, 곧 하나님 나라의 의,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열매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자라고 쉽게 가게 되지만, 그러나 본문의 내용은 그런 것이 전혀 아닙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자가 아니라, 이름다운 열매를 맺는 나무가 되자 입니다. 사과나무가 사과 열매가 달려 있을 때만 사과나무인 것이 아니라, 사과 열매가 달려 있지 않을 때에도 사과나무인 것입니다. 그것은 꽃이 피고 과실이 열릴 때에 더 분명하게 그 과일로 드러날 뿐이지, 잎이 피지 않는 이른 봄이나 겨울에도 눈이고 나목으로 서 있는 겨울에도 그것은 사과나무입니다. 사과나무이기에 사과를 결실합니다.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좋은 나무이기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이기에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가 말씀하시기를, 이미 앞에서 다룬 바 있는 살인의 문제, 살인은 살인이라는 뿌리를 갖고 있기에 살인이라는 결과를 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무를 바꾸라 이 내용입니다. 나무를 바꾸지 않고 과실을 맺는 것뿐으로 율법을 지켰다고 하지만 그것을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쉽게 이해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오해하기 쉬운 문제는 다음부터입니다. 이 나무를 바꾸는 문제를, 초대 교회에서도 그랬지만, 우리 신앙 현실에서도 여전히 많이 오해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신자가 되어서 변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으로 결실하지 않고,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것으로 결과를 만들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붙어 있음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만 나오는 것으로 우리에게 결실케 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신앙인이 되어 변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변했다는 것을 내가 변해서 내 안에 의와 선을 내 안에서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하면 틀립니다. 우리가 변하는 것은, 예수를 믿지 않았을 때에는 우리 혼자서 나를 책임져야 하였고, 그래서 무엇을 만들려면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을 동원하여야 하기에, 우리의 뿌리로부터 무엇인가를 짜내어 만들수 밖에 없었는데, 그 뿌리는 언제나 죄로부터 나오기에, 우리가 만들어내는 모든 것이 죄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에 반하여,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께 붙어 있어서 하나님께로만 오는 의와 진리와 거룩함과 생명과 영원에 속하는 것들이 우리에게 유입되고 결실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팔복을 시작하면서 시편 1편을 동원하여 확인한 바와 같이, 시냇가에 심기워진 나무가 된 것입니다.  

19절 역시,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때문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자”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열매는 나무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열매로 나무를 안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의에 참여하고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의 정체성을 증명할 열매로 자신을 확인해야 된다 그런 뜻입니다.

우리가 가지는 기독교 신앙, 예수 안에서 허락되는 하나님의 의의 본질, 신자된 정체성이라는 것은 예수가 누구냐에 달려있습니다. 예수가 누구냐라는 것은,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차이를 만들어 낼 것입니다.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특징과 본질이 있는 것입니다.

마땅히 열매는 그 나무의 나무됨으로 만드는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사랑하라, 용서하라, 겸손하라는 것은 우리 존재가 그런 것들을 산출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기에 그런 요구가 나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가지는 신앙은 우리가 고급한 어떤 이상과 개념과 수준에 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를 알고 예수와 관계를 맺겠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나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알고 관계를 발생하는 것이 바로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해하며 의에 주리고 목 마르다는 것입니다(이 산상수훈의 첫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하는 어떤 종교적인 명분의 일들, 기도를 하든 성경을 읽든 봉사를 하든 전도를 하든, 기독교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드리는 어떤 행위들도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행위들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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