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7: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마7: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예수의 능력 있는 말씀과 엄중한 마지막 경고는 그것을 듣고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놀랐고’(속뜻은 ‘압도되었다’입니다. 그래서)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의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권위’라는 희랍어 단어는 ‘권세’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절대적 능력 있는 주권을 의미합니다. 이 산상수훈의 일차적인 청중은 제자들이되, “무리들”이라고 불리는 많은 유대인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이 듣기에, 그들의 선조들이 말한 것에 자기들 권위의 근거를 둔 서기관들과는 달리 예수는 자신의 말을 입증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호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성경에 호소하셨고(5장 17절; 7장 2절)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관하여 말씀을 전하였습니다(7장 21절). 분명 예수께서는 일반적인 유대 랍비들과는 전혀 다른 분이었습니다. 그의 권위는 조상들의 전통이나 심지어 토라가 아니라, 놀랍게도 그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토라가 가르치는 “의”에 대한 최종적이고 권위 있는 해석으로서 예수의 가르침이 지닌 절대적인 권위는 오로지 한 가지 사실―예수야말로 유일한 유대인의 스승이자, 주이시며 그리스도시라는(마태복음 23장 8-10절)―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놀랍고도 급진적인 내용의 가르침을 뒷받침하는 예수의 권위는, 복음에 포함된 새로운 지평은 물론이려니와 그 복음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이는 장차 조금씩 드러나겠지만, 7장 22, 23절에 명쾌하게 선언하신 것으로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는 그가 선포하는 천국의 왕이시며, 그의 말씀의 진리―그의 약속, 계명, 경고 등의 진리―는 그의 인격에 내재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이 산상수훈의 가장 중요한 주제인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와 다른, 예수 안에서 허락된 하나님의 의에 중요한 본질이 비교되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의의 대표적인 본질을 `은혜`(팔복에서 선포된 바와 같이 조건없는, 천국에의 초대)와 `사랑`(율법의 저변에 흐르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 은혜와 사랑이 바리새인의 의와 비교될 때, 자칫 도덕과 법과 대척점에 있는 것같이 이해되어서는 안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의 중요한 결함은 그 도덕성과 법에 문제가 아니고 그 정신과 그 내용을 성취할 수 없는 데 있습니다. 우리도 현실 속에서 경험하듯이 도덕이나 법이나 굉장히 부정적이고 소극적으로 밖에는 사용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최소한의 사회질서를 위하여 강제력을 가지고 요구됩니다. 그러나 도덕을 원할지라도 그것이 명분으로는 모두의 공감을 받고 있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왜 불가능하느냐 하면, 적극적으로 그 가치를 자신과 남에게 나눌 만큼의 실력이 죄인된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의 치명적 결함이 무엇이냐 할 때 무엇이 옳은지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 옳은 것을 행사할 때 그 옳음의 행사가 자신을 기만하거나 위장할 수 밖에 없으며, 또는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정죄하는 것으로 밖에 그 도덕과 법을 사용할 다른 실력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조금 더 나아가 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은혜’와 ‘사랑’이 무엇이냐? 이 은혜와 사랑을 ‘믿는 자만이 구원 받고 사랑 받았다’는 자신만의 의로서 오해하여,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이 오히려 무례하고 매정하고 독선적인 부류의 신앙인이 되었지만, 성경에서 은혜와 사랑을 이야기할 때는, 도덕과 법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과 법에 생명과 진정한 내용과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 예수 안에서 확보되었다’ 그런 뜻으로써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와 대조되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 설명된 대표된 이 인간의 의는, 여전히 죄 아래 붙잡혀 있는 인간으로서 선택권이 없습니다. 옳은 것을 혹 알 수는 있으나, 옳은 것을 행할 능력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일차적으로 은혜와 사랑으로 강조하는 것은, 죄의 반대말이 은혜이고 사랑인 탓입니다. 우리의 이해를 위해서, 죄와 반대되는 단어를 고르라면 선이나 의가 맞겠습니다. 그러나 죄의 반대말을 은혜나 사랑으로 놓는 이유는, 죄가 하나의 규칙이거나 내용에 관한 것일 뿐만 아니라, ‘세력’(권위와 같은 희랍어 단어, 엑수시아)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의 세력으로 우리를 붙잡고 있습니다.
우리가 의를 행할려면 참다운 의인이 되려면,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조건이 되어야만 합니다. 죄로부터의 구원 때문에, 은혜가 죄의 반대편에 섭니다. 은혜의 사전적 의미는, 내가 결과로서 가지고 있는 것이 나에게는 그 결과를 만들어낸 원인이나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는 죄를 벗어날 실력과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와서 구해줘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로부터의 은혜, 누구의 용서, 누구에 의한 해방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가 복음을 가져 옵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 나라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산상수훈에서 하나님의 통치에 있는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한 것으로만 사랑이 가능하다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가치, 의미, 승리보다 큰 비교할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과 능력과 거룩함으로의 부름이 거기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의 의를 선포함에 있어, 당신의 의를 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올바른 내용과 올바른 규범을 가지고도 결국엔 이루어낼 수 없었던 가장 중요한 내용을 사랑으로 대조시키고 사랑으로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산상수훈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어떤 자격과 가치을 충족하여서도 받을 수 없는 어떤 복을, 어떤 영광을, 또는 어떤 명예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기로 했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 조건과 이유는, 법적 조건과 도덕의 조건보다 훨씬 큰, 그것으로는 관계할 수 없는 관계로써만 성립하는 조건으로서, 하나님이 당신을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그런 관계 대상으로써 대접하시더라는 겁니다. 사랑입니다.
산상설교 내내 신자의 신앙의 본질을 이것으로 설명했다고 생각합니다. 이해와 용서! 이해와 용서라는 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 실력으로 윤리적일 수 없고 법을 지킬 수 없는 이 현실을, 내 안에서부터 발견하는 것이고, ‘우리 모두’가 동일한 형편 속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와 간섭을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신자들의 중요한 중요한 실천적 이해는, 신앙인으로서의 자기 실천과 이웃에 대한 이해가 보다 너그러워야 합니다. 산상수훈이 어떻게 시작되었었나요? “복이 있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아, 천국이 너희 것이다.”이었습니다. 산상수훈을 듣고 난 유대인들, 예수의 가르침의 권위로 놀랐겠지만, 그 표정은 밝았으리라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