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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전적으로 성경 읽기
마태복음부터 처음 읽기/마 7:1-29 산상수훈 3

마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by pooh_in_the_Way 2021.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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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3-14

 

마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마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앞에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라 황금율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인간으로써 가치 있으려면, 진정한 존귀함을 소유하려면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어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우리가 그가 지은 사랑하는 자녀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필요를 공급받을 때만 우리는 우리 이웃을 약탈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필요를 우리의 이웃에게서 빼앗아 필요가 없고, 우리는 비로소 내가 하나님 안에서 충분하다는 것과 이웃도 내가 무엇을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 백성으로만 충분할 있다는 인정할 있게 된다 그랬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인간의 인간된 자리이고 서로간에 대접을 주고 받을 있는 자리라 했습니다.

이럴 때에만 우리는 이웃과 비로소 전쟁을 종식하게 됩니다. 우리는 화해할 있고 우리는 우리 이웃이 두렵지 않고 증오할 필요 없고 경쟁할 필요 없고 싸울 필요가 없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웃과 화해가 이루어지고 평화가 온다는데 핵심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평화와 화목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에 순응하여 하나님의 의로 채워질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길은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하고 좁은 길로 가야 하는 길입니다.

이미 마태복음 6 24절에서 "사람이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없다"라는 말씀을 살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재물에 관한 내용은, 단순히 부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하는 주인으로써 재물은 어떤 문제가 만드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실제적인 주인은 '나'입니다. 내가  욕심과  소원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재물을 신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 싸움은 언제나 내가 나의 주인이  것이냐,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것이냐라는 문제입니다. 

 

 길이 좁은 이유는,  길에는 '나'라는 이름으로는 걸을  있는 여지가 없습니다여기는  '예수 안에' 들어가야 됩니다. 이것이 좁은 문이고 좁은 길인 이유는 예수 안에만 들어가야 되는, 그래서 길은 예수만 있는 길로 보이고, 넓은 문, 넓은 길은 각각 자기 이름으로 존재하는 길입니다.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각각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길입니다.

좁은 문, 좁은 길에는 '예수 안에' 들어가 있어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오직 '예수 안에' 있는 것으로만 정체성이 확인되고, 밖으로는 예수만 문이고, 예수만 있는 길입니다.

 

다시 재물 이야기로 돌아가 봅니다. 우리가 재물을 놓고 예수를 붙잡는 싸움을 하는 것이지, 재물로 가난을 구제하고 불쌍한 자를 돕는 것이 기독교가 되면, 우리는 다시 돌아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 갑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주인으로서, 우리의 창조주요 아버지로서,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만 채워주실 있고, 그래서 있는 영광의 자리를 놓고, 우리가 있는 윤리와 도덕적 차원에서의 만족에 머무르고 말 수 있습니다. 

이것을 경계하여야 합니다. 예수가 필요하냐, 필요치 않느냐라는 문제를 논하고 있는 것이지, 선행을 논하고 있는 문제가 아니다 말입니다.

 

그 유명한 예수의 말씀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야 합니다. 자기를 주장하고 동시에 예수를 따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아까 비교한 재물과 십자가를 겸하여 섬길 없듯이, 자기 부인과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라서, 자기를 주장하고 예수를 따를 수는 없는데, 자기 부인은 예수를 따르기 위한 전제조건입니다.

전제조건이란 말에 유념하여야 합니다. 단지 재물을 나누어주는 것이 신앙이 아니듯이, 단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둘을 동시에 섬길 없는, 지금 산상설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대비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와 대비되는, 예수 안에서의 하나님의 의란, 우리가 중에 하나밖에 선택할 없다는 것입니다 주인을 섬길 없습니다그러니까 자기 부인은 내가 주인인 것을 거부하고 주를 섬기기 위한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표현으로서 우선적 순서일 뿐이지, 자기 부인이 전부는 아닙니다. 다른 종교성에도 그런 면은 찾을 수 있습니다. 재산을 나누어주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포하는 예수의 말씀을 들을 수있습니다. 예수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입니다. 그 길에는 많은 환난의 가능성까지 내포하고 있습니다("협착하여"는 박해의 가능성까지도 내포합니다). 그러나 이미 팔복에서 예수가 하신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마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마5: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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