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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부터 처음 읽기/마 5:1-48 산상수훈 1

마 5:13-16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

by pooh_in_the_Way 2021.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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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마5: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마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는 팔복에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복된 나라에 초청을 받을 수 있는 무조건적인 범위를 제시하고 있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자일지라도 예수로 말미암아 부르시고 허락하시는 하나님 나라에 예외없이 들어갈 수 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능력과 자격을 요구하지 않고 허락하는 천국이지만, 이 천국, 곧 하나님 나라는 그러나 중요하게 오늘 본문식으로 세상 나라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나라입니다. 11절과 같이,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하는 이 일은 이 복을 얻은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는 모든 자들이 이 세상에서 확인해야 되는 소속감입니다.

세상 나라에 속했는가 하나님 나라에 속했는가 하는 것은 둘을 동시에 공유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이 말을 12절에 있는 바와 같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라고 나옵니다. 옛날 선지자들이 당한 박해는, 구약성경을 이해하는 대로 이런 것들입니다.

“너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라”,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라”라고 외치는 것이 선지자들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런 선지자들이 왜 박해를 받았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선민들이고 하나님과 약속 관계에 있는 큰 책임을 지고 있는 백성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과 율법으로 요약된 모든 그 지켜야 할 내용들을 몰랐을 리도 없고 아주 반대했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옛 선지자들이 박해 받은 그 이유와 그 이유가 설명하는, 구약 성경 이사야 11장으로 갑니다.

사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사11: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사11: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사11:4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사11:5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이새의 줄기에서 나는 싹, 다윗과 그의 후손으로 지칭되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이 메시야, 그의 아들이 오셔서 성취할 하나님의 약속들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들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세워졌던 모든 하나님의 종들, 선지자들에게 위임됐던 동일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공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이 공의를 실현하는 문제를 4절에서 보면,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한다”에서 심판과 판단은 정죄한다는 뜻이 아니고 사법권으로 보호한다라는 뜻입니다. 곧 “가난한 자를 보호하고 겸손한 자를 지켜주고”라는 뜻입니다. 그 일을 행하는 모든 선지자들, 결국 하나님의 종들이 행하는 일들이란 이런 세상의 정의를, 공의를, 그리고 평화를 세우는 일입니다.

이것들은 아직도 기독교의 큰 책임으로 남아있는 영원한 기독교 신자의 책임이기도 합니다만 이 일들은 종종 기독교 안팎에서 오해를 삽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와 사회에 공평과 정의를 구현해내는 일은 기독교 신앙의 속성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속성이냐 하면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거룩하시며 그리고 자비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복 주시는 분이라서 그런 공평과 정의를 요구하시는 분입니다. 그것이 공평과 정의라는 사회에서의 기독교 책임을 낳습니다.

여기 있는 11장 1절에서 5절의 내용도 이런 하나님의 종이 해야 하는 일,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실 일은, 그 근거가 2절에 보듯이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에 의해서 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에 의해서 3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아 이 사역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마태복음 5장에서 보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선포, 또는 우리의 책임은 우리의 정체성 때문에 온다는 것입니다. 어떤 정체성?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를 입어 복음의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정체성, 자연히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 아래 있다는 정체성, 그리고 그 지위와 신분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자들의 빛됨은 기독교 신앙의 내용들 속에 나오는 도덕성과 종교성 이전에, 그 도덕성과 종교성이라는 것을 속성으로 하는 통치자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는 내용은 기독교 신자들이 가진 신앙고백,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가진 바 믿음의 내용들 때문인데, 그 믿음과 신앙고백들은 그 백성을 부르신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근거합니다. 결국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이 누구냐에 관한 것이며, 거기에 대한 고백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예수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앞에서 확인했듯이, 팔복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배경으로써 이 빛은 흑암에 찾아온 빛이었습니다. 사망의 자리에 찾아온 빛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자들이 자기 정체성으로 가지는 빛은 전부 사망의 그늘진 곳과 어두운 자리로 보냄을 받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없는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흑암의 자리와 사망의 자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외에 다른 곳에서 빛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기독교 신자의 빛된 것은 이런 소속에 의한 문제입니다.

2
역사적 맥락에서 보아도 분명해집니다. 예수 당시의 많은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이방 민족들, 즉 자신들을 억압했던 바벨론과 로마 등의 제국들을 심판하시기를 학수고대했습니다. 그런 심판이 내려지면, 그 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무죄가 밝혀질 것이라는데, 이것은 마치 소송에서 가해자가 유죄판결을 받는 것을 보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고전적인 예언자 스타일로 하나님의 심판이 우선 이스라엘에게 가장 먼저 떨어질 것이라고 선언했는데,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이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한 채, 그 사회 안에서 억압과 불의가 넘치고 외부인들에 대해서는 폭력을 일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선택하신 ‘소금’인 이스라엘이 독특한 맛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은 이제 어떻게 이 세상이 부패하는 것을 막으실 수 있겠는가?(고대 사회에서는 소금의 주요 기능이 바로 부패를 방지하는 것이었다) 라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 세상의 빛으로 부르셨습니다(예를 들어, 이사야 42장 6절; 49장 6절).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신의 밝은 빛을 이 세상 어두운 구석구석에 비추라고 택하신 민족이었습니다. 단지 악을 들추어내는 빛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길을 찾게 하는 빛이 되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빛을 지니라는 부름을 받은 사람들도 똑같이 어둠에 속해 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이 바로 예수의 경고였습니다. 그리고 도전이었습니다. 언덕 위의 도시인 예루살렘은 이 세상을 향한 희망의 봉화가 되어야 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도 그러해야 했습니다. 그들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은, 유일하시고 창조주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며 그분을 예배해야 한다고 주변 민족들에게 말하는 표지가 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이라는 증거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길을 따르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에 있으며, 이 길을 따르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예수 자신과 그의 추종자들이며, 그들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대표자들로 이해되었습니다. 산상설교는 이스라엘다운 모습을 찾기 위해 전형적인 혁명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발견하라는 도전이었습니다. “악을 대적하지 말라”, “다른 편 뺨을 돌려 대라” “5리를 더 가라” 등과 같은 가르침은 학대를 받고도 가만히 있으라는 권면이 아니라 상존하는 저항 운동에 참여하지 말하는 경고이었습니다. 그 대신, 예수의 제자들은 이스라엘의 참소명을 발견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숨겨질 수 없는 언덕 위의 도시는 유일무이하신 하나님이 온 인류를 위해 자신을 계시할 장소로 지명하신 예루살렘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한복판에는 반석 위에 세운 집인 성전이 있습니다. 이 산상설교는 (간접적으로 표현된) 아주 날카로운 경고로 끝납니다(7장). 진정한 새 성전, 진정한 ‘반석 위의 집’은 그 삶을 예수의 말씀 위에 세우는 공동체로 구성될 것입니다. 새로운 이스라엘, 새로운 성전(헤롯의 성전이 예수 시대에 아직도 건축 중이었음을 기억하십시오), 정결한 혹은 혁명적인 공동체를 창조하려는 다른 시도들은 마치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집은 바람과 폭풍우가 오면 완전히 무너질 것입니다. 예수는 지금 제자들(물론 함께 듣는 청중을 포함하여)에게 하나님의 새로운 드라마, 곧 이스라엘이 마침내 세상의 빛이 되리라는 옛 소명을 성취하게 될 그 위대한 드라마에 참여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사랑과 공의의 길이 될 것이고, 이 길을 통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온 세계에 드러나실 것입니다.

예수에게는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와 함께하라고 도전한 사람들도 다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실질적인 행동과 치유와 식탁 교제를 포함하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 사역에 동참하라는 사명을 주기도 했는데, 이러한 사명은 그 선포를 상징적인 실천 행위로 바꿔 놓았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예수의 매우 위험한 사명을 끌어안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 사명은 혁명가들이 꿈도 꾸지 못했던 방법으로 세상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라 정치적인 위험 지대로, 어쩌면 죽음 속으로 들어가라는 부름이었고, 이런 헌신을 통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현재의 환난을 거쳐 새 날의 아침으로 인도하실 것임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이러한 역사의 위대한 전환점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재조직하고, 그들이 가야 할 새로운 방향을 몸소 구현하고 선포하며, 다른 이들 역시 여기에 참여하기를 권하였다면, 다른 국가들의 역사와 삶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길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마침내 이스라엘을 향한 그분의 약속을 지키실 때, 유대인의 사상에 따르면 그 결과가 잔물결처럼 온 세계에 미칠 것입니다. 많은 구약성경 본문(예를 들면, 이사야 42장)은 다가올 왕이 하나님의 공의를 이스라엘뿐 아니라 온 세계에 펼칠 것이라고 증언합니다. 예수는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으로부터 와서 하나님 나라에서 족장들과 함께 앉을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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