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마5: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마태복음은 이레네우스(주후 180) 때 까지 초대교회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복음서이었습니다. 복음서 가운데 가장 많은 주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가장 완전한 복음서’(어거스틴의 감탄)로서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은 오경적 구조를 가집니다. 산상설교(5-7장), 선교 설교(10장), 비유 설교 또는 천국 설교(13장), 교회 설교(18장), 그리고 종말론적 설교(23-25장), 그리고 여기에 서론(탄생기사, 1-2장) 과 결론(수난 기사, 26-28장)으로 구조를 이룹니다. 그리고 특이하게 다섯 번의 설교는 똑 같은 종결 후렴 문구를 가집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매..”. 또한 각 권이 찬양으로 끝맺어진 5권의 시편을 연상시킵니다. 후대의 연구자들이, "마태는 '개종한 랍비'로서 또 기독교 율법주의자로서 예수의 설교 말씀들을 다섯 권으로 묶고 그것은 서론적인 기사와 결론적인 기사로 엮어 놓았다"고 보는 것입니다.(물론 모세오경적 구조로 보는 것은 인위적인 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11장과 23장에도 한 장에 걸쳐 예수님의 설교가 나옵니다.) 구조만이 모세 오경을 모델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예수님 | 모세 |
헤롯왕의 남아 학살(2:16) | 바로 왕의 남아 학살(출 1:22) |
애굽으로 피신 | 미디아 광야로 피신 |
헤롯 대왕 사후 가지 고향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사역을 시작하신다 | 목숨을 노리던 자가 다 죽은 후 애굽으로 돌아 옴(출 4:19-20) |
30년간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갈릴리에서 생활하신다 | 40년 간 미디안 광야에서 생활 |
요단강에서의 세례 | 홍해 바다를 건넘 |
40주야를 금식 | 40주야를 광야에서 금식 |
산에 올라 새 율법을 가르치심 | 시내산에서 십계명 받음 |
열 가지 기적(8-9장) | 열 개의 재앙 기적 |
엿새 후 구름 중 변화(세 제자와 함께) | 모세가 아론, 나답, 아비후를 데리고 시내산에 올랐을 때, 엿새 동안 구름이 산을 가린 중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남(출 34:29) |
여기에서도 마태는 “산”을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는 특별한 장소로 사용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4장에서는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을 때에 등장하는 시험의 산, 17장에서는 영광 속에 변모한 변화산, 28:16에서는 부활 후 제자들에게 대위임령을 준 산 등). 예수께서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로 나아오고, 이윽고 예수는 입을 열어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마태는 계시와 관련된 특별한 기사에서 ‘산”이라는 소재를 사용하기 때문에, 마태는 이 기사를 쓰면서 율법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 갔던 모세를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자신의 백성들에게 토라를 갱신해 주는 배경 으로서의 종말론적인 성격을 ‘산”에 부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예수는 아마도 당신에게 치유 받기 위해 몰려드는 군중들을 피하려고 산에 올랐을 것입니다(4:23-25 참조). 하지만 그분에게는 이번 기회가 당신에게로 "나아 온” 제자들에게 매우 특별한 가르침을 베푸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마태는 모세의 권위 밑에서 살아 온 유대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면서 그들이 최고의 권위로 생각해 온 모세에게 견주어 예수님을 소개하려고 의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을 새 이스라엘, 교회의 지도자(for Jewish Christians)로 보이려는 의도가 강합니다. 그런 면에서도 혹자는 신명기적 오중 구조를 가진다고 주장합니다. 신명기는 모세의 설교에 뒤이어 이스라엘의 역사가 나타남으로써 설교와 기사가 반복되었듯이, 마태복음 역시 예수님의 설교와 기사가 반복되어 나타난다는 점에 착안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하시는 때에 많은 무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산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설교하신 이 내용을 산상설교 혹은 산상수훈이라고이라고 해서 마태복음 5장과 6장, 7장에 걸쳐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은 기독교복음의 가장 정수가 되는 내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좀 더 자세하고 분명하게 살펴보는 기회를 가지려고 합니다.
산상설교의 첫 번째 내용이 팔복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로부터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까지 이르는 8개의 복을 나열하고 계시는데, 그 표현이 이러이러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되어 있어서 자주 복의 조건과 자격으로 오해되곤 하는 내용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에서 천국의 복을 받으려면 심령이 가난해야 된다 라고 우리가 거의 본성적으로 이해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팔복은 그런 복을 받는 조건을 또는 자격을 나열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5장에 시작하는 그 팔복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앞에 있는 마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의 사역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4장 12절부터 봅니다.
마4: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마4: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마4: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마4: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마4: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예수님의 사역을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으로 예언의 성취로 보면서 이 16절에 있는 바와 같이 흑암에 앉은 백성들에게 빛이 찾아오셨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다. 그러니까 사망에 앉아 있었던 자, 흑암에 앉아 있었던 자들에게 빛이 찾아온 것이지 저들이 빛을 찾아나간 얘기는 아닙니다. 더 분명히 하기 위해서 23절을 보시면,
마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4: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마4: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이렇게 연결이 되죠. 그러니까 앞에 있는 무리와 그 성격상 동일한 무리들이다 그런 뜻이죠. 동일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동일한 현실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베푸신 설교입니다.
그 무리들은 그 예수님의 복음전파에 호응하여 왔는데, 그 온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냐, 그 복음이 필요했던 사람들이다, 어떤 복음? 여기 보시는 대로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신다는 소문에, 여기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병든 자, 모든 사람들이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입니다. 앞에 있던, 흑암의 세력 아래 있던 자, 사망의 그늘진 땅에 앉았던 자들을 위한 복음이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팔복을 자격과 조건으로 가지고 이해하는 것은 맞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심지어 이 자격과 조건을 우리 영혼이나 마음의 깊은 상태가 준비되어 있어야 복을 받는다 라고까지 억지로 앞뒤를 맞추려는 생각에 자격과 조건으로 가기도 합니다.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가 다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이것이 조건이 될 수 없는 것은 아주 당연하게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것이 조건이 되면 예수가 서 있을 자리가 없어집니다. 예수가 오는 것은 다른 무엇으로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 때문에라는 것이 외면되는 조건은 기독교 신앙과는 합치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