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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전적으로 성경 읽기
마태복음부터 처음 읽기/마 5:1-48 산상수훈 1

마 5:3-12 팔복

by pooh_in_the_Way 2021.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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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마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마5: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태가 이제까지 이야기하여 온 바, 그리고 성경이 우리에게 해줄려고 하는 남은 이야기는, 우선 예수가 말씀하신하늘나라천국이라는 장소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 통치 땅에서도 이루어질 하나님의 다스림을 뜻한다는 것은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예수가 이스라엘의 메시아로서 자기 백성을 대표하기 때문에 그분만이 정당하게 그들을 대리하실 있습니다. 대리를 통해 (복음서 전체에서처럼) 국가적으로도, (23장의 사례에서처럼) 개인적으로도, 실재가 발생합니다. 예수는 이스라엘과 세상 죄의 무게를 스스로 짊어지고 축적된 악의 세력 아래 죽습니다. 그래서 이제 드디어 하나님나라가 온전히 임할 있었습니다. 이제 예수의 같은 대표 대리적 죽음을 통해 메시아가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십니다.(24:26) 세상을 다스리는 그분의 새로운 통치가 시작되었습니다.

 

마태가 주제를 두드러지게 나타내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마태복음에서 발견하는 것은, 하나님나라의 의제가 이미 십자가의 의미의 전조가 방식입니다. 마태도 남들처럼 예수의 같은 죽음을 포함한 생애를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오실 하나님나라와의 관계에서 이해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가 어떤 모습일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세상에 어떻게 ‘신권 정치’를 세울 의향이신지 가장 명쾌하게 요약한 사람은 마태일 것입니다.

 

다른 여타 신과는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왕이 되실 모습은 과연 어떨까? 하나님의 뜻을 폭력으로 사람들에게 강제하는 군대와 경찰의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전혀 다른 권력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영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너희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너희가 위로 받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너희가 땅을 상속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정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너희가 만족할 것이다.

자비로운 사람은 복이 있다! 너희가 자비를 받을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너희가 하나님을 것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너희가 하나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하나님의 길을 걷다 박해받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너희 것이다.

사람들이 때문에 너희를 헐뜯고, 박해하고, 너희에 대해 온갖 악한 말을 거짓으로 늘어놓을 , 너희는 복이 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너희 앞에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 받았다.(5:3-12, 의역)

 

산상수훈이나 ‘팔복’으로 알려진 유명한 본문은 이렇게 묘사된 사람들에게 복을 약속하는 내용으로 대개 해석합니다. 하지만 잠깐만 생각해 봐도, 말도 확실히 맞지만 그것은 사실상 2 진리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을 통해 하나님나라가 시작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도 ‘천국’에 대한 오해라는 흔한 덫을 주의해야 합니. ‘천국’은 ‘하나님나라’를 말하는 마태의 방식이고, 마태가 주기도(6:10) 부활하신 예수에 대한 최후의 주장(28:18)에서 스스로 확실히 하듯이, 하나님나라는 ‘땅’과 동떨어진 ‘하늘’이 아니라 땅에서도 시작될 천국의 통치입니다. 따라서 12절에서 약속한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은 사람들이 ‘천국에 가서’ 상을 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너희의 상이 땅에서 드러날 때까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어찌 됐든, ‘복’에서 핵심은 내용이 하나님나라가 실행에 옮겨질 방식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심령이 가난한 , 애통하는 , 온유한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 긍휼히 여기는 , 마음이 청결한 , 화평하게 하는 , 예수가 지금 열고 있는 길에 헌신하려고 욕과 박해를 받을 준비가 사람들을 통해서 실현됩니다. 중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 긍휼히 여기는 , 화평하게 하는 같은 일부 특징은 확실히 ‘활동적’이지만, 중요한 것은 목록 전체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시작될 것입니다. 이들은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 되는 법을 배울 것입니다.(5:13-16) 용서와 화해의 (5:21-26), 순결의 (5:27-32), 정직의 (5:33-37) 배울 것입니다. 특히, 5장의 절정에 도달하면서, 이들은 비폭력의 길,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는 법을 배울 것입니다(5:38-48). 이들은 다른 뺨을 대고, 리를 동행하고, 속옷과 겉옷까지 내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진정한 자녀임을 드러낼 것입니다.(5:39, 40, 41, 45).

 

마태가 복음서에서 말하는 다른 여러 내용 중에서도, 그가 5장에 정리된 하나님나라 의제가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시도해야 윤리의 단순한 개요가 아니라 예수 자신의 소명을 극적으로 보여 준다고 강조하고 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듯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때리고 조롱할 때도 그분은 저항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실 것입니다. 로마 군인들이 예수에게 십자가를 지우고 골고다까지 가게 때도 그분은 말없이 그리하실 것입니다. 그들이 그분의 옷을 벗겨 나눠 가질 것입니다. 예수가 숨을 거둘  로마 군인 명이 그분이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선언할 것입니다.(26:67; 27:30-32, 35, 54) 이런 연상이 우연일 없습니다. 내용은 마태가 하나님나라와 십자가에 대해 말하고 싶은 내용을 최소한 일부나마 표현합니다.

 

마태에게 예수의 고난과 죽음은 하나님이 왕이 되시는 수단, ‘모든 권세’가 예수에게 주어지는 수단입니다. 이것은 비단 ‘새 윤리’뿐 아니라 새로운 종류의 행동, 새로운 생활방식을 위한 본보기가 되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통치가 세상에 임해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통치는 예수의 독특한 하나님나라 소명을 통해, 그분이 결국에는 임마누엘만이 하실 있는 일을 하시기 위해 세상의 멸시와 악의와 적의를 스스로 짊어지심으로써 나타날 것입니다. 마태가 아브라함에서 다윗, 포로기, 메시아에 이르는 족보로 스케치한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성취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실행에 옮겨졌습니다. 이스라엘은 세상의 운명을 짊어졌고,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운명을 짊어지셨습니다. 그분의 죽음을 통해 세상의 해롯과 빌라도들이 책임을 추궁당하고, 하나님의 통치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의 삶에 드러난 팔복이 특징인 시대 시작되었습니다.

 

2

하나님의 미래는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하여 현재에 도래하는 중이고, 당신은 장래에 목표점에 도달할 삶의 습관을 바로 지금 연습할 있다는 진리입니다.

 

여기에 목표, 텔로스(telos)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 에우다이모니아가 아니라, 히브리어 아쉬레ashre 또는 바루크가baruch(그리스어로는 makarios) 가리키는 ‘복 받은 상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팔복을 번역할 ‘축복’ 대신에 ‘행복’으로 옮긴다면 요점을 놓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축복하다, 축복하는, 받다라는 말의 요점은 그것이 행복을 내포하고는 있으나, 그와 다른 어떤 ,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로 말미암아 행복을 포함한다는 점입니다. 행복이란 마디로 인간이 독자적으로 도달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말하자면, 당신은 원칙적으로 혼자 힘으로 행복에 이를 있고, 자신을 위해 행복을 개발할 있습니다. 그러나 받은 상태는 창조주 하나님이 누군가의 속에서, 그리고 사람의 삶을 통하여 일하실 발생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받은 상태는 동일한 하나님이 옛날 자기 백성에게 주셨던 약속들, 신명기 뒷부분 나오는 ‘언약에 들어 있는 약속들을 성취할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5 3-12, 산상설교 초두에 나오는 예수의 놀라운 말씀은 인간의 복과 이스라엘의 , 가지 모두를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팔복의 진술들은 분명 사물이 현존하는 방식 그대로를 묘사하지 않습니다. 가령, 애통하는 자가 겉모습과는 달리 이미 위로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흔히 냉혹한 겉모양 뒤에 숨어 있는 어떤 실재에 관해 시간을 초월한 진리를 가르치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진술들은 새로운 사태, 현재 세상에 뚫고 들어온 새로운 현실을 선언합니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으나 이제는 이루어질 어떤 것을 선포합니다. 말하자면, 과거에는 너무나 멀고 비현실적으로 보였던 천국의 삶이 이제는 땅에 진실로 임하였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깜짝 놀랄 만한 선언은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1.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때는 위로를 받을 , 천국이 마침내 땅에 내려올 , 창조세계가 새롭게 , 풍성함을 누릴 , 자비를 얻을 , 상급을 받을 ,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직접 목격할 때이다.

2. 지금 예수가 여기에 있는 만큼 목표는 시대에 도래했다. 산상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공적 사역이 장차 어떻게 전개될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3.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장차 하나님나라에서의 존재 방식에 상응하는 마음의 습관과 삶의 습관을 현재 여기에서 실행할 있다. 이는 결국에는 이루어질 모습이지만, 예수가 여기에 계시므로 이미 여기에도 존재하는 방식이다.

 

그러면 마침내 도래할 미래와 예수가 주장하는 현재에서 이뤄지는 실천 습관은 어떤 상응관계를 갖는가? 둘은 가지 대조적인 방식을 취합니.

 

한편으로는, 장래에 이루어질 상태와 현재의 생활 습관이 서로 정확히 일치하는 직접적인 상응관계가 존재합니다. 가령, 겸손과 온유와 자비와 청결과 화평케 하는 등이 그런 것입니다. 최종적인 나라가 도래할 우리는 겸손하고 온유하고 청결한 존재로 살아가는 것을 그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해! 이제는 우리가 그토록 원하던 존재가 있어. 교만하고 거만하고 불결한 존재가 되자!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자질은 오히려 더욱 눈부신 빛을 발할 것입니다.

 

다른 한편, 뚫고 들어오는 장래와 현존하는 사물의 존재 방식 사이에 긴장이 있음을 보여주는, 동등하지만 상반되는 상응관계도 있습니다. 애통하는 , 박해를 받는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마지막 나라가 도래할 때는 애통하는 자가 위로를 받을 것이며, 의에 굶주린 자가 배부를 것이고, 박해는 중단될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일은 가지 범주에 속하는 같습니다. 화평케 하는 일을 도모하는 마음가짐은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의 평화와 직접 상응하지만, 서로 싸우는 진영 간에 평화를 회복할 필요성은 이사야 11 장의 환상에 나오듯 하나님의 평화가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울 때에는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지 유형의 상응관계는 물론 밀접하게 병행됩니다.

 

그런데 가지 유형을 모두 얘기하는 취지는 예수가 다음 가지 어떤 뜻으로도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함입니다. 그분은 “너희가 이런 식으로 행하면 상급을 받을 것이다”라는 뜻으로나, “이제 너희가 자신과 나의 하나님나라 프로젝트를 믿었으니 이런 식으로 행해야 한다”는 의미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가운데 후자가 진실에 가깝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런 의미로 가깝다는 말은 아닙니다. 가지 대안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은 하나의 철학적 딜레마와 그에 따른 신학적 결과에 걸려 어쩔 모르는 모습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당시 1세기 유대인의 관점에서 이것을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는 이런 취지로 말씀하였습니다. “이제 나는 여기에 있고,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가 탄생하려고 한다. 일단 너희가 점을 인식하면, 이런 습관은 세상을 바라보며 지금 여기에서 행해야 마음의 습관이라는 것을 알게 것이다. 이런 자질들은 말하자면 상급이나 보상을 얻기 위해 반드시 행해야 것이 아닙니다. 또한 새로운 신자들이 좇아야 행동 규율로 내놓은 것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새롭게 창조된 , 언약의 , 예수가 주는 삶의 표지판 내지는 언어라고 있습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것들은 고대 그리스의 미덕 개념을 철저히 기독교적으로 개조한 것으로서, 사도 바울이 그의 서신서에서 이야기하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들어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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