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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의 진실 - 상관성이 없는 빈 무덤 이야기

by pooh_in_the_Way 2021.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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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커스보그/톰 라이트의 《예수의 의미》(한국기독교연구소 발간)에서 발췌

 

8 부활절의 진실

 

 

 

 

상관성이 없는  무덤 이야기

 

우리  사람 사이의 폭넓은 의견 일치 속에서 나는 부활절의 역사적 근거에 대해 우리가 서로 의견을 달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부활절에 대한 나의 이해는 나의 생애를 통해 바뀌어왔다. 나의 이해는 순히 깊어졌을  아니라 바뀌었다. 나의 어린 시절의 기억에는 부활절 하송을 부르던 것이 포함되어 있는데,  곡조는  가사만큼이나 승리에  노래였다. 내가 좋아하던 찬송은 예수 부활했으니 할렐루야였다.  영광스럽게 반복되는 할렐루야는 여전히 아름답다. 또한 무덤에 머물러  곡조가 높아지면서 그리스도 자신의 부활을 모방하는 것으로서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소년 시절에 나는 부활절이 예수가 문자적으로 무덤에서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뜻한다고 당연하게 믿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부활절을 매우 다르게 이해한다. 나에게 있어서 부활절은  무덤이 비었는지 아닌지 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부활절이 예수 의 육체적 몸에 어떤 놀라운 일이 벌어졌는지 아닌지 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나의 주장은 우리가  무덤이 비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거나, 아니면 그의 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주장이 아니라, 단순히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내가 이해 하는 바로는 부활절의 진실은 그런 이슈들에 달려 있지 않다는 말이다.

 

이렇게 보는 데에는  가지 중요한 이유들이 있다.2) 첫째는 흔히 혼동하여 사용하는  단어,  소생(resuscitation) 부활(resurrection) 구분하기 때문이다. 소생의 뜻은 명백하다.   사람이 죽었거나 혹은 죽었다고 믿어졌다가 다시 살게  것이다.  사람은 예전의 생활로 돌아와 먹고 마시고 잠을  필요가 있지만, 언젠가는 다시 죽게 된다. 소생은 예전의 존재를 되찾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은 1세기 유대교와 기독교적 맥락 속에서 매우 다른 개념이다. 매우 간단하고 약간 추상적으로 표현하자면, 부활은 예전의 존재를 되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종류의 존재(new kind of existence) 속으로 들어 가는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존재가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 자세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새로운 존재가 우리가 현재 경험하는 존재와는 매우 다른 존재라는 점이다. 어떤 점에서 그것은 삶과 죽음의 범주 너머에 있다. 왜냐하면 부활한 사람은 다시 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새로운 존재는 어떤 점에서 시공간의 범주 너머에 있다. 부활한 그리스도는 어느 곳에나 나타날  있으며, 아마도 같은 시간에  장소 이상에서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활절에 일어난 사건은 소생이 아니었다.3)

 

 구분을 적용하자면, 소생은 본질적으로 시체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이며, 부활은 그것이 필요 없다. 부활은 원형질적 혹은 미립자적인 존재를 되찾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분명히 부활은 시체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 ,  시체가 변형되는 것과 관련될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서 나는  무덤이 비었는지, 혹은  비었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매우 마음이 편하다. 실제로 예수의 유골을 발견하는 것조차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은 이유는 부활절이 소생에 관한 것이 아니라 부활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부활절의 진실이 예수의 시체에 어떤 일이 벌어진 것에 달려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두번째 이유는 신약성서에서 예수의 부활에 관해 최초로 논의한 ,  바울이 고린토전서 15장에서 논의한 것에서 기인한다.4)

 

복잡한 고린토전서 15장에서 특히  가지 점이 우리의 논의에 중요하다. 둘은  장의 앞부분에 바울이 자신이 받은 전승에 대한 요약에 나온다.

 

나는 내가 전해 받은 가장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성서에 기록된 대로 우리의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과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서에 기록된 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과   여러 사람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뒤에 다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한번에 오백 명이 넘는 교우들에게도 나타나셨는데 그 중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는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뒤에 야고보에게 나타나시고  모든  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팔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5)

 

여기서 주목할 첫번째 요점은 바울이  무덤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은 중요할 수도 있고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마도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묻히셨다 언급이 비록 그는 정말로 죽었다”고 말한 것일 수도 있지만,  무덤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간에 바울은 사흘 만에 그들은  무덤이  것을 발견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6)

 

두 번째요점은  본문에  차례 사용된 동사,  부활한 그리스도가 나타나셨다”(appeared)  사람들의 목록에 관한 것이다. 성서에서 나타나셨다 동사는 흔히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특별한 종류의 비전(vision) 환상”(幻像, apparition) 연결되어 사용되곤 한다. 비전과 마찬가지로 환상은 비정상적인 체험으로서,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있는 것이 아니며, 비디오 카메라로 녹화할  있는 종류의 체험이 아니다.

 

바울이 부활  출현을 환상으로 생각했다는 점은 그가 부활한 그리스도가 나타난 사람들의 목록 속에 자신을 포함시켰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뒷받침된다.  그는 마지막으로 팔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고 말했다.7) 그는 부활한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체험이 다른 사람들의 체험과 비슷한 것임을 암시한다.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바울이 체험한 것은 우리가 사도행전 9, 22, 26장에  차례 언급되는 것을 통해   있듯이 비전(vision)이었다. 그와 함께 여행하던 다른 사람들은 그가 체험한 것을 체험하지 못했다. 중요한 점은 비전과 환상이 참된 것일  있다는 점인데, 여기서 참되다는 말은 사태를 진실하게 드러낸다는 뜻이다. 나는 비전과 환상을 환각(hallucination) 범주 속에 넣지 않는다.  하나 중요한 점은 비록 환상을 통해 보는 것에는 흔히  형태를 지닌 사람을 보는 것이 포함되지만, 환상에는 육체적 몸이 관련되지 않는다.

 

고린도전서장의 세번째 특징은  후반부에 나타나 있다. 바울은 부활한 몸이 어떤 모습인지,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떤 몸으로 살아나느냐?”8) 하는 질문을 다룬다. 이것은 물론 우리의 질문,  부활을 얼마나 육체적으로(how physically) 생각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바울은  질문에 대답하면서, 그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모두 가리키는 유비를 사용한다.  육체적 몸과 부활한 몸의 관계는 씨앗과  자란 식물의 관계와 같다. 연속성은 씨앗이 식물이 된다는 점이다. 불연속성은  자란 식물은 씨앗과는 매우 다른 모습이라는 점이다.

 

이어서 바울은  종류의 몸을 구분한다.9) 톰 라이트가 정확하게 지적하였듯이, 학자들은   종류의 몸을 나타내는 그리스어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지에 대해 서로 의견이 다르다.10) 또한 톰이 정확하게 지적하였듯이, “육체적인 ”(physical body) 영적인 ”(spiritual body)이라는 번역은  해당 그리스어의 의미를 뛰어넘는 번역이다.  육체적인 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문자적으로 혼에 의해 살아 있는 ”(a body animated by soul)이며, “영적인 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문자적으로 영에 의해 살아 있는 ”(a body animated by spirit)이다. 그러나  문맥으로 보아 육체적인  영적인  대조시키는 것이 바울이 뜻하는 것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바울이 바로 그 다음에서 말하고 있는 다른 것들에 따르면, “혼에 의해 살아있는  살과 이며, “썩어 없어질  , “흙으로 만들어진 땅의 존재이다. 이것은 우리가 육체적 몸이라는 말로 전형적으로 뜻하는 바이다. 반면에 영에 의해 살아 있는  전혀 이런 것들이 아니다.

 

이처럼 바울은 몸의 부활을 주장하는데, 이것은 비록 그가 부활한 몸을 살과 피를 지닌 ( 육체적) 몸과 철저하게 구분하면서도 몸의 부활을 주장하는 것이다.   가지 몸이 서로 다른 것은 식물이 씨앗과 다른 것과 마찬가지이다. 바울이 사용한 언어가 (톰이 주장하듯이) 새로운 형태의 육체를 가리키는 것인지 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 확정할  없다. 아마도 우리는 바울이 육체적이지 않은 영적인 몸이 있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고린도전서장에 관한 이야기를 끝내기 전에, 나는 아이러니를 주목하고자 한다. 14,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라는 구절은 흔히 보수적이며 근본주의적인 기독교인들이 육체적 부활의 절대적인 핵심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인용된다. 그러나  구절은 부활한 몸이 육체적 몸이 아니라는 것을 강력하게 암시하는  속에 들어 있다는 점이다.11)

 

 무덤이 상관이 없다고 말하는 나의 세번째 이유는 복음서들 속의 부활 이야기들의 성격과 관련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또 다시 문자적 해석이냐 아니면 은유적 해석이냐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들이 만일 누구든  현장에 있었다면 목격할  있었던 사건,  비디오 카메라로 녹화할  있었던 종류의 사건을 보도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하는가?

 

내가 좋아하는 부활절 이야기,  부활한 그리스도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그의 제자  사람에게 나타난 이야기12)를 통해  문제에 대해 함께 성찰하고자 한다.  이야기에 따르면  날은 부활절 일요일이다. 예수의 제자  사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다. 이 때  낯선 사람이 동행하게 되는데, 우리는 그가 부활한 그리스도인 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는 그들이 무엇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는지를 묻는다. 그들은 그에게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던 사람으로서 요새 며칠 동안에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모르다니, 그런 사람이 당신 말고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한다.  전체 이야기의 중심 인물에게 하는 말로서는 상당히 이상한 말이다. 그들은 성서의 의미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 여러 가지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참동안 함께 길을 간다. 그들이 엠마오에 도착하여  낯선 사람이 그들을 떠나려 하자, 그들은 이제 날도 저물어 저녁이  되었으니 여기서 우리와 함께 묶어 가십시오 하고 붙잡는다. 밤이 다가오고 있으니 우리와 함께 머물도록 하십시오 혹은 유명한 찬송가의 표현처럼,   저물어  이미 어두니 구주여 나와 함께 하소서라는 말이다.  낯선 사람은 이에 동의한다. 그들이 함께 식탁에 앉자,  낯선 사람이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준다. 그리고 루가는 그들이 그를 알아보았다고 말한다.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그는 이미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이야기의 내용 가운데 얼마나 많은 부분을 우리가 비디오 카메라로 녹화할  있었겠는가? 우리는 부활한 그리스도가  제자들과 합류하고, 함께 걸어가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마침내 그들이 그로부터 빵을 받을  방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을 녹화할  있었을 것인가? 나로서는   질문들을 물어보는 것만으로도 ‘‘아마도 그것은 그런 종류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다. 오히려  이야기는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는 은유적 이야기로 보인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이야기가 주장하는 것이, 우리가  사실을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간에, 부활한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길을 걷고 있다는 (the risen Christ journeys with us, whether we know that or nor)이다.  이야기는 심지어 우리가  사실을 깨닫는 순간도 있다는 사실도 주장한다. 따라서 나는 엠마오 도상의 이야기가 특별한 날의 특별한 사건,   그 곳에 있었던 사람이면 누구나   있었던 사건을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부활한 그리스도가 그의 제자들에게 계속 되풀이해서 오시는가에 관한 이야기라고 이해한다.13)

 

엠마오 이야기의 진실은 이런 종류의 체험에 근거한 것이지, 궁극적으로 목격자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보도라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이야기의 진실, 그리고 부활절 자체의 진실은 이것이 문자적으로 또한 역사적으로 사실적(factual)이라는 점에 달려 있지 않다. 그것은 예수의 무덤이 비었다거나 아니면 예수의 시체에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것에 달려 있지 않다.

 

나에게 있어서 부활절의 역사적 근거는 매우 단순하다.  예수의 제자들은  당시에나 지금에나 예수가 죽은 후에도 계속해서 그를 살아 있는 실재로 체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이런 체험들 속에는 예수에 대한 비전이나 환상들도 포함되었다. 나는 바울과  밖에 다른 사람들(요한묵시록의 저자를 포함해서) 이런 체험을 했다고 생각한다.  공동체가 예수 안에서 체험했던 성령의 권능이 계속 활동 하는 것을 체험했다는 말이다. 그들이 예수 생전에  속에서 체험했던 똑같은 임재를 그가 죽은 후에도 계속 체험했다는 말이다. 바로 그런 체험 때문에 그들은 예수께서 여전히 이곳에 계시지만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계신다”고 말했던 것이다. 연속성과 불연속성 모두가 주장되고 있다.

 

이처럼 나는 부활절 이후의 예수를 체험적 실재(experiential reality)라고 이해한다. 나는 기독교인들의 종교적 체험 현상을 매우 진지하게 취급한다. 기독교인들은 오랜 세기 동안 예수를 단순히 과거의 기억으로만이 아니라 현재의 인물, 살아 계신 영적인 실재로 계속 체험해왔다. ( 당시  현재의) 그런 체험들은 다양한 형태를 취해왔다. 환상과 신비 체험과 같은 극적인 형태들뿐만 아니라 기도, 예배, 성만찬, 혹은 다른 사람들과  만남과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예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과 같은  극적인 형태도 있다. 부활절의 진실은 이런 체험들 속에 근거한 것이지,  2000  어느 특별한 주일날 일어났던 (혹은 일어나지 않았던) 일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14)

 

14)        내가  무덤의 역사적 사실성에 대한 강조를 좋아하지 않은 신학적 이유도 있다. (1) 그것은 부활절 신앙의 의미를 왜곡시킬  있다.  부활절 신앙이 현재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보다는 과거 사건의 사실성에 대한 믿음이 되기 쉽고,  기독교의 진리가 부활한 그리스도에 대한 계속적 체험에 근거하기보다는  과거 사건이 일어났음 근거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2) 보수적인 기독교적 변증에서는  무덤의 사실성이 흔히 기독교의 진리를 입중하고 다른 종교 전통들보다 기독교가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용된다. 그러나 나는 기독교의 진리가 이런 식으로 입증된다고는 믿지 않으며, 또한 하느님이 일차적으로 혹은 유일하게 우리 (기독교) 전통 속에서만 알려진다고 믿지도 않는다. 이런 주장은 내가 다른 종교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과 상충하며, 기독교의 은총 개념과 화해하기 어렵다. (3) 그런 강조는 실질적으로 하느님에 대한 간섭주의적 이해를 요구하는데, 이것은 내가 받아들이지 않는다(4 참조). 나는  라이트가 이런 의미들을 인정할지 모르기 때문에, 이런 점들은 특별히 톰을 대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일반적인 기독교인들의 주장을 대상으로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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