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요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3: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쉽게 이 단락을, 14-15절에서 특히 그렇습니다만, 십자가 사건과 연결합니다. 우선 13절, 소위 인자의 비하와 승귀를 말합니다. '인자'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사람의 아들"입니다. 유대인들이 스스로를 낮추어 일컫는 말이지만, 성경에서는, 예수가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여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대개 예언과 계시과 관련하여 자신을 일컫는 호칭으로 보면 됩니다. '비하'는 하나님이신 예수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 온 사건을 말합니다. '승귀'는 다시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가 말씀하시길, 인자는 하늘의 일을 전하기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오신다는 것과 인자의 승귀 자체가 이미 하늘의 일이라는 것, 그리고 인자의 고양이 자기 백성을 자신에게 이끄는 구원 사역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자의 책무는, 신적 구원(하늘로부터 오는 구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필요한 성부로부터의 권한과 능력은 인자 자신이 하늘로부터의 비하를 통해서만 인자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에 14절이 있습니다. 인자의 승귀에 14절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수난에 대한 공관복음서의 예고들(공관복음서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말합니다. 대표적으로 마가복음 8:2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다만 수난의 의미를 뱀에 물린 이스라엘인들의 치유를 위해 놋뱀을 들어올린 모세 사건(민수기 21:4-9)에 비유합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사건으로 대표되는 수난이 왜 있어야 되느냐, 15절입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여 하심이니라."
여기서, 단순하게 ‘예수를 믿어 영생을 얻는다’고만 말하면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깊고 오묘한 뜻을 간과해 버리기 쉽습니다. 자칫 그 내용이 곁길로 가버릴 수 있습니다. 구원은 예수를 믿어야 하고, 그 결과로써 주어지는 것은 영생이라는 것인데, 너무나 명확한 내용이지 않습니까? 조금 더 들어가야 합니다.
지금 이 단락은 니고데모와의 대화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니고데모는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으로서 그나마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지자라고 믿고, 예수님이 진정 구약에서 내내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 곧 이스라엘의 해방을 가져 올 약속된 메시아이기를 바라고 밤중에 찾아온, 당시로서는 신분이 높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좀 다르죠? 거듭나지 않으면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알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물과 성령, 사람이 하늘로부터 나는 방식을 정의하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죽어야 하는 것과 함께 다시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일에는 하나님의 영이 개입하셔야 합니다. 물론, 세례 요한에 의한 세례, 그리고 예수님에 의하여 시작된 세례(요 3:25-30)와 배치되어, 모두 하나님 나라를 얻기 위한 회개에의 부름에 응답하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만, 한 가지 더 기억하여야 하는 것은, 성령의 재창조 사역에 앞서 일어나야 하는 성령의 도래, 달리 말하면 성령의 파송은 인자의 들리심을 필요로 합니다.
여기서 믿는다는 말씀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믿음은 과연 무엇일까요?
다시 본문으로 옵니다. 15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4절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15절 말씀은 14절을 믿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부수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15절이 중요한 것보다는 14절이 중요합니다.
요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인자도 들려야 한다! 왜? 그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그래서 14절이 없으면 15절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14절의 사건이 없으면 15절의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15절을 중심으로 놓고 14절을 보면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인자가 들려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이제 예수님이 받으시는 수난과 십자가에 시선이 집중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얻었다고 한다면, 믿는 바 예수님은 최소한 영광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십자가 사건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면 그 십자가 사건은 감격스러운 모습이거나 흠모할만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일반이고, 자연스러운 우리의 관념입니다. 아울러 우리가 믿는 대상은 영광의 모습이어야 하고 감격의 모습이어야 하고 멋있어야 맞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다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민수기 21:4-9의 사건이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광야에서의 놋뱀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볼 때마다 초점은 쳐다보는 자마다에 갑니다. 치유나 구원의 조건으로 가장 쉬운 일, 쳐다보는 것입니다. "쳐다본즉 모두 살리라." 이렇게 윽박지르면 안 됩니다. 치유 또는 구원을 주는 일에 무슨 복잡한 조건을 내 걸더냐? 가장 쉬운 것 아니냐? 쳐다만 보는 것도 못하냐? 이런 식의 해석이 가능합니다. 앞질러 이야기하자면, 예수 믿는 일, 그게 뭐가 어렵더냐? 믿으라, 봐라, 그것으로 됐다. 여기를 넘어야 합니다. 그런 그렇지 않습니다. 15절에서 ‘믿는 자마다’에 강조점을 둔다면, 민수기 사건에서도 쳐다보는 목표물은 멋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쳐다본 목표물은 쳐다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뱀입니다! 성경에서 뱀이 좋은 이미지로 쓰인 적은 없습니다. 뱀은 언제나 사탄과 죄와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4절은, 예수님이 뱀이 되어야 한다는 것과 같은 내용입니다. 뱀은 죄의 원흉입니다. 그래서 교묘하게 이렇게 말하는 셈이 됩니다. 뱀은 사탄이고 죄의 원흉인데, 이제 예수님이 뱀이 되어야 한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내용이 명백히 드러나게 됩니다. 광야에서 모세가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는 것은, 그저 쳐다보는 목표물로서가 아니고, 쳐다보는 것으로 말미암아 어떤 효력을 주는 물건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쳐다 보아 효력을 주는 것이 아니면 당연히 쳐다 보는 것이 조건도 아닙니다. 쳐다봐야 할 것이 쳐다볼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라면, 쳐다보는 것도 가치 있는 방법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민 21장은 쳐다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면 그러면 무슨 이야기를 하려 하는가?
민수기 21장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불뱀에게 물렸습니다. 불뱀에게 물린 것은 스스로 지은 죄로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사실은 불뱀에게 물린 것에서 치료받는 일이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복되는 일회적 사건으로 끝나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누누히 경고하였지만, 내일 또다시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 앞에서 범죄 하고, 그리고 또다시 뱀에게 물릴 가능성이 있는 족속이라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습관을 스스로 고치거나 거기서 구원받을 만한 수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불뱀에 물린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불뱀에게 물린 사건을 해결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죄인 된 것을 고치는 것으로 해결책을 제시하십니다. 즉 그들의 죄를 없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놋뱀을 만들어 나무에 닮으로써, 우리의 죄를 씻는 방법, 죄를 처치하는 메시지를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하시는 것입니다. 장대 위에 놋뱀을 만들어 매달라, 달리 말하자면, 나무에 뱀을 매달라 하시면서 성경은 이 사건을 명백하게 하기 위해서, 나무에 달아매는 것에 관하여 특별한 요구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규칙으로 요구하고 있습니다. 신 21:23, "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나무에 달아매는 것은 잘 보이라는 것이 아니라,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놋뱀을 달았습니다. 뱀은 죄의 원흉이요 놋은 심판을 의미하기 때문에, 쉽게 말하면, 놋뱀은 심판받은 뱀을, 저주받은 뱀입니다. 그러니까 나무에 심판 받은 뱀, 저주받은 뱀을 달아라! 그것을 쳐다볼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니까 구원의 조건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씻으시는 방법으로 보여 주시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요 3:14절을 근거로 해서, 15절, 내가 저주를 받음으로 너희가 고쳐진다, 너희가 영생을 얻는다, 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얻는다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내가 저주를 받음으로, 내가 뱀이 되어 십자가에 달림으로써, 너희가 고쳐지리라 하시는 것입니다. 아, 아버지 하나님,!
다시 요 3장 앞부분부터 시작하십시다. 니고데모가 찾아옵니다. 그리고 주님께 말씀드립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대단하신 분이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니고데모야, 너는 거듭나지 아니하기에 내가 누군지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런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도 못한다. 깨닫지도 못한다. 그러기에 중생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이런 일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중생하기 전까지는 절대 알 수 없다고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다음이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니고데모에게, '너는 산헤드린 공회원이니 공부도 많이 했겠다. 그러나 아직도 부족하다. 가서 성경을 더 연구하고 공부해서 눈을 떠서 와라'가 아니라, 이해도 못하는 '거듭 나라'고, 중생을 촉구하지도 않으시며, 중생을 위해서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지도 않으십니다. 인간으로서는 그 모든 조건과 방법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 문제 자체를 예수님이 친히 죽으시는 방법으로만 해결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내가 너희의 죗값을 지고 저주를 받아 심판받고 죽어서 대속하는 길밖에 너희를 중생시킬 방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 방법밖에는 달리 길이 없다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성경이 누누이 이야기하는 구원론입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리스도가 필요하다고 우리가 안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가 필요하다고 우리가 요청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분을 요청하기도 전에, 하나님 쪽에서 먼저 죗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요 3:16 이하, 다시 읽어 보십시요. 얼마나 자연스럽습니까?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3: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3: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3: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요3: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