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이 짧은 절이 어려운 것은, 세 개의 단어 때문입니다. 문제의 단어는 "침노를 당하노니"(헬라어로는, ‘비아제타이biazetai’)와 "빼앗느니라"(헬라어로는, ‘하르파주신 아우텐harpazousin auten’), 그리고 반복해서 사용되되 형태만을 바꾼 "침노하는 자"(헬라어로는, ‘비아스타이biastai’) 때문입니다.
가장 난해한 단어인 비아제타이’는 중간태로도 해석될 수 있고 수동태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중간태는 헬라어에만 있는 것으로, 사용되는 어느 곳에서도 거의 해석상 애매합니다. 동사가 중간태로 사용될 때에는, 주어는 동사(동작)의 작인이면서, 이점에 있어서는 능동태와 같지만, 그러나 동시에, 마치 수동태처럼 주어는 동사의 동작이 일으킨 결과에 영향을 받거나(재귀형과 같이), 혹은 적어도 주어 자신과 동사의 동작이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음을 나타내는 역할을 합니다. 중간태 동사를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의 문제는, 헬라어의 현재시제에선 중간태와 수동태의 어형이 동일하므로, 그것이 중간태인지 혹 수동태인지의 여부는 문맥을 통해 결정합니다.
그러니까 '비아제타이"가 중간태일 때는 “힘차게 온다, 강력하게 전진하다”(come forcefully), 수동태일 때는 “폭행을 당하다”(suffer violence)라고 해석합니다. '하르파제인’은 긍정적으로 “소유하다, 요구하다”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고, 부정적으로 “약탈하다"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하반절 ‘비아스타이 하르파주신 아우텐'(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로 번역된 절)도 긍정적으로 “있는(물질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이 그것을 빼앗는다”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폭력적인 자들이 그것을 강탈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에 때때로 병행 구절을 참조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이 구절과 병행 구절은 누가복음 16:16입니다.
눅16: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하지만 등장하는 배경이 전혀 다릅니다. 부정적인 의미가 전혀 암시되지 않는 뜻으로 "침입하다"이며, 천국을 주어로 취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에 대한 사람들이 태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에서 절정을 이루었고, 이제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 전파되었다는 것이며, 이것이 곧 모든 사람의 마음을 끄는 초대라는 것입니다.
“힘차게 온다, 강력하게 전진하다”와 같은 '비아조마이'(biazomai, biazetai의 원형동사)의 중간태적 의미는 누가복음에는 적합할 수 있지만, 마태복음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biazomai"나 "harpazo'라는 단어들은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에서 이 구절은 천국의 왕국이 폭력적 반대에 부딪혔으며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마태가 이 복음서를 쓰고 있을 당시에는 이미 제자 공동체의 구성원을 빼내려는 자나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들의 명성을 가로채는 행위가 있어 왔습니다. 마태복음 7:15의 양의 옷을 입고 다가오는 “노략질하는 이리” 또는 사도 바울이 말한 에베소 교회의 “사나운 이리”(행 20:28-30,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를 참조하면, 마태복음에서 폭력적인 반대 또는 탈취의 부정적인 의미로 씌여졌음이 더욱 확실해집니다.
이제 마태복음의 문맥에만 유의하여야 합니다. 옛 질서의 마지막 순교자이며, 새 질서의 첫 순교자인 요한에 대한 언급이 마태로 하여금 여기에서 이 말을 하게 했을 것으로 봅니다. “세례 요한의 때”는 분명히 과거에 속해 있으며, 지금은 천국이 계승하고 있습니다. 요한의 때와 현재 사이에 이미 천국의 역사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 당시에는, 예수님의 공생애와 함께 천국이 시작되었음으로 그 역사가 아직 매우 짧습니다. 복음서를 읽을 때에 가져야 하는 또 하나의 시점, 곧 마태가 이 복음서를 쓸 무렵에는 역사가 한 두 세대를 더 지났습니다. 짧든 길든 그 역사는 순수하게 하나님의 목적이 승리한 역사가 아니라 “침노”라는 역설적인 특징으로 내내 두드러져 왔다는 것입니다. 요한 자신은 이미 징역형의 "폭력"을 겪었고, 곧 사형에 처해질 것입니다.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은 이미 적개심으로 가득 찬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아직 육체적 폭력으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예수님 자신(16:21 등)과 제자(10:17-23, 28, 34-39) 모두에게 곧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앞선 절들에서, 7-9절에서, 선지자보다 더 위대한 선지자인 세례 요한이 지금은 헤롯의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었습니다(그와 함께 11-15절은 세례 요한의 뒤를 이어 "오실 그이"이신 예수님의 위대성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시작하신 천국의 위대성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12절에서 고려되고 있는 바는 천국의 위대성과 모순되게 보일 수도 있는 핍박과 반대라는 현실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고난은 천국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운명이었습니다(이미 살펴 본, 10:17-25, 28, 38-39에서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제 곧 13:19에서 ‘하르파제이’(harpazo의 3인칭 단수)의 사용으로 이 반대의 배후에는 악의 세력들이 존재하고 있을 것임이 확실해집니다. 요한의 고난은 예수께서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라고 말씀하시는 17:12에 다시 제시됩니다. 요한에서 예수로 연결된 격렬한 반대 경험의 연속성이 충분히 암시되어 있습니다.
천국의 명백한 위대성을 고려할 때, 본 절은 충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위대하기 때문에 폭력을 당하고 폭력적인 자들이 천국을 노략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