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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전적으로 성경 읽기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에 대하여 설명하기

창 18:17-19 공의와 정의

by pooh_in_the_Way 2021.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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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정의'와 '공의'가 자주 나옵니다. 영어로는 justice와 righteousness 입니다만, 현대 서양인들, 그리고 이들의 영향을 받은 우리 역시, 이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그래서 히브리인들이 말하는 체다카와 미쉬파트는 사뭇 우리의 이해와 다릅니다. 

창세기의 두 구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이 마음에 새겨야 할 사명을 정해줍니다.

창18:1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창18:18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창18: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미쉬파트, mishpat)와 정의(체다카, chedaqa)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여기서 두 단어, 체다카와 미쉬파트는 정의의 서로 다른 측면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미쉬파트는 응보의 정의 혹은 법규를 의미합니다. 이에 따르면 자유로운 사회는 공명정대하게 집행되는 법에 의해 통치되어야 합니다. 죄인은 처벌을 받고 죄 없는 이는 풀려나고 인권은 지켜져야 합니다. 반면 체다카는 더 실질이고 덜 절차적인 개념인 분배의 정의를 가리킵니다. 

사실 체다카는 번역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의 단어 안에 보통은 상반되는 뜻인 두 개념, 즉 자선과 정의의 개념이 결합돼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누군가에게 그가 돈을 받을 자격이 있든 없든 100만원을 준다고 해봅시다. 돈을 받을 사람이 그럴 자격과 이유가 있다면(나를 위해 뭔가 그만한 가치를 갖는 일을 했다면, 100만원을 주는) 내 행동은 정의로운 행위이고,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자선 행위입니다. 영어로는 자선이 정의로운 행위일 수 없고, 정의로운 행위를 자선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라틴어 카리타스 caritas와 이우스티티아 iustitia도 마찬가지다). 체다카는 이 두 가지를 모두 뜻하니 묘한 단어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는 점유possession와 소유ownership의 차이를 강조한 유대 신학에서 나온 개념입니다. 궁극적으로 세상 만물의 주인은 창조주 하나님이입니. 우리는 점유하고 있을 뿐 소유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맡긴 것을 보관하고 있을 뿐입니다. 〈레위기〉의 말씀이 명확한 사례입니다. “토지를 영영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잠시 머무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25장 23절) 우리에게 절대적인 소유권이 있다면, 정의 (억지로 주어야 하는 행위)와 자선(아량으로 베푸는 행위)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전자는 법률적으로 강제되는 의무이며, 후자는 도덕적인 의무, 자비와 연민의 촉구입니다. 그러나 유대교에서는 우리는 재산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한 관리인에 불과하므로 신탁의 조건에 충실해야 하는데, 그 조건 중 하나가 우리가 가진 것의 일부를 궁핍한 자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유대교에서는 다른 법체계에서 자선으로 간주되는 것이 법의 엄격한 요구 사항이며 필요할 때면 법정이 강제로 시행할 수 있는 행위인 것입니다.

따라서 체다카는 흔히 ‘사회 정의’라고 부르는 것이니, 누구나 삶의 기본 요건을 갖추며 살아야 하며 필요한 것보다 많이 가진 자들은 잉여의 일부를 덜 가진 자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열망하던 사회, 즉 누구나 존엄한 삶을 살 기본 권리를 가지고 있고 모두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언약으로 맺은 공동체에서 평등한 시민이 되는 사회를 이루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입니다. 언약의 율법은 그 점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출22:21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출22:22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출22:23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출22:24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
출22:25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
출22:26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출22:27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경제와 정치 질서, 특히 권력과 심지어는 ‘목소리’마저 없기에 불의와 불공정의 피해를 입은 자들에게 큰 관심을 보이는 분이었습니다.

시146:7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시146:8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시146:9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이스라엘 백성이 건설해야 할 사회는 그들이 이집트에서 겪은 것, 가난하고 핍박받는 노예의 삶과는 반대인 사회였습니다. 그들이 노예살이에서 해방된 것은 자유에 이르는 도정의 첫 걸음이었습니다. 두 번째(하나님과의 언약)는 아무도 공동체의 은혜로운 삶에서 배제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공동의 약속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말씀은 미쉬파트, 즉 법규만으로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 수 없다는 뜻이며, 거기에는 체다카, 즉 자원의 공정한 분배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앓고 있는 병을 치료할 의료 수단이 없는 사람은 막을 수 있는 병과 피할 수 있는 죽음의 희생자만 되는 게 아니라, 책임 있는 인간으로서 자기를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잃는 것이기도 합니다. 반노예살이나 마찬가지인 채무 노동자, 억압적인 사회에 숨이 막히는 여자 어린이, 실질적인 벌이 수단이 없는 가난뱅이 노동자들은 행복이라는 면에서도 책임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능력 (여기에는 기본적인 자유가 꼭 필요하다)이라는 면에서도 모든 걸 빼앗긴 이들입니다. 책임 있는 삶에는 자유가 필요랍니다.

개인의 자유는 이사야 벌린이 ‘소극적 자유’ 라고 부른 것, 그러니까 제약에서 벗어난 없는 상태(성경의 초페쉬chofesh)를 뜻합니다. 집단의 자유(성경의 체루트cherut)는 그와 다릅니다. 무엇보다도 나의 자유는 너의 자유를 희생하여 얻는 게 아닙니다. 다수가 굶는 마당에 소수가 잘 사는 사회, 전부가 아니라 일부만 좋은 교육과 적절한 의료 혜택과 쾌적한 편의 시설을 누리는 사회는 자유로운 해방의 땅이 아닙니다. 자유로운 사회가 되려면 억압과 압제가 없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책임 있는 시민이 되는 길을 막는 모든 장애물이 없애야 합니다. “폭정뿐 아니라 가난도, 사회적 박탈뿐 아니라 열악한 사회적 기회도, 불관용이나 억압적 국가의 과잉 행동뿐 아니라 공공 기관의 태만”도 그런 장애물입니다.

어떻게 그런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농업 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성경의 율법은 그런 환경에서 발생하는 빈곤에 관해 말합니다. 아무도 제7일에는 일하지 말아야 했고 그리하여 일주일에 하루는 모든 경제 및 정치의 위계질서가 중지되었습니다. 수확의 일부는 가난한 자를 위해 남겨두었으니, 밭 모퉁이와 떨어진 이삭, 그만한 양의 여러 가지 다른 곡식 등이 그들에게 돌아갈 몫이었습니다(레위기 19장 9-10절, 신명기 15장 1-2절). 7년의 농업 주기 가운데 제3년과 제6년은 수확물의 십분의 일을 가난한 자에게 주었습니다(신명기 26장 12절). 땅을 경작하지 말아야 하는 제7년, 즉 안식년에는 그 땅에 자생으로 생긴 소산을 “백성의 가난한 자가 먹”(출애굽기 23장 10절)게 하였고 빚을 면제해 주었습니다(신명기 15장 1-2절). 이 마지막 조항은 회피할 소지가 있었고 성경은 그 점을 분명하게 경고합니다.

신15:9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신15:10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15: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빚을 지는 것은 일종의 노예 상태입니다. 그러나 대부 행위를 완전히 금지하면 사람들에게 영원한 가난을 선고하는 셈이며 스스로 기업을 일으키거나 유지할 기회를 앗아갈 것입니다. 성경의 관점에서 현재 세계은행이 실시하는 소액 대출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빈곤을 완화하는 데 어느 정도의 사업 자금을 대주는 것보다 효과 적인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빚이 계속 쌓이게 방치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경제 체제는 자유로운 시민을 양성해야 하고 빚의 노예를 양산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주기적인 채무 탕감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렇게 해야 사람들은 과거의 짐을 떨쳐 내고 다시 출발할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채권자에게 솔직하게 호소합니다. 채무 면제는 도덕적 의무가 아닙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공동의 번영에 이르는 열쇠입니다(“네 하느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라”).

희년(禧年)의 관습에도 비슷한 사상이 깔려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제 몫의 땅을 가져야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누군가는 가난이나 흉작을 비롯한 여러 가지 불운 때문에 땅을 팔아야 했습니다. 50년에 한 해는 모든 땅이 원 주인에게 돌아가고 모두가 조상의 유산을 되찾게 해줍니다. 여기서 경제적 평등과 정치적 자유의 연관성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라"(레위기 25장 10절)

이 주기적인 재분배는 시장의 기능만으로는 평등한 분배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성서적 의식을 뚜렷이 보여줍니다. 안식년과 희년은 노동력이나 땅을 억지로 팔아야 했던 사람들에게 공평한 경쟁의 무대를 다시 마련해줌으로써 시장의 폐해를 교정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것은 빈곤과 의존의 악순환을 깨뜨립니다.

특히 매혹적인 유대 율법의 세부 규정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체다카의 도움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체다카를 베풀어야 한다는 규정입니다. 표면상으로는 부조리한 규정입니다. 왜 Y에게 돈을 나눠줄 수 있을 만큼 많은 돈을 X에게 주는가? 그냥 직접 Y에게 주는 게 더 논리적이고 효율적입니다. 그러나 랍비들은 베풂이 인간 존엄함의 본질적인 일부라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에는 ‘베푸는 손이 으뜸이고 받는 손은 열등하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공동체가 가난한 자에게 충분한 돈을 주어서 그들 역시 베풀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랍비들의 생각은 인간의 조건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유대교는 평등 관념에 대해서도 매우 독특한 발상을 보여줍니다. 최고의 평등은 수입이나 부의 평등이 아니고 기회의 평등도 아닙니다. 우리 각자가 기도할 때는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고 분쟁할 때는 법 앞에서 동등한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사회는 모든 성원에게 동등한 존엄함(히브리어는 카보드 하브리요트kavod Habriyot 즉 ‘인간다운 품위’)을 보장해야 합니다.

 

이는 선지자들이 한결같이 염두에 두었던 주제이었습니다. 예언서를 남긴 최초의 선지자인 아모스는 저 유명한 신탁의 말로 이렇게 외칩니다. 


암2:6 ...그들이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
암2:7 힘 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고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영어 성경의 공인 판본Authorized version인 <킹 제임스 성경>은 “경손한 자의 머리를 짓밟고”를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로 옮기고 있습니다. 2500년도 더 전에 살면서 활동했던 선지자들은 거침없이 왕에게 할 말을 하고 권력자에게 진리를 말한 세계 최초의 사회 비판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에는 도덕적•사회적•경제적 차원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법규나 절차의 투명성이라는 좁은 의미의 정의 말고도 사회 구성원 전부에게 명예로운 자리를 허락해야 한다는 실질적인 의미에서의 정의와도 연관돼 있다고 하였습니다. 요하네스 린드블름 Johannes Lindblom에 따르면, 선지자의 가르침은 “연대성을 특징으로 한다. 자선과 정의에 대한 요구 이면에는 … 선출과 언약을 통해 하나로 결합한 유기적인 전체로서의 백성이라는 관념이 깔려 있다.” 거대한 빈부 격차, 착취의 관행, 가혹한 고용 조건, 이른바 ‘저소득 계층’의 열악한 상황 등은 인간의 연대성에 균열을 가져옵니다. 그것은 사회를 분열시키고 공동선이라는 관념을 파괴합니다.

 

A. J. 헤셸 Heschel은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선지자들은 우리에게 도덕적인 민족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거기에서는 죄 없는 자 없으며 책임 없는 자 없다. 개인이 어떤 식으로든 사회의 정신에 영향을 받는 것이라면, 개인의 범죄는 사회의 타락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선지자의 시대에는 한 사회에 해당되었지만 지금은 전 세계에 해당됩니다. 오늘날 내적으로 긴밀하게 연관된 영역 전체는 우리가 책임을 지고 관심을 보여야 할 영역입니다.



참고:

1 《차이의 존중》, 조너선 색스, 말글빛냄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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