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24:15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마24:16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마24:17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 가지 말며
마24:18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마24:19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마24:20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마24:21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마24:22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마24:23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마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마24:25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마24:26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마24:27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마24:28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니라
서두의 “그러므로”는 본 단락을 앞서의 “그제야 끝이 오리라”와 밀접하게 연결합니다. 4-14절에서 다양한 예비적 사건과 경험이 제시된 후(이러한 것들은 끝이 아니다) 이곳에서 실제로 “끝’’(성전의 멸망)을 초래하는 일련의 사건들, 즉 제자들이 제기한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제시됩니다. “끝” 자체에 대한 언급은 29-31절에 와서야 선언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29-31절은 15-28절의 사건들 “이후 즉시” 일어날 일에 대한 묘사이기 때문에, 후자는 끝의 시작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은 성전의 멸망에서 절정에 달할 예루살렘 포위 기간과 그 전까지의 환난 기간에 대해 언급합니다. 여기서의 초점은 유대에 국한됩니다. 유대 혁명은 AD 66년에 시작되었으며, 67-68년에는 로마의 장군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가 팔레스타인 지역 대부분을 점령합니다. 로마는 68-69년에 일어난 내전으로 동쪽에 대한 군사 작전을 중지하지만, 이 기간 중 예루살렘은 유대 파벌 간의 주도권 다툼에 의한 내전으로 나뉘었으며, 성전도 양분되었습니다(안뜰은 엘르아살이 이끄는 열심당이, 바깥 뜰은 기스칼라의 요한이 장악했습니다). AD 69년에 마침내 로마의 공격이 재개되었을 때 예루살렘은 이미 힘을 잃고 무기력한 상태였습니다. 당시 헤로디움(Herodium)과 맛사다(Masada)를 제외한 다른 지역은 대부분 진압되었으며, 베스파시아누스가 새로운 황제가 되어 로마로 돌아가자 그의 아들 디도가 예루살렘을 다섯 달 동안 포위하여 괴롭혔으며, 70년 가을에는 성전과 성읍 대부분이 파괴되었습니다.
15-28절의 사건들은 구약 성경의 예언과 묵시를 암시하는 언어로 묘사되며, 따라서 요세푸스의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마지막 사건들의 구체적인 양상에 대한 규명은 필요치 않으며,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결국 이 부분은 역사적 진술이라기보다 예언으로 제시된 것입니다. 본문은 유대에 있는 자들이 산으로 도망해야 할 단서가 될 “멸망의 가증한 것”에 대한 예언으로 시작하지만, 이어지는 도망과 고통에 관한 언어는 구체적인 규명이 필요 없을 만큼 통상적이며,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의 주장은 이 환난 기간 중 언제라도 가능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모든 일이 너무 끔찍해서 종말처럼 보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종말은 아닙니다. “그날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줄어들 것입니다. 반대로 인자의 ‘파루시아’는 전혀 다른 차원의 규모로 진행될 것이며, 번개처럼 정확하고 광범위하게 일어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대한 포위는 “끝”(‘텔로스’)을 의미하지만, 이것이 ‘파루시아’나 “세상 끝”(‘쉰텔레이아’)은 아닙니다. 29-31절에서 설명하겠지만, 옛 질서의 끝은 인자의 우주적 통치와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 사방에서 모이는 신호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자는 하늘에서 통치하시지만, 장차 아무도 모르는 시간에 다시 오실 것이며, 그때가 되면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15절, 예루살렘에 “끝”이 가까이 왔다는 가장 분명한 징조가 친숙한 성경 용어로 결정적으로 묘사됩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은 다니엘서에서 나온 모티프로 규명되며, (마가가 확신한 것처럼) 특별한 설명 없이도 알 수 있습니다. 다니엘서에서 이 구절은 북방 왕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면서 세운 멸망하게 할 가증한 것을 가리킵니다(단 8:13; 9:27; 11:31 “..멸망하게 하는 가증한 것”; 12:11).
다니엘 9:27에서 예루살렘을 황폐하게 만든 세력은 이방 제국으로 성전에서 예물을 금하고 가증한 것을 세울 것입니다. 다니엘 9:26은 예루살렘 도성과 성전의 파괴를 언급하고 있어서 9:26-27은 마태복음 24:15의 상황과 유사합니다. 다니엘 11:31은 군대가 와서 성전을 더럽히게 될 것을 묘사하며, 이는 9:27에서 이미 언급한 심판을 떠올리게 합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는 장면은 다니엘 9:27의 예언을 성취합니(단 12:11).
이 언급은 확실히 BC 167년에 일어났던 사건을 가리킵니다. 당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유대의 제사를 금했으며, 번제단 위에 이교 제사(돼지 도축을 포함하여)를 위한 제단을 세웠습니다. 이 제단은 마카베오(Judas Maccabeus)가 예루살렘을 다시 탈환하여 성전을 정화하고 예배를 회복하기까지 3년 동안 성전에 있었습니다. 마카베오1서 1장 54절은 이 이교 제단에 대해 동일한 구절로 묘사합니다.
다니엘서에 언급된 구체적인 신성모독은 이제 오래전 일이 되었으며, 예수는 장차 올 일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이 구절에 대한 해석에는 분별이 필요하며,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라는 편집적 삽입구 자체는 지혜 있는 자만이 다니엘서에 계시된 비밀을 깨달을 것이라는 다니엘 12장 10절의 언급을 상기시킵니다.
안티오쿠스가 세운 멸망케 할 가증한 것과 연속성을 가질 수 있는 무엇인가에 대해 규명해야 하지만, 그것이 어떤 모습을 취할 것인지는 상상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더럽고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성전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에 설 것이며” 그것을 보는 자들이 도망할 만큼 가증스러운 성격의 것으로서 너무 늦기 전에 도망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서 있는” 이라는 중성 분사(1033쪽, 각주 25)는 마가복음의 남성을 의도적으로 바꾼 것으로, 사람을 가리키기보다 사물이나 사건을 가리킨다. 본문 전체가 실제로 일어난 일에 비추어 기록된 “예언”이라고 믿는 자들은 큰 확신 없이 적합한 대상을 찾으려는 시도를 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순수한 예언으로 믿는 자들은 그러한 구체적인 시도는 가능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다고 생각하며, 본문이 말하는 것은 장차 신성을 모독하는 어떤 행위가 유대인에게 재앙이 임박했음을 알려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제한된 지식밖에 소유하지 못한 우리로서는 예수의 예언을 들은 자들이 “멸망의 가증한 것”(멸망케 할 가증한 것)으로 생각할 만한 역사적 사건을 세 가지 정도 들 수 있습니다. (1) AD 40년에 가이오 황제는 자신의 동상을 예루살렘 성전에 세울 것을 지시합니다. 그러나 이 명령은 가이오가 AD 41년에 암살당할 때까지 시행되지 못했습니다. (2) AD 67/68년에 열심당원들은 성전을 점령하여 혁명의 교두보로 삼았으며, 요세푸스는 그들이 “더러운 발로 성소를 침범”하고 성전 제의를 조롱했으며, 파벌간의 싸움으로 말미암아 성소는 피로 얼룩졌다고 주장합니다. (3) 로마 군대가 마침내 성전으로 들어왔을 때 그들의 (우상) 깃발이 거룩한 곳에 나타난 것은 유대인으로 하여금 안티오쿠스를 떠올리게 했을 입니이다. 심지어 요세푸스는 로마 군병들이 성전 뜰에서 자신의 깃발에 제사를 지냈다고 언급합니다. 이 구절에 대한 누가의 평행구(“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눅 21:20])는 “멸망의 가증한 것”을 이런 의미로 이해합니다.
이상의 세 가지 사건 가운데 이 구절의 의미에 정확히 부합하는 사건은 없습니다. 가이오 사건은 시기적으로 너무 앞설 뿐 아니라, 사실상 일어나지도 않았으며, 로마군이 성소에 침입한 사건은 끝이 오기 전에 도망할 수 있는 신호로 보기에는 너무 늦습니다. 열심당원의 점령은 시기적으로 가장 적합하지만, 다니엘이 말한 이교도의 가증함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보다 현명한 방법은 기록된 역사와 구체적으로 연결하지 않고 신성모독을 로마의 침입으로 야기된 상존하는 위협으로 보는 것입니다.
16-18절, 15절은 “너희”가 볼 것에 대해 언급하지만, 이제 예수는 제자들에게 직접 언급하지 않고 “관련된 자”에게 3인칭으로 말합니다. 대상은 광범위하며, 성전과 관련된 자나 심지어 예루살렘 거민뿐 아니라 “유대에 있는 자들” 전체로 확장됩니다. 로마 군대가 점령하면 어떤 마을이나 성읍도 안전하지 못하며, 사람들은 마카베오가 첫 번째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세워졌을 때 산으로 도망하여 “광야”에 있는 다른 애국자들과 합류한 것처럼(마카베오1서 2:29-31) 유서 깊은 도피처인 “산”으로 도망해야 합니다. “유대”에 대한 언급은 이 시기가 예루 살램에 대한 최종적 포위가 이루어지기 전임을 보여 줍니다. 당시에는 광범위한 지역이 로마의 지배 아래 들어갔으나 아직은 도망이 가능할 때였습니다(포위가 시작된 후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자들도 불가능했지만). 이 도망은 지붕에 있다가 소식을 들은 자가 짐을 꾸리러 집 안으로(지붕은 바깥 계단을 통해 올라가도록 되어 있다) 들어가거나 밭에서 일하는 자가 집에 벗어 둔 겉옷을 가지러 갈 시간이 없을 만큼 긴박합니다.
19-20절, 도피처로의 피신은 언제나 비참할 수밖에 없지만, 유대의 위급 상황에서는 특히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곳의 “화”는 11장 21절, 18장 7b절, 26장 24절의 “화”나 23장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화”와 달리 저주가 아니라 고통당할 자들에 대한 연민의 정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의 문제는 쉽게 상상이 됩니다. 추운 날씨는 사태를 악화시킬 뿐입니다. 유대 산지의 겨울은 날씨가 매우 추우며, 많은 비와 홍수는 이동을 어렵게 하거나 불가능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에 도망하는 문제(마태복음에만 다룹니다)는 어떤가? 예수는 안식일에는 1마일 이상 다닐 수 없다는 서기관의 규례를 범하지 않으려는 신실한 유대인(그리고 보수적인 유대 그리스도인)을 염두에 두셨는가? 아니면 마태 자신이 자신의 공동체(그들은 12:1-14에서 예수가 몸소 보이신 “유연한” 태도를 따라 안식일을 엄격히 지키지는 않았으나 안식일에 도망한다면 여전히 안식일을 고수하는 비기독교 유대인에게 적대적 시선을 받았을 것이다)를 위해 이 구절을 덧붙였는가? 혹은 이러한 것들은 지나치게 이데올로기적인 접근이며 사실은 안식일을 엄격히 준수하는 유대인들 때문에 음식을 파는 곳이 없다는 등의 현실적인 이유들이 도망자들에게 문제가 된다는 것인가?
21-22절, 예루살렘 포위의 공포에 대한 요세푸스의 끔찍한 묘사는 21절이 묵시의 과장법적 언어(단 12:1; 욜 2:2; 계 16:18와 같은)를 사용했지만, 이 사건에 연루된 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임을 보여 줍니다. 말이 나온 김에 “후에도 없으리라”는 표현은 이 본문이 역사적 사건이며, 종말에 관한 언급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공포의 기간은 사실상 다섯 달 후 로마의 점령으로 줄어들었으며(“감하시리라"), 성 안에서 굶주린 자들은 육체적으로는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당연한” 정복 과정조차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에 의한 것입니다. 이 “택하신 자들”은 24절 및 31절에서 인자에게 속한 자들로 다시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자부심(출 19:5-6; 레 20:26 등)은 이제 나라 전체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땅 끝에서 와서(31절) 새로운 메시아 공동체를 형성하는 자들에게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참 백성도 포위를 피할 수는 없지만, 그 가운데서 육체적으로나(22절) 영적으로(24절)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포위가 계속되거나 비참해지지 않는 것은 예루살렘 백성 가운데 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23-26절,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전 마지막 얼마 동안 있을 예루살렘의 재앙적 상황은 포위가 있기 전 전반적 격변기의 한 부분으로 5절과 11절에 예언된 메시아 사칭이 난무할 수 있는 충분한 환경을 조성합니다.
요세푸스는, 포위 기간 중 이러한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의 활동을 보여 주는 한 사례로, 시몬 바르-기오라(Simon bar-Giora)라는 인물을 기록하는데, “왕”으로 간주된 그는 결국 로마의 공격시 “적의 대장”으로 지목되어 사형당합니다. 요세푸스는 익명의 “많은”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언급하며, 계속해서 성이 함락되기 전 일련의 표적과 기사들에 대해 언급하는데, 이것을 구원의 징조로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전합니다. 사람들은 신적 개입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제시하는 자들에게 귀를 기울이기 쉬우며, 만일 그들이 이러한 주장과 함께 “표적과 기사”를 행한다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민족주의 지도자 가운데 이러한 기적적 활동을 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구체적인 사례를 인용합니다. 그들은 요단강을 가르고, 성벽을 무너뜨리며, 모세의 거룩한 기구들을 발견하고, “특이한 이적과 표적” 및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 징조”를 보여 줍니다.
“택하신 자들”도 이러한 미혹을 피할 수 없지만, “할 수만 있으면”이라는 표현은 성 내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들에게는 그것과 맞설 수 있는 영적인 역량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앞서 경고를 받았으며(25절), 예수의 기적에 대한 기억을 통해 차이를 깨달아야 했습니다.
27절,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이 구절은 포위 기간 중 사건들과 미래적 ‘파루시아’를 분명하게 구별하는 일종의 “여담”입니다. 실제적인 ‘파루시아’는 포위 기간 중 그리스도를 사칭한 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다를 것입니다. 이 구절을 도입하는 “왜냐하면”은 이 구절이 본문의 흐름에 적합함을 보여 준다(“….믿지 말라 왜냐하면”). 외진 곳에서 자신의 주장을 믿게 하기 위해 표적을 행하는 소위 메시아들과 달리 인자의 ‘파루시아’는 하늘 전체를 가로지르는 번개처럼 누구나 관측할 수 있는 사건이 될 것입니다. 이 경고를 유발한 것은 3절에 제시된 제자들의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파루시아’와 세상 끝을 “이런 일”(성전의 멸망)과 구별하지만, 두 사건의 관련성(가령 어느 하나 없이는 다른 하나가 일어나지 않는다)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성에 대한 포위와 함락의 시기에는 메시아를 사칭하는 자들의 주장이 난무하겠지만, 인자의 ‘파루시아’는 그러한 주장이나 증거가 필요치 않습니다. 인자의 임함은 (36-44절에서 분명히 밝히는 대로) 모든 사람이 보고 알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는 ‘파루시아’와 세상 끝을 다가오는 성전의 멸망과 결정적으로 구별합니다. 하나는 예견하여 준비할 수 있으나(15절 이하는 이에 관한 언급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전 경고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파루시아’의 징조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은 잘못된 것입니다. 메시아 사칭자들이 표적을 보이는 것과 달리 인자는 ‘파루시아’에 대한 경고적 징조(표적)를 보여 주지 않을 것이다. 번개가 칠 것이라는 징조는 없지만, 번개가 치면 누구도 갑작스러운 조명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파루시아’ 언급은 고려 중인 사건들과 구별됨을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 ‘파루시아’는 주제가 완전히 바뀌는 36절부터 강화의 초점으로 등장할 것입니다.
28절,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니라.” 독수리에 대한 이 속담적 격언은 욥기 39장 30절을 상기시킨다. “시체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있느니라.” 이 구절은, 독수리의 관점 또는 관찰자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독수리는 시력이 좋기 때문에 먼 곳에서도 시체를 식별할 수 있으며(욥 39:29), 시체가 보이면 즉시 행동을 취합니다. 이것은 통찰력 있는 제자가 이 사건의 의미를 깨닫고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비유로 해석할 수 있으며, 15-16절의 “너희가 보거든 도망할지어다”를 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르게 보는 방법은, 독수리가 모인 것을 보는 자는 시체가 있다는 사실을 안다는 입니다. 이 해석은 두 가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즉 앞 단락 전체에 대한 반영인 경우 “예루살렘이 포위되는 것을 보면 그것이 멸망할 것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 되며, 바로 앞 절을 가리킬 경우에는 “인자의 임함은 시체가 있는 것처럼 명백하다”는 뜻이 됩니다. 이 구절이 27절 뒤에 이어진다는 것은 누가가 ‘파루시아’에 관한 본문에서 사용한 것처럼(눅 17:37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이르시되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후자의 대안을 뒷받침하지만, 이 구절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습니다. 이 무서운 주제는 본문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와 잘 어울리지만, 로마 군대라는 “독수리”가 예루살렘의 “시체”를 포위한다는 묘사로 알레고리화 하는 것은, 속담에 대한 지나친 문학적 해석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