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24: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마24: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마24: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마24: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마24:8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제자들이 제시한 질문의 전반부는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이며, 대답은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있을 성전의 멸망을 정점으로 하는 일련의 시간 지표를 중심으로 구성됩니다. 전통적인 해석으로는 24:4-28은 세상의 끝 이전에 일어날 사건들을 묘사하고, 4-14절은 시대의 마지막이 오기 전에 일어날 사건들을 다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자를 택합니다.
이것은 24장 36절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단락(제자들의 질문 후반부에 대한 대답을 형성합니다)과 현저한 대조를 보입니다. 이 후반부에는 구체적인 시간 지표가 나타나지 않으며, 모든 단락의 출발점은 ‘파루시아’의 날과 시간은 알 수 없다는 것과 그것은 “징조”나 사전 예고 없이 오기 때문에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 사건(성전의 멸망)은 명백하고 예측 가능한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앞을 내다보는 혜안이 있는 자라면 그것이 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다른 사건(‘파루시아’)은 시간적 틀과 연계할 수 없으며, 예수님조차 언제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징조”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서두의 질문에서 29-31절의 대답까지 순차적으로 이어지는 명백한 흐름이 있으며, 그 후에는 전체 예언의 핵심 사항에 대한 요약이 제시된다고 봅니다. 이 요약은 본문의 시간 지표에 함축된 명백한 사실, 즉 이곳의 사건들은 상호 간의 역사적 간격이 길지 않으며, 또한 이 세대 안에 절정에 달할 일관성 있는 역사적 발전의 한 부분을 형성한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29-31절의 결정적 사건들은, 상이한 해석에서의 정점인데, 이를 “인자의 오심(파루시아)”으로 보기보다는, 15-28절에 제시된 포위 기사 “후에 즉시” 이어진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해석합니다. 그렇다면, 35절까지 다음과 같은 시간의 지표를 가진 연대기적 흐름으로 볼 수 있습니다.
4-8절, 예비적 사건들, 그러나 끝에 대한 징조는 아니다.(6절, 아직 끝나지 않았다… 8절, 재난의 시작일 뿐이다.), 9-14절, 이 기간 중 환난과 박해가 있을 것이다(그러나 끝까지 견디라. 14절, 그제야 끝이 오리라.) 15-28절, “끝”의 시작에 대한 묘사(예루살렘에 대한 포위, 15절, 그러므로 너희가……보거든, 16절, 그때에……, 19절, ……그날에는, 21절, 그때에……, 22절, ……그날들을, 그날들을, 23절, 그때에…… , [27-28절 “그날들”을 ‘파루시아’와 혼돈해서는 안 된다.]) 29-31절, 15절에서 시작하는 흐름의 절정(29절, “그날들”(19, 22절)의 재앙 후에 즉시, 30절, 그때에…, 그때에……). 32-35절, “어느 때에”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요약, 32-33절, 너희가 보거든(15절,…“가까이 이른 줄”[시간적 연결에 관한 비유], 34절, 이 모든 일(3절)은 이 세대 안에 일어날 것이다, 35절, 나의 예언은 믿어도 좋다.)
이 단순한 연대기적 구조가 쉽게 공감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29-31절의 언어가 성전의 멸망이 아니라 ‘파루시아’와 관련된 사건에 대한 언급이라는 분명한 가정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어느 때에”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과 함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의미를 오해함으로써 때 이른 종말론적 흥분에 빠지지 말라는 일련의 경고가 섞여 있습니다. 따라서 본 강화의 이 부분은 제자들의 시기에 관한 질문에 대답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한 시대에 당황하는 제자들에게 목회적 지침도 제시한다고 봅니다.
4-8절, 본 단락에 호소하여 종말론적 사건의 전형을 찾으려고 합니디만, 사실상 본문의 내용은 이러한 추론을 단념시키기 위한 것으로, 이곳에 언급된 사건은 종말론적 시나리오의 한 부분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일어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는 일상적 사건임을 보여 줍니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세대는 정치적, 자연적 재앙을 겪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경험이 다른 세대보다 더 심각하며, 궁극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시대로 생각하기 쉽지만, “아직은 끝이 아닙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기껏해야 “재난의 시작”에 불과하며, 해산의 고통에서 해산까지의 기간처럼, 짧을 수도 길 수도 있습니다.
4-5절, 첫 번째 “거짓 경고”는 자칭 그리스도의 출현입니다. 3절의 “주의 임하심”’의한 징조에 대한 질문이 있었기에, “예수라는 이름”으로 온 자들이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것이 마지막 때에 다시 오실 예수를 사칭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라”는 진술은 그러한 주장에 적절한 표현 방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진술은 ‘해방자’가 되려는 자가 유대 민족에게 처음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용어로서, 그가 “예수라는 이름으로” 온 것은 예수를 흉내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에게 속한 역할과 호칭을 주장하기 위해서입니다.
유대 혁명 및 성전이 멸망하기 전 불안한 시대에 이러한 주장을 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한 사마리아인”, “드다”, “갈릴리 유다의 아들들”, “애굽인”, 여러 명의 알려지지 않은 “사칭자” 등이 있습니다. 요세푸스는 이들 중 실제로 자신을 “메시아”라고 주장한 자는 없으며(2세기 초의 바코크바[Bar Kochba]는 확실히 이 호칭을 사용하였습니다만), 대부분 “선지자” 또는 “왕”으로 주장하며, 자신이 신적 권위와 보내심을 받아 온 것처럼 말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메시아 대망 사상을 이용한 사례들로 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체포당하기 전에 이 말씀을 했다면 그들은 이러한 ‘미래의’ 유대 사칭자들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주제는 유대 혁명 및 예루살렘에 대한 포위를 배경으로 한 23-28절에서 다시 다루어집니다.
이러한 사칭자들이 “많은 사람을 미혹”하는 능력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5장 36절,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와 사도행전 21장 38절, “네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유다의 반란(22:15-22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세금 문제로)에서 비롯된 “열심당”의 이데올로기가 결국 AD 66년의 혁명으로 이어진 사실을 감안하면 이러한 “메시아적” 인물의 인기는 놀라운 것이 아닙니다.
6절,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난리”는 전쟁을 말합니다. 이는 유대적 상황에서 메시아 사칭자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AD 30년에서 60년까지는 로마 제국 전체가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였으나, AD 36년 이후 동쪽에서는 파르티아와 전쟁이 있었으며, AD 36-37년에는 타바테아의 아레타스(Aretas) 왕과 안티파스 사이에 국지전이 있었습니다. 유대에서는 4-5절 주석에서 언급한 반란의 분위기가 점차 확산되어 결국 AD 66년의 혁명으로 이어졌으며, 드다와 애굽인 같은 민족 지도자들에 대한 진압을 위해 대규모 군사 작전이 전개되었습니다. 팔레스타인 거주자들에게는 불안한 시대였습니다.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그러나 역사는 이러한 환난의 시대로 기득하며, 제자들은 균형감을 잃거나 “끝”이 이르렀다는 두려움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직 끝은 아니니라”, 우선 본문에는 “끝”이 “세상 끝”과 다른 “끝”입니다. 3절에서는 ‘synteleia’ 곧 영어로는 ‘end’와 가깝고, 여기서는 ‘telos’로서, “목적”의 뜻이 강하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끝”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지만, 14절에서는 동일한 용어가 예루살렘 포위에 관한 묘사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이 단어는 여기서도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야 하며, “아직 끝은 아니니라”은 14절 “.....그제야 끝이 오리라”라는 진술을 염두에 둔 의도적 진술로 보입니다.
이곳에 제시된 예수의 대답은 성전이 언제 무너질 것이냐는 질문에 대한 것으로, “끝”은 “세상 끝”이 아니라 곧 성전 파괴 시기에 대한 언급으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46) 이 “끝”은 곧 올 것이며, 34절은 그것이 얼마나 빨리 올 것인지에 대한 언급이지만, 전쟁이 코앞에 닥쳤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7-8절, 6절의 “난리와 난리 소문”에 대해 본문은 이사야 19장 2절(“… 그들이 각기 형제를 치며 각기 이웃을 칠 것이요 성읍이 성읍을 치며 나라가 나라를 칠 것이며”)을 상기시키는 용어를 사용하여, 정치적 대립에 초점을 맞추어, 이러한 사건들이 역사에 반복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시대마다 반복되는 현상이지만) 이러한 인간적 소란에 덧붙여 이 기간 중,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자연 재난이 발생합니다. 당시 1세기의 역사는 AD 61년의 소아시아, AD 62년의 이탈리아, AD 67년의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지진과 앞서 일어났던 팔레스타인의 지진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1장 28절과 요세푸스가 기록한 유대사에도, 46년 무렵 있었던 광범위한 기근에 대해 언급합니다. 당연히 역사적 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은 국지적 사건도 추측할 수 있습니다(27:51 및 행 16:26에 언급된 지진).
이러한 자연적 사건들은 전쟁과 마찬가지로 끝에 대한 징조가 아니라 일상적 삶의 한 부분입니다.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이러한 일들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재앙의 한 부분으로 “재난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보다 심각한 상황이 찾아올 것이며, 한동안 지속될 것입니다. 사실 “재난”은 “해산의 고통”의 의역입니다. 고통 자체는 “아직” 이르지 않았으며(고통은 해산에 앞서며, 종종 오랜 시간 지속된다) “시작”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6절의 메시지(“아직 끝은 아니니라”)를 반영한 것이 분명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해산의 고통은 종말론적 의미보다 역사 안에서 국가와 성읍의 고통에 대한 은유로 사용되지만(사 13:8; 렘 6:24; 22:23; 미 4:9-10) 이사야 26장 17-18절에는 종말론적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이 이미지의 의미는 문맥에 따라 달라지지만, 이곳 본문에서는 15-22절에서 구체적으로 묘사될 예루살렘의 고통을 가리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