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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전적으로 성경 읽기
마태복음부터 처음 읽기/마 24:1-51

마 24:36-44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by pooh_in_the_Way 2022.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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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24: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마24: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마24: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마24: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마24: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마24:41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마24: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마24:43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마24:44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이제 예수께서는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라는 제자들의 두 번째 질문에 답하십니다. 이 질문은 25 31-46절의 최후 심판에 대한 장엄한 묘사에서 절정을 이루는 본 강화의 나머지 부분 전체에 지표가 됩니다. 짤막한 구절로 이루어진 24 36-44절은 예고도 없고 예기치도 않은 ‘파루시아’의 도래를 묘사하며, 이러한 계획적인 단락은 일련의 세 가지 비유(24:45-51; 25:1-13; 25:14-30)로 강조됩니다.

 

제자들의 질문의 첫 번째 부분은 1-35절에서 구체적인 대답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넓은 의미에서 이 사건이 “어느 때”에 일어날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대가 끝나기 전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부분에서는 이러한 대답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부분에 언급된 사건들은 예언할 수 있는 역사의 한 부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파루시아’와 세상 끝에 대한 “징조”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편리한 해법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경고성 “징조”를 통해 막차를 갈아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준비하는 삶입니다.

  

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그 날과 그 때”는 본 강화에서 “날” 또는 “때”가 단수로 언급된 첫 번 째 사례로 19, 22, 29절에서 로마 전쟁 기간에 사용된 것과 명백한 대조를 보입니다. 단수 “날”은 24 42절에, “때”는 24 44절에 언급되며, 24 50절 및 25 13절에서는 “날”과 “때”가 함께 제시됩니다. 이들 본문에서 두 단어는 단수로 제시됩니다.

 

이러한 용어상의 변화는 주제가 바뀌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 날”의 지시사는 독자에게 제자들의 두 번째 질문 주제인 ‘파루시아’의 “날”을 상기시킵니다. 심판의 날에 사용된 “그 날”이라는 숙어에 대해서는 아래 36절 주석을 참고하라.

 

한 가지 더, 4-35절은 시기에 대한 예고(34)와 징조(특히 15)가 주어진 사건에 대해 언급하지만, 이제부터 예수는 알려지지도 않았고 알 수도 없는(따라서 사전 경고 없이 찾아오는) 사건에 대해 언급합니다. 잠시 전 “이 일”이 곧 일어날 것이라고 말한 예수가 “그날과 그 때”는 자신도 모른다고 말한 것은 주제가 바뀌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 날”은 다시 제자들의 질문(3)의 두 번째 부분 주제인 ‘파루시아’의 시기에 관한 내용으로 돌아가며, 특히 구약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여호와의 “날”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적절한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복음서는 이미 10 15, 11 22, 24, 12 36절에서 “심판 날”에 대해 언급한 바 있으며, 7 22절의 “날” 역시 구체적인 설명은 없지만, 동일한 “날”에 대한 언급입니다. 7 22절에서 “그 날에” 재판장으로 나타나실 이는 (구약 성경처럼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이며, 이 주제는 본 강화의 나머지 부분에서 계속해서 발전되며, 인자가 “임금”으로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아 모든 민족을 심판한다는 25 31-34절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이러한 인자의 역할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 “날”에 중심적 역할을 하실 “아들”조차 그 시기를 모른다는 놀라운 역설만 제시됩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중요한 사건을 천사들에게조차 알리지 않으신 것도 놀랍지만(천사들도 하나님의 비밀을 살펴보고 싶어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벧전 1:12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아들”의 경우 11 27절에서 보았듯이 아버지와 지극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28 19절에는 제자들이 충성을 맹세한 삼위 하나님 가운데 한 분으로 묘사됨에도, 아들은 모른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절의 핵심은 아들이 지상에 계시는 동안 때를 모르기 때문에, 성부 외에는 어느 누구도, 천사들이라고 할지라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는 돌로 빵을 만들 있는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신 것처럼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에 교회가 종말에 대한 무분별한 지식을 가르치거나 배우지 않도록 의도하십니다. 재림의 시기에 대해 예수께서 스스로 제한하신 겸손은 교회로 하여금 시기에 대한 사람들의 오만과 거짓에 미혹되지 않도록 합니다.

 

37-39, ‘파루시아’의 때를 모른다면 사람들이 모를 때에 임할 것입니다. 앞서 27절에 제시된 ‘파루시아’에 대한 언급은 번개 이미지로 ‘파루시아’의 확실성과 돌연성에 대해 묘사했습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인류가 알지 못하는 한 쪽 구석(26절의 광야나 골방)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영향을 받는 우주적 사건이 될 것입니다. 창세기 7 6-24절에 묘사된 갑작스러운 세계적 홍수는 모든 면에서 강력한 유추를 제공할 것입니다. 즉 아무도 모르는 시간에 갑자기 임할 것이며, 오직 준비된 자만 피할 수 있습니다. 25 1-30절의 비유는 특히 이 부분에 대해 다룹니다. 38절의 일상적 삶에 대한 묘사는 사전 경고가 없을 것을 강조합니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모든 상황은 예전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평범한 일상이 곧 잠재적인 위기의 순간인 것입니다.

 

40-41, 평범한 일상은 계속됩니다. 밭에서 일하거나 곡식을 가는 것보다 더 평범한 일상이 있는가? 그러나 이처럼 평범한 시기에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남는 갑작스러운 위기가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불행한 자(또는 행운아)는 어디로, 무슨 목적으로 데려간 것인가? 이 구절에 사용된 동사 “데려가다”, 이 수동태 동사를 “신적 수동태”로 이해한다면, 이 구절은 택자는 하나님이 데려가시고 남은 자들은 이 땅의 삶을 지속한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이 심판 전에 있을 신자의 “휴거”에 대한 언급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휴거19세기에 가서야 나온 신학적 이론입니다. 우리는 이들이 어디로, 왜 “데려감”을 당하는지에 대해 듣지 못하며, 17-18절에 언급된 로마의 갑작스러운 침공은 구원보다 위협적 상황을 전제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데려감”을 당한다는 것은 부정적 의미로 보아야 하며, 마태는 27 27절에서 이와 유사한 위협적 상황에 사용합니다. 따라서 이 동사만으로는 “데려간”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구원을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심판을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6:11에서처럼). 앞서 홍수가 준비되지 않은 자들을 “멸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곳에서도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을 수 있습니다.

 

유사한 환경의 두 사람(가령 노아와 동시대인)이 다른 운명을 맞게 된다는 것은 “준비”라는 이슈를 제기합니다. “데려감”을 당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결정하는 요소는 무엇인가? 노아의 예는 이러한 구분이 독단적인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본 강화의 나머지 부분은 구원받은 자와 버림받은 자를 분리한 근거에 대해 다루며, 이러한 구별은 25 31-46절의 심판 장면에 나오는 의인과 악인의 운명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지금은 구원받을 자와 버림받을 자가 함께 일하지만(13:30의 가라지 비유에서 보듯이) “그날”이 오면 이러한 구분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깨어 있으라”는 촉구는 마태복음에서는 (25:13의 부적당한 삽입을 제외하면) 이곳이 유일합니다. 미리 준비하여 지속적으로 선한 삶을 살라는 메시지와 함께, 이어지는 비유는 마태가 마가나 바울(살전 5:17 참고)보다 “준비”에 대해 덜 강조적임을 보여 주며, 25 5절에서 졸음을 인정한 것은 접근하는 관점도 다소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러나 항상 준비하라는 촉구는 다음 절의 비유에서 보여 주듯이 자지 않고 깨어 있는 것으로 상징됩니다.

 

그들이 대비해야 할 사건은 “너희 주가 임하시는” 날입니다. 이 구절은 이어지는 비유(46, 50)를 예시합니다. 이 비유에서 “주”(‘퀴리오스`)는 종들에게 돌아오는 주인입니다. 25:19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 독자에게는 “주”는 당연히 예수님이며, “날”은 ‘파루시아’라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인자의 ‘파루시아’의 날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곳에서도 30절의 오는이라는 일반 동사가 사용되지만, 30절에서 다니엘 7 13-14절의 등극 장면을 암시했던 “인자”나 “하늘에서……구름을 타고”라는 표현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44절에서는 동일한 동사가 인자와 함께 주어로 사용되며, 우리는 ‘에르코마이’의 이러한 용례를 통해 ‘파루시아’가 이 등극 환상의 최종적 성취로 이어질 수 있다는 암시를 얻습니다. 이것은 19 28절과 25 31-34절에 나오는 “새롭게 된 세상”과 “최후 심판”에 대해 언급한 다니엘 7 13-14절의 언어와 일치하며, 로마 전쟁과 관련된 사건에 나타난 인자의 하늘 영광은 결국 세상 끝의 ‘파루시아’에서 절정에 달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곳의 ‘에르코마이’처럼 평범한 단어에 대한 지나친 확대 해석일 수 있으며, 특히 이어지는 비유는 구약 성경 암시에 대한 요구 없이 자연스러운 의미를 제공합니다.

 

43, 도둑이 오는 것을 예기치 않은 ‘파루시아’의 모델로 사용한 예수의 은유는 초기 교회에 강력한 인상을 심어 주었습니다. 이 곳에서는 집주인과 도둑에 대한 짧은 비유 형식을 취합니다. 놀라운 것은 도둑의 특성입니다. 그는 상대가 방심한 틈을 탑니다. ‘파루시아’의 특성이 그런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비유의 집 주인처럼 “그날과 그 때”를 모릅니다. 이러한 도둑의 이미지는 42절의 “깨어 있으라”처럼 지속적인 경계를 촉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도둑이 오는 시간을 아무리 추측한다고 해도 기습을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비유는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에 대해 다른 관점을 제시합니다.

 

44,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이제 36-43절의 메시지는 항상 ‘파루시아’를 준비하라는 분명한 촉구로 요약됩니다. 이 구절에서 “도둑”은 ‘파루시아’의 시기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예시할 뿐 아니라 구체적으로는 “생각하지 않은 때”가 될 것임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43절의 교훈은 제자들에게 직접 적용되지만(집 주인처럼 “너희도”) 42절처럼 “깨어 있으라”가 아니라 “준비하고 있으라”라고 촉구합니다. 이어지는 비유들은 ‘파루시아’ 및 심판에 대한 “준비”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보여 줍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은 홍수의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었겠지만(또한 잠도 자지 않고 그날만 기다린 것도 아니었겠지만) 홍수가 왔을 때 준비가 되었으며, 다른 사람들은 갑자기 닥친 재앙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파루시아’의 시기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그것이 올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으며, 따라서 다른 사람들과 달리 위기에서 벗어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제 예수는 그 방법에 대해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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