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24:45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마24:46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마24:4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마24:48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마24:49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마24:50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마24:51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본 비유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45-47절은 신실하고 지혜로운 종이 주인이 맡긴 임무를 성실히 수행해서 주인이 돌아올 때 보상을 얻는다는 내용입니다. 48-51절은 주인이 맡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악한 종이 주인이 돌아올 때 형벌을 받는다는 내용입니다. 이 비유는 마지막 때를 준비하고 있으라는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 알레고리적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모든 소유를 맡겼던 주인이 돌아오는 모습은 예수께서 인자로 오시는 재림(파루시아)의 장면에 대한 암시입니다. 종들이 예상하지 못한 때에 주인이 도착한 것은 인자가 오는 특징과 비슷합니다.
45절,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와서 베푸는 보상을 받게(46~47절) 될 종은 주인이 올 때 변함없이 행하고 있기 때문에 “신실하며” 적합한 때에 양식을 제공하기 때문에 “현명합니다”. 청지기로서 가져야 할 현명함(25:1-13)과 신실함(25:14-30)은 이어지는 두 비유가 묘사하는 주제입니다. 주인이 없는 동안 이 종은 동료 종과 주인의 재산을 맡아 자율적으로 관리했습니다.
46-47절, 이 두 절은 길이는 짧지만, 함께 5장 3-10절과 동일한 지복을 형성합니다. 46절은 바른 선택을 한 자를 칭찬하고 47절은 그에 대한 대가를 제시함으로써 칭찬을 정당화합니다. 그에게는 주인이 없는 동안 행사하는 일시적인 권한 대신 청지기로서 영구적이고 책임 있는 역할이 주어집니다.
이 시리즈의 세 번째 비유처럼 책임 있는 사역에 대한 보상은 더욱 큰 책임이며, 주인의 요구가 완화되는 것이 아닙니다(25:21,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는 이러한 결과에 청중의 관심을 집중시키며, 신실한 제자는 이제 쉬게 되었다는 안도감이 아니라 더욱 무거워진 사명을 기꺼이 환영했을 것이라는 도전적 가정을 제시합니다.
48-49절, “더디 오리라”로 번역된 동사는 25장 5절에서 신랑의 도착이 지연된 상황에 사용됩니다. 25:19에는 동사는 다르지만, 동일한 개념이 오랜 후에 돌아온 주인에게 사용됩니다. 이러한 동사의 반복은 마태가 “파루시아”의 지연이라는 문제를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 주지만, 세 비유에서 공백 기간의 확장에 관한 모티프는 이야기의 흐름에 중요한 요소이며, 따라서 변증적 기능의 가능성은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이러한 공백 기간이 두 번째 종에게는 이기적인 무책임에 빠져 동료를 희생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오직 현재만 생각하며, 주인이 돌아오면 모든 기회가 끝나 버린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50-51절,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50절), 두 종 모두 주인이 돌아올 때를 알지 못하지만, 첫 번째 종은 언제나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시기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파루시아’의 시기가 문제되는 자들은 무책임한 종들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파루시아’를 걱정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날”과 “때”에 대한 반복은 다시 한 번 36절을 상기시키며, 예기치 않은 ‘파루시아’ 메시지를 더욱 강조합니다.
종을 처벌함에 있어서 “엄히 때리고”는 “두 조각내어”라는 원어적 의미를 가집니다. 이 표현은 다른 성경에서는 희생 제물을 조각낼 때만 사용됩니다. 이 표현이 엄한 처벌에 대한 은유로만 사용된 증거는 없으며, 이곳에서는 실제적인 잔인한 처형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보이지만(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습니다. 아마 독자들에게 충격적 반응을 주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본문에서 종의 행동은 외식보다 뻔뻔스러운 태도를 보인다는 점에서 “외식하는 자”라는 표현은 의외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23장에서 반복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곳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자를 가리키는 총체적 용어로 사용된 듯합니다.
종은 위선자들이 받을 벌에 처하게 됩니다. 마태복음에 사용된 위선을 범주화해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속과 다르게 겉모습을 보이는 것(6:2, 5. 16; 7:5; 22:18; 23:25, 27),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착각해서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서 파멸에 이르게 만드는 자기기만(23:13), 가르치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태도(23:23, 29) 등입니다. 51절의 위선은 세 번째에 해당합니다. 23장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행위를 재판하고 율법에 따라 순종할 것을 가르치고 설교했지만 자신들은 실행하지 않았던 것처럼, 주인의 뜻을 알고도 실행하지 않은 악한 종은 유대 지도자들의 심판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위선자들이 던져지는 곳은 바깥 어두운 곳, 지옥(게헨나)이며, 종은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실패한 유대 지도자들처럼 신실하지 못한 제자들에 대해 이와 동일한 용어를 사용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인 독자는 제자 공동체에 속한 것 자체가 궁극적 구원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경고를 받습니다. 악인의 운명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는 구절에 대해서는 이미 8장 12절에서 보았습니다. 이 비유의 이미지는 22장 13절과 마찬가지로 외견상 공동체 내의 사람인 것처럼 보이지만, 주인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자들의 운명을 가리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