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통전적으로 성경 읽기
마태복음부터 처음 읽기/마 24:1-51

마 24:1-3 성전의 멸망에 대한 예고와 제자들의 질문

by pooh_in_the_Way 2022. 4. 13.
728x90

마24: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마24: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마24:3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24:1-25:46은 마태복음의 다섯 번째이면서 마지막 강화로 미래 또는 종말의 사건을 다룹니다. 26:1은 강화가 끝날 때 사용된 전형적인 표현에 “모든”을 붙여 다섯 개의 강화가 모두 끝났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24:1-2절은 강화를 시작하는 3절의 질문의 토대를 형성합니다. 동시에 이 부분은 성전의 예수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 21 23절부터 23 39절 전체의 절정에 해당하는 중요한 의미가 담긴 본문이기도 합니다. 21 12-16절에서 논란을 일으키면서 극적으로 성전에 들어간 예수는 동일하게 미래에 대한 단호하고 광범위한 진술과 함께 성전을 떠납니다. 예수는 성전을 버렸습니다. 그는 다시 돌아 오지 않을 것이며, 이제 남은 것은 파괴뿐입니다

 

예수가 성전에서 나온 사실과 성전의 멸망에 관한 진술은 둘 다 21-22장의 대결 전체, 특히 “이 세대”에 대한 심판에서 절정을 이루는 23장의 책망의 정점을 형성합니다. 나중에는 당국이 예수를 거부하겠지만, 이 곳에서는 이방인의 뜰에서의 “대결”에서 확실한 승자가 되신 예수가 모든 주도권을 쥐고 그들과 갈라섭니다.

 

이 짧은 본문은 예수가 가르친 두 장소와 관련됩니다. 하나는 21-23장의 성전이고, 또 하나는 이어지는 강화의 배경이 될 감람산(구약 성경에서 주는 이미지는, 심판과 메시아의 승리)입니다. 이제 이어지는 성전의 멸망에 관한 예언은, 예수와 공식적인 유대교 사이의 대결의 절정으로 보는 것입니다.

 

1, 성전에 들어가신(21:1) 예수는 성전에서 나오십니다(24:1). 21-23장은 성전 안에서 예수와 관련된 사건과 가르침을 포함했습니다. 예수는 성전에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고 그곳을 나오셨습니다. 예수와 제자들은 감람산(24:3)으로 가기 위해 동쪽 문을 지나 기드론 계곡으로 내려가는 비탈진 길을 택했을 것입니다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마가복음에 따르면) 제자들은 성전의 건물들을 보고 감탄합니다. 유대인 역사가인 요세푸스와 유대 랍비들에 따르면 헤롯의 성전과 부속된 구조물(당시에는 공사 중이었을 것입니다)은 크기나 장엄함에 있어서 갈릴리 방문객에게 놀라움을 주기에 충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들은 자신들이 느끼는 흥분에 예수도 동참하시길 원했을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은 이미 수일 동안 그것에 대해 감탄할 기회가 있었지만, 이 최근의 접근을 예수께서 23 38절에서 한 말씀에 대한 반응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는 정말로 이처럼 화려한 건물이 버림을 당할 것이라는 뜻으로 말씀하셨는가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건물 구조에 대한 그들의 외면적 감탄은 예수의 부정적 선언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강력한 장식이 됩니다.

 

마태가 사용한 “나오다”와 “가다”라는 두 동사는 이러한 성전의 떠남의 의미를 강조합니다. “집”은 버려진 바 되었으며(23:38) 그곳의 백성은 마음을 바꾸지 않는 한 예수를 다시 보지 못할 것입니다(23:39). 예수께서 기도하는 집이 되기를 원했던 곳은(21:13) 상징적인 멸망을 당한 무화과나무처럼(21:18-20) 열매를 맺지 못했음이 드러났습니다. 본문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시는 장면에 대한 에스겔의 이상(10:18-19,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서..”; 11:22-23, “여호와의 영광이 성읍 가운데에서부터 올라가 성읍 동쪽 산에 머무르고 …”)과의 직접적인 축어적 연결이 거의 나타나지 않지만, 독자는 특히 예수가 감람산으로 가셔서 앉았을 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동쪽 문으로 넘어가기 전에 “성읍 동쪽 산”에 머문 장면( 11:23)을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범죄가 한계에 달했을 하나님의 임재가 이스라엘 또는 성소를 떠나셨다 사실은 유대 전승 중의 하나입니다.

 

2절,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예수는 제자들에게 모든 보지 못하는지 질문하십니다. “ 하나도 위에 남지 않고”, (누가복음 19 44절은 성전보다 예루살렘 전체를 가리키지만성전이 무너질 것을 예고하십니다. 예수 일행이 보고 있는 성전은 건물이 거의 올라가서 이상 올릴 돌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을 것입니다. 위에 하나가 남지 않을 것이라는 표현은 그만큼 철저히 성전이 파괴될 것을 암시합니다.

 

예수는 이러한 예언을 통해 선지자 전승에 동참합니다. 열왕기상 9 6-9절에는 성전의 멸망 가능성에 대한 언급이 제시되며, 미가( 3:12)와 예레미야( 7:11-14; 26:1-19)와 우리야( 26:20-23)는 솔로몬 성전이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으며, 이 일은 BC 586년에 (바벨론에 의하여) 실제로 발생합니다.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 헤롯의 성전에 대한 그의 예언은 스데반( 6:13-14)은 물론, 한 세대 후 그와 무관한 선지자적 인물 하나냐(Jesus ben Hananiah)에 의해 반복되며, 이 예언 역시 사실로 증명됩니다. AD 70년에 일어난 로마의 헤롯 성전 파괴는 건물 자체의 잔해는 없이 기초 공사의 일부 파편만 남을 정도로 철저했습니다. 이 구절은 마태가 기록한 성전의 운명에 대한 가장 분명한 예언입니다.

 

성전의 외형적 멸망에 대한 예수의 예언은 그에 대한 재판과 죽음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것은 나중에 예수에 대한 공격(26:61)과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 대한 조롱(27:40)에 사용되며, 예수와 기독교를 공격할 때 사용하는 중요한 혐의 내용으로 남습니다( 6:13-14).

 

3절, 예수께서 감람 위에 앉았을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말했습니다. “저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언제 일들이 있을 것이며 당신의 임하심 세상 끝의 징조는 무엇입니까?”

 

제자들의 질문은 성전의 멸망에 관한 예언과 예수의 “임하심과 세상 끝”이라는 두 가지 미래적 요소를 결합합니다. 전자에 대해서는 “어느 때”인지를, 후자에 대해서 “무슨 징조”가 있을지를 질문합니다. 전자의 질문은 이 강화 전반부의 초점이 되며, 후자는 후반부의 초점이 됩니다.

 

여기까지는 대부분의 해석가들이 공감합니다. 그러나 성전의 멸망에 대한 주제가 보다 궁극적인 미래에 대한 주제로 바뀌는 부분 및 전자의 주제를 다루는 동안 후자의 주제는 어느 정도 나타나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24 4-35절이 성전의 멸망과 관련되며, “어느 때”라는 질문의 대답은 34절에 제시된 명확한 시간표에 따른다고 해석합니다. ‘파루시아’에 대한 두 번째 질문은 새로운 단락을 시작하는 24 36(“그러나”)과 함께 본문의 틀 속에 들어오며, 성전의 멸망 떄와는 달리 “그날과 그 때”에 대해 아무도 알 수 없고 (지금 막 성전이 멸망할 구체적인 시기에 대해 예언한) 예수 자신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 두 번째 이슈는 제자들의 질문이 요구하는 구체적인 시간표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르게 임하는 불특정 시간을 위해 “준비”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제시됩니다. 이 강화의 전반부에 제시된 예수의 ‘파루시아’에 대한 유일한 언급(24:27)은 그 일이 일어날 때 우주적으로 명백한 사건이 될 것이며, 따라서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까지의 혼란스러운 시대와는 전혀 다를 것이라는 진술입니다.

 

이러한 해석이 본문에 전통적인 해석과 상충되는 부분은 전통적으로 세상 끝과 ‘파루시아’(본문에는 ‘파루시아’라는 단어가 나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24 30절의 “인자가 와서를 ‘파루시아’라고 봅니다)와 관련된 것으로 해석해 온 24 29-31절입니다. 본 단락에서 다시 설명합니다. 

 

감람산은 에스겔 11 23절의 관점에서 상징적으로 중요할 뿐 아니라, 멸망이 선포된 성전에 대한 전경이 됩니다.

 

“이런 일”은 앞서 예언한 성전의 멸망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뒤의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이라는 표현은 두 부분을 구분하기보다 평행이 되게 합니다.  마태는 이어지는 강화가 성전의 멸망에 관한 내용만 다루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주의 임하심”(파루시아), 헬라 세계에서 파루시아 고위 관리나 신이 방문하는 것을 묘사할 사용된 용어입니다. 신약의 서신서에서는 예수의 재림을 위해 사용합니다. 용어는 복음서 중에서 마태복음에만 나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이 기록될 당시 그리스도인은 이미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마태복음보다 거의 20년 전에 쓰여진 바울의 데살로니가전후서에는 이 단어가 여러 차례 사용되었습니다.주의 임하심 같은 의미로 사용된 인자의 오심 마태복음에 차례 등장합니다(27, 37, 39). 마태복음에만 나오는세상 직역하면시대의 완성이나시대의 말합니다. ‘시대의 인자가 다시 와서 악인들을 심판하고 의인들에게 상을 때입니다(13:40).

 

마태는 이 과정에서 ‘파루시아’라는 용어를 사용하되, 27절에서 예루살렘 포위 사건들과 미래적 ‘파루시아’를 분명하게 구별하되, 실제적인 ‘파루시아’는 포위 기간 중 외진 곳에서 자신의 주장을 믿게 하기 위해 표적을 행하는 소위 메시아들과 달리 인자의 ‘파루시아’는 하늘 전체를 가로지르는 번개처럼 누구나 관측할 수 있는 사건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예고를 한 후, 후반부인 37, 39절에서 이 강화의 두 번째 부분의 주제가 될 결정적 사건을 설명하면서 사용합니다. 마태가 지금까지 진술한 내용에서는 예수가 자신이 미래에 돌아오는 것에 대해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이 문제를 왜 이런 식으로, “이런 일, 그리고 주의 임하심세상 끝을 묶어, “어느 때”와 “무슨 징조”라는 두 가지 의문사를 통해 제기했는지, 또는 그들이 이러한 별도의 질문을 성전에 관한 질문과 연계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성전의 멸망처럼 가공할 만한 사건은 현존하는 세상 질서의 끝에 일어나야 한다는 당위성 때문일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제자들의 관점에서 주의 임하심”과 “시대의 끝”은 동일 사건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는 것은 예수의 오심과 시대의 끝을 포함하며, 이는 종말의 시작을 의미했습니다. 이는 헬라어 문법으로 설명되는데, 이것은 마치 영어에서 하나의 관사가 두 개 이상의 명사를 ‘and’로 연결하여 사용하는 것과 같이(두 번째 혹은 두 번째 이하의 명사는 첫 번째 명사와 관련이 있거나 첫 번째 명사를 설명합니다), 주의 임하심과 시대의 끝을 한정하고 있는 점에서 제자들이 두 사건을 분리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심판의 때를 준비하기 위해서 시기와 표적에 대해 물었을 것이라고 봅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대답은 이러한 그들의 가정에 대해 어떠한 이념적 연결이든 두 사건은 연대기적으로 연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