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통전적으로 성경 읽기
마태복음부터 처음 읽기/마 19:1-30

마 19:16-22 재물이 많은 청년

by pooh_in_the_Way 2022. 4. 10.
728x90

마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19:17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마19:18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마19: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마19: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마19: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마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앞 단락에서는 사회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위치에 있는 아이들이 등장했다면, 여기서는 사회적으로 가장 탁월한 위치에 있는 청년이 등장합니다. 16절은 어떤 사람이 예수께 왔다고 합니다. 그는 20절에서 “청년”으로 소개되며, 부자로 밝혀집니다(22).

 

그는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를 향해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호칭으로, 예수를 선생님으로 부릅니다. 단순히 존중하는 표현으로 사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청년의 질문은 학문적 신학에 관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무슨 선한 것”을 행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본문의 “영생영원한 생명”은 마태복음에서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이전 본문에서 생명은 영원한 생명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 적은 있습니다(7:14; 18:8, 9).

 

예수는 부자 청년이 돌아가고 나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운사실을 말씀하셨고(23~24), 제자들은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물은 것(25)을 볼 때, 영생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 같으며,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에 들어가는것은 순례의 여정을 강조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질문자는 자신이 “선한 일”을 행함으로써 구원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신명기에서 내내 강조하는 바,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모든 명령을 행할 것이라와 레위기 18:5에서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는 말씀으로 미루어 경건한 유대인들에게는 늘 선한 일을 행하고자 하는 것이 삶의 목표로서 분명했을 것입니다.

 

17, 그는 “선한 것에 대해” 물었으나 예수는 왜 그것을 자신에게 묻느냐고 되물으십니다. 예수는 자신이 선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선한 것”에 대한 청년의 이해를 지적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선한 것을 묻고 선한 것에 대한 답을 얻는다고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다. 선하신 하나님만이 영생을 주실 수 있다.’ 청년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물었고, 예수는 먼저 그에게 “선하다”는 표현이 인간에게 적용되면 상대적이 되며 절대적 의미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적용할 수 있다고 대답한 셈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선한 분은 한 분이시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선한 이는 한 분”은 신명기 6:4의 쉐마를 암시합니다. 유대인들이 매일 암송했던 신명기 6:4은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라고 합니다. 신명기 6:6은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은 5장에 나오는 십계명을 핵심적으로 가리킵니다. 쉐마를 지키는 여부에 따라 복과 저주가 결정됩니다( 11:13~21).

 

이어 예수께서는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계명을 성취하러 왔기에, 계명의 일부를 무시하거나 제거하거나 새로 첨가하지 않으십니다. 이미 예수는 산상설교에서 5:20 20~48절의 여섯 가지 예를 통해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의로는 천국에 들어 갈 수 없음을 알리셨습니다. 예수의 대답은 계명을 지켜서, 곧 인간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경솔한 표현에 대한 질책이자 인간이 “선한 일”에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부족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진술이지, 그의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은 아닙니다.

 

18~19, 계명들을 지키라는 말을 들은 부자 청년은 어떤 것들인지 묻습니다. 랍비의 계산에 따르면 오경에는 613개의 계명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출애굽기 20 2-17절과 신명기 5 6-21 절에 제시된 십계명은 유대인의 영성에서 탁월한 지위를 차지한 것은 분명하지만, 당시 “계명”에 대한 대중적 용례는 오늘날 특정한 계명에 배타적인 지위를 부여한 것이 아니기에, 청년의 질문은 마땅히, 이 특별한 선생은 율법의 수많은 계명 중 어느 것에 우선권을 주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편 합리적이고 적절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십계명을 첫 번째 대답의 기초로 제시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산상수훈에서 이미 십계명 가운데 6계명과 7계명과 5계명을 각각 인용함으로 이 세 가지 계명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제 예수는 이 세 가지 계명을 8계명 및 9계명과 함께 언급합니다. 6계명부터 9계명까지는 모두 부정적 진술의 형태를 가지며, 전통적인 히브리어 성경(70인역이 아니다) 순서를 따라 제시되며 이어 긍정적 진술에 해당하는 5계명이 제시됩니다. 여기까지는 어떤 랍비 선생도 놀라지 않을 대답입니다. 십계명 가운데 이 다섯 가지 계명을 택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태도에 관한 처음 네 가지 계명과 탐심을 금하는 열 번째 계명 등 “내적인” 초점을 가진 다섯 가지 계명과 달리 타인에 대해 지켜야 할 행위와 관련되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 다섯 가지 계명은 자신의 행위를 점검할 수 있는 “객관적” 목록이 되며 이 청년 역시 20절에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부터 네 번째 계명과 열 번째 계명이 빠진 것처럼 보이지만, 대신 예수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추가하십니다( 19:18). 이웃 사랑은 5:43~48에서 설명된 것이며 22:39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 해당하고, 이것 역시 사람에 대한 태도와 관련된 율법의 본질적인 요구에 대한 요약으로 다시 제시됩니다. 문자적으로 받아 들일 경우, 이 구약 성경의 조문들은 모두 전통적 유대인의 선한 일에 해당합니다.

 

20, 그 청년이 예수께 말합니다. “제가 이 모든 것을 지켰습니다. 아직 무엇이 부족합니까?청년도 그런 의미로 받아들였고, 따라서 자신은 계명을 지켰다고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그는 선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으로 충분한가? 하나님을 섬기고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단순한 전통적 도덕성(비록 구약 성경의 율법에 기초한 것이지만)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는 청년의 생각은 칭찬할 만합니다. 그의 첫 번째 질문은 아직도 부족한 무엇인가를 찾고 있습니다. 그는 그러한 초보적 윤리에 속아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더 강한 영적 대담성이 있었습니다.

21예수는 그의 영적 야심을 알고 대답하십니다. 그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자 했으나 단순히 계명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이러한 목적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온전함”을 원했습니다. 이 단어는 도덕적으로 결점이 없다는 의미의 완전함이나 완전한 성숙을 말하는 정도는 아닙니다. 예수가 그에게 원한 것도 그 정도 이의 온전함이었습니다. 5 48절에 의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예수는 다른 제자들에게도 그것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온전함은 17절에서 유일하게 “선한” 분으로 선언된 하나님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하느냐는 청년의 질문은 그가 오를 수 없는 차원의 선함과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선”은 17절이 상기시켜 주는 대로 언제나 상대적이며 이제 예수는 이러한 상대적 선을 천국이 요구하는 절대적 선으로 바꾼 것입니다.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청년의 온전함에 대한 탐구는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이어져서, 예수는 영적인 훈련이나 신비적 순례 대신 매우 실제적인 행동을 먼저 제시하십니다이것은 형식적 조치가 아니라 지금까지 선한 삶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왔던 모든 것을 완전히 포기하고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그는 다른 모든 경건한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공동체 내의 가난한 자와 약한 자를 위해 정기적으로 관대한 기부도 아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을 그런 식으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자선에는 여러 가지 제한이 있는 반면, 예수는 자신의 요구에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 자신감에 넘친 청년은 6 25-32절에 나오는 공중의 새 및 들의 백합화와 동일한 자리에 서서 모든 양식을 하늘 아버지의 공급하심에 직접 의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소유를 포기하는 이러한 급진적인 행위조차 또 하나의 “선한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팔아”와 “주라”는 명령 뒤에는 “와서”와 “따르라”는 명령이 이어진다는 점에 유의하여야 합니다. 예수의 요구의 핵심은 소유에 대한 포기가 아니라 제자도입니다. 따라서 소유를 포기하는 행위 자체는 바람직한 희생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더 나은 것, 즉 하늘에 있는 보물을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6 24절의 언어를 사용하여 재물의 종에서 해방이 되어 하나님의 종이 되는 보물을 누리게 된다는 언급이 적절할 것입니다. 물질적 소유로부터의 해방 자체가 영생의 비밀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제자로서 새로운 생명의 길로 들어가는 관문일 뿐입니다. 예수는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청년이 찾는 영생은 포기와 관대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하늘의 보물입니다.

 

우리는 앞서 5 20절과 그것에 대해 설명한 5 21-48절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것만으로는 천국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았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나를 따르라”는 명령을 또 하나의 “해야 할” 일이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는 전적으로 새로운 예수와의 관계로 볼 수 있습니다. 질문자가 예수를 따를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보다 큰 의”를 포함한 제자도의 길, “영생”을 향한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22, 그러나 그 청년은 이 말씀을 듣고 나서 슬퍼하며 떠납니다. 왜냐하면 그가 많은 소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청년은 예수를 따르는 영생의 길을 포기합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