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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부터 처음 읽기/마 19:1-30

마 19:1-12 이혼에 대하여 가르치시다

by pooh_in_the_Way 2022.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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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19:1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
마19:2 큰 무리가 따르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시더라
마19:3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마19: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마19:5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마19:6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마19:7 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마19:8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마19: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마19:10 제자들이 이르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
마19:11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마19:12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마태복음 19:1-20:16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에서 일어난 사건과 이를 설명하는 비유를 다룹니다. 예수께서는  천국의 가족과 소유의 주제들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십니다. 마태복음에만 수록된 “선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20:1~16)가 부자 청년이 예수를 따르지 못하고 떠나는 사건 이후에 배치된 점과 비유 해석의 열쇠인 19:30 20:16의 연결점을 고려할 때, 우리는 19:1~20:16을 한 묶음으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네 번째 강화(18)가 끝난 뒤,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가십니다. 예수께서 주 활동 무대였던 갈릴리를 떠나 유대 지경에 이르셨다는 표현은 이야기의 중요한 전환점을 의미합니다.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의 일행은 남쪽으로 향하면서,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지 않고 요단강 서쪽의 유대 지역으로 넘어 가고 있습니다. 예수 일행은 남쪽을 향하면서, 유대를 향하고, 예루살렘을 향하고, 예수께서는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며, 이 과정에서 적대 세력과의 충돌은 심해질 것입니다. 사역의 출발점이었던 갈릴리를 떠난 예수는 부활 이후 이곳을 방문하시기 전까지는 다시 돌아오지 않으십니다(26:32; 28:7, 16).

 

북쪽 갈릴리 사역처럼 남쪽 유대 지역에서도 많은 무리가 예수를 따릅니다. 이들 중에는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따라온 무리와 예루살렘을 향해 순례의 길에 나선 사람들도 포함됐을 것입니다. 19장 이후의 사건들에 무리는 전면에 부각되지는 않지만 사건마다 배후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를 따르는 무리는, 예루살렘에의 여정이 끝나는 20:29,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에도 등장합니다. 갈릴리를 떠나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여정 내내 무리가 함께 하고 있는 셈입니다. 예수는 십자가의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중에서도 자기 백성을 변함없이 긍휼의 마음으로 치유하십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무리를 가르치셨다는 언급은 없이, 치유만 하십니다. 갈릴리에서 가르침과 치유를 동시에 행하신 점과는 대조적입니다. 이는 아마도 유월절의 희생양으로 죽으실 예수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3, 이 여정 도중에, 첫 에피소드로 바리새인과의 논쟁적인 대화가 기록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에게 묻습니다.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남자가 어느 이유라도 그의 아내와 이혼하는 것이 인정됩니까?” 왜 바리새인들은 이혼에 대한 이슈를 제기했을까요? 얼마 전 세례 요한이 헤롯 안티파스의 이혼을 문제 삼은 이유로 투옥되고 처형 당한 사건을 고려할 때, 이 질문은 예사 질문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미 산상설교에서 이혼에 대한 입장을 밝힌 예수를 요한과 같은 운명에 처하도록 질문을 던졌을 것입니다. 이들은 신학적이거나 신앙적인 목적이 아니라 예수를 위험에 빠뜨리려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혼은 신명기 24 1-4절에 의해 이미 용인되었기에, 바리새인들의 질문은 이혼의 사유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이 문제는 당시 바리새인의 두 학파인 샴마이와 힐렐의 논쟁 초점이었습니다. “어떤 이유가 있으면 아내를 버리는 것”은 힐렐의 입장을 요약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이 문제에 대해 “자유”를 원했던(이러한 태도는 10절의 제자들의 반응에서도 나타납니다) 유대인이 대부분 꺼려했던 “샴마이”의 엄격한 방식을 지지했을까? 더구나 최근 세례 요한이 헤롯의 이혼을 지적했다는 이유로 처형을 당한 후에(14:3-12) 이 문제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 되었습니다.

 

4-6, 읽지 못하였느냐”, 예수가 도출한 추론은 바리새인 청중이 결코 편안하게 들을 수 없는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두 본문은 원창조 기사에서 나온 것으로 둘 다 타락하기 전의 인간 상황에 대한 묘사입니다. 첫 번째 본문은 창세기 1 27절에서 나온 것으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서 남자와 여자의 상보성을 확립하지만, 이혼 문제나 사실상 혼인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예수의 주장은 이 본문과 창세기 2 24절을 결합한 내용에 기초합니다. 이러한 결합은 결과적으로 강력한 사상적 연결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은 먼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신 후에 두 사람이 부모와의 관계보다 우선하는 깨어질 수 없는 “한 몸”을 이룰 것을 명하셨습니다. 이러한 결합은 창세기에서 “합하여”라는 생생한 묘사로 제시되는데 영원한 결합에 대한 묘사로 이보다 강력한 은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창세기 본문에서 “한 몸”이라는 이미지는 남자의 갈빗대에서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인 여자를 창조한 데서 나온 것으로 이러한 원래적 연합은 결혼을 통해 다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잘 살피지 못한 내용으로, 창세기 2 24절의 화자가 누가냐의 문제도 있습니다. 창세기 2 24절을 창조주이신 하나님이시냐, 아니면 창세기 저자의 언급이냐 하는 것입니다. 혹자의 해석처럼, 창세기 저자의 언급을 하나님 자신의 진술로서 돌려, 예수께서 이 말씀은 창조주의 말씀이라고 하신다고 하더라도, 사실 1세기 유대교에서는 놀라운 일이 못 됩니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의 내러티브 서술도 하나님의 진술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지으셨다는 말씀을 보충하기 위해 창세기 2 24절의 본문을 인용한 것은, 창세기 저자의 언급일지라도 곧 결혼의 본질에 관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전제만으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앞서 5 31-32절에서 구약 성경과 예수 시대의 이혼과 재혼에 대한 유대인의 태도와 이런 태도에 대한 예수의 특색 있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본문과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부분은 당시에 용인된 교훈과 반대되는 선언이라는 사실보다 예수가 당시 유대인의 생각을 대표하는 바리새인과 대화에서 제시한 해석학적 주장의 기초로 제시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이혼에 대한 당시 유대인의 교훈의 성경적 기초가 되는 신명기 24 1-4절이 창세기 1-2장에 제시된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원래적 의도와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 줌으로써 근본적으로 중요한 해석학적 이슈를 제기합니다. 예수는 오경 안에서 차원이 다른 두 가지 윤리적 교훈을 찾아냅니다. 즉 신명기 24 1-4절에서는 이미 발생한 문제를 다루기 위한 실용적 조항을, 그리고 창세기 1-2장에서는 사람들이 지키기만 했다면 신명기 24:1-4의 해법이 필요치 않았을 첫 번째 원리의 긍정적 진술을 찾아냅니다. 예수의 논증은 인간의 연약으로 인한 후대의 양보보다 본래 있었던 원칙이 먼저이며, 따라서 신명기 24 1-4절을 이혼에 대한 가르침의 기초로 삼는 당시 유대인의 교훈은 출발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혼이라는 구체적인 이슈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훨씬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즉 윤리적 규범은 이미 잘못된 상황을 다루는 법조문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명확한 뜻을 보여 주는 가장 근본적인 진술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24 1-4절부터 시작하려는 사람은 이혼을 전제로 할 것이며 그것을 법제화하는 문제에만 매달릴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1-2장부터 시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나누는 것은 언제나 악이라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6, 예수의 말씀은 일어날 수 없는 일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일어나서는 안 될 일에 관한 표현으로 명령형이 사용됩니다“한 몸”이라는 은유는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결혼을 끊을 수 없는 관계로 만듭니다. 그것을 끊는 것은 몸을 가르는 것과 같습니다. 더구나 이러한 결합은 인간의 결정이나 사회적 약속 때문이 아닙니다. 두 사람을 한 몸으로 “짝지어” 준 것이 하나님이라면 그것을 나누는 것은 사람의 몫이 아닙니다. 사실 “한 몸”은 존재론적 차원에서 인간의 결정이 깰 수 없는 결합인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결혼 관계를 깨는 것은 창조 질서를 통해 결혼 제도를 세우시고 영원히 “한 몸”이 될 것을 선언하신 하나님의 역할을 침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나친 은유이며 남편과 아내는 사실상 현실적으로 두 객체로 남아 있기 때문에 분리될 수 있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또한 실제로 이혼과 재혼(사실상 일부다처제)은 발생하고 있으며 엄밀히 말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은유의 핵심은 이러한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되며 하나님은 영원한 연합체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해체하려는 인간의 행위는 불법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예수의 주장은 이혼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을 침해하는 것이다! 샴마이파와 힐렐파의 이혼 사유에 관한 논쟁은 확실히 뒷전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따지는 이혼의 근거가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허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절대적인 원리에 대한 진술이 7절과 같은 바리새인의 반론을 촉구하게 한 것입니다.

 

7,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예수의 해석에 반대한 바리새인들은 한 육체를 강조한 예수의 의도를 파악하고 이혼이 불가하다면 왜 모세가 이혼 증서를 써서 아내를 보내라고 명령했는지 묻습니다.

 

8, 예수께서는 신명기 24 1-4절이 노골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이혼을 허락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허락이 어떻게 이혼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절대적 진술과 부합될 수 있는가? “모세”가 이혼을 허락했다는 진술은 온전한 결혼에 대한 원래적 원리가 창조주 자신에게서 나왔다는 4-5절의 진술과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에 의하면 모세가 허락한 것은 하나님의 목적에서 벗어난 인간의 일탈에 관한 것입니다. 1세기 유대교에서 모세를 통해 주어진 법은 곧 하나님의 법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주신 이스라엘의 가장 권위 있는 법전인 오경을 의미합니다. 8절에 사용된 “모세”라는 이름은 모세와 하나님을 대조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이미 모세를 신명기의 저자로 제시한 7절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가 대조한 것은 두 오경 본문의 저자나 권위 또는 본문이 주어진 순서에 관한 것이 아니라 목적에 관한 ㄱ입니다.  신명기 법전은 인간의 실패에 대한 반응이며 인간의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야기된 불완전한 상황을 바로잡으려는 시도입니다.

 

예수가 창세기 본문에서 추론한 내용과 (구약 성경에서 이 문제를 다룬 유일한 법적 조문인) 신명기 24 1-4절이 이혼으로 야기된 문제에 관해 규정한 내용 사이에는 명백한 상이점이 존재합니다. 본문의 “인용문”은 신명기 규례에 대한 서문의 일부를 요약한 것으로, 마치 원래부터 명령 형식이었던 것처럼 제시되며 70인역의 “내보내다” 대신 이혼이라는 전문 용어를 사용합니다. 바리새인은 이 구절을 본문의 원래적 의도와 달리 “계명”으로 해석하지만, 이혼 증서를 주는 행위와 이혼은 “명령”이 아니라 이미 발생한 일로 전제되며, 실제적인 법은 구체적인 이혼과 재혼이 존재하는 시나리오의 후기 단계와 관련됩니다. 그러나 당시의 모든 유대인은 이러한 전제에는 원래적 이혼에 대한 허용이 함축되어 있다는 가정을 합리적인 해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이 엄격한 “명령”이 아니라면 적어도 허용을 함축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마태복음의 어법은 이러한 차이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으며, 예수는 “명령하다”라는 동사 대신 “허락하다”라는 동사를 사용합니다. 바리새인이 잘못되었음을 보여 주며, 예수는 신명기 본문에서 창세기의 원리와 거의 동동한 지위에 해당하는 “명령”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결혼과 관련해서 하나님께는 두 가지 뜻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뜻을 “원래의 뜻”과 “허락된 뜻”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의 원래 뜻, 즉 남자와 여자가 한 육체가 되는 결혼을 알려 줍니다. 그러나 실패한 결혼을 위해 하나님은 이혼을 허락하셨습니다. 이혼은 명령이 아니라 인간을 배려한 하나님의 허락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늘나라의 새 시대가 왔고 새 시대의 제자들은 소금과 빛으로서 마음이 완악한 자들에 포함되지 않으므로(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하나님이 창조 때 에덴동산에서 의도하신 뜻에 순종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은 결코 나눌 수 없습니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이혼과 재혼에 대한 결과적 선언은 성경에 대한 언급이 아닌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라는 같은 형식으로 다시 시작합니다. 이로써 5 21- 47절에 제시된 하나님의 뜻에 대한 권위 있는 재진술, 특히 5 32절의 이혼과 재혼에 대한 말씀을 도입합니다. 이곳에서는 이혼한 아내에 대한 진술이 없으며 간음한 자로 정죄 받은 자는 이혼한 아내와 결혼 한 사람이 아니라 아내와 이혼 후 재혼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이혼과 재혼의 결과에 대해 다른 말씀이 제시됩니다. 그의 두 번째 아내가 앞서 이혼한 여자라는 언급이 제시되지 않는 것은 간음의 책임이 아내와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한 남자에게 있음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결혼은 성적으로 부정한 경우("음행한 이유”)가 아니면 끝날 수 없다는 주제를 다르게 표현한 것일 뿐이며 이 경우 어느 쪽의 재혼이든 간음이 되는 것입니다.

 

배우자의 음행은 사실상 결혼의 연합성을 깬 것이므로, 음행 외의 이유로 아내와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것은 간음 행위다, 예수의 결론적 선언입니다. 음행(포르네이아)은 우상숭배의 죄( 2:20; 3:9)나 신실하지 않음이나 부도덕함( 14:33; 47:10; 57:9)에도 사용됩니다. 결혼의 문맥에서는 여자 쪽의 음행을 뜻합니다. “포르네이아”가 성적 음행보다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됐으므로 레위기 18:6-18의 예처럼 근친 상간 등도 이 용어의 범위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이 제기되지만, 본문에서는 성적인 음행을 가리킵니다. 예수는 5:31~32에서 음행의 경우에만 이혼이 가능하다고 가르치셨고 19:9에서도 같은 입장을 밝히십니다. 만일 아내가 음행을 행하지 않았는데도 남편이 이혼해서 다른 여자와 재혼하는 것은 간음에 해당합니다.

 

10, 바리새인들과의 논쟁 이후 제자들이 질문합니다.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 결혼에 대한 전통적인 사고를 보는 예수의 혁신적인 관점을 고려할 때 결혼이라는 굴레에 매이기보다 아예 결혼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익살맞게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 사회가 독신으로 남는 것을 용납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깊은 사색에서 나온 반응이라기보다 본능적인 반응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예수처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당시 유대교의 주류 사회가) 남자가 독신으로 사는 것을 고려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들은 결혼과 자녀 양육을 종교적 의무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역설적 의도가 담겨 있을 수 있는 제자들의 말에 대해 예수는 진지한 반응을 보이십니다.

 

11,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하냐 하는 것이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예수 자신의 급진적인 가르침보다 바로 앞 제자들의 언급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때에, 독신은 실제적인 대안이지만 모든 사람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에 의해 11절과 연결되는 12절은 이혼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독신에 대해 언급한다는 것을 볼 때에, 제자들의 외침(익살맞은 언급이기는 하지만)은 자발적 독신이라는 대안을 제기함으로써 주제를 바꾼다고 봅니다.

 

12, 한글 번역상 보이지 않는 서두, “왜냐하면”은 이 특별한 말씀을 11절에 언급된 독신의 은사에 대한 설명으로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이 구절은 결혼하여 자녀를 가지지 않는 자들을 묘사하기 위해 고자에 관한 사례를 듭니다. 실제적 고자의 경우 결혼을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해석은 본문의 “스스로 된 고자”를 실제적 고자로 보지 않고, 독신으로 남겠다는 결정에 대한 은유로 봅니다.

 

결혼을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자들에 관한 논의에서 “고자”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우리 입장에서 볼 때 불필요하게 극단적인 선택으로 보이며, 이 단어가 한 구절 속에 다섯 차례(“고자”라는 명사로 세 번, “고자가 되다”라는 동사로 두 번) 반복된다는 것은 이러한 불편함을 더욱 가중시킵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고자를 혐오의 대상이 아닌 동정의 대상으로 여겼던 1세기 유대 사회에서도 상처가 되는 말이었습니다. 이처럼 공격적인 은유를 선택한 것은 결혼과 출산을 지극히 당연한 규범으로 여겼던 당시 문화를 반영한 것으로서 그처럼 자극적인 표현이 아니면 이러한 사회에 의문을 제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회에서 남자가 결혼하지 않는 “비정상”은 사람들에게 고자가 아닌 다른 이유를 생각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예수의 말씀은 이처럼 결혼 아니면 고자라는 흑백 논리를 배경으로 형성된 것입니다.

 

이 구절은 (제자들의 언급에서 나타나듯이) 남자의 상황에 비추어 제시됩니다. 남자가 결혼하여 아버지가 되는 규범을 따르지 않는 이유는 세 가지로 제시됩니다. 그는 날 때부터 고자이거나 인간의 개입에 의한 고자이거나 의도적으로 선택한 고자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가장 쉽게 이해됩니다. 인위적 거세, 특히 결혼한 여자의 시종이나 후궁에서 일하는 자들에 대한 거세는 고대 사회에 널리 시행된 관습이었습니다. “타고난 고자”는 신체적으로 자녀를 가질 수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스스로 된 고자”를 문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면, 오늘날 역본에 나타나는 “결혼을 포기하다”(NIV. REB)나 “결혼하지 않다”(GNB)와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처음 두 범주가 결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이 세 번째 범주는 자발적으로 독신을 선택한 경우에 대한 언급입니다. 이러한 선택은 결혼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인식한 때문입니다. 여기서 “천국”은 하나님의 주권적 권위를 나타내며, 그들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지 않는 것이 이러한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구절 자체는 하나님이 그들을 불러 독신이 되게 하신 구체적인 목적에 대해 제시하지 않습니다. 훨씬 일반적으로 해석할 때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기 때문에 독신을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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