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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부터 처음 읽기/마 19:1-30

마 19:27-30 제자들을 위한 보상의 약속

by pooh_in_the_Way 2022.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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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19: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마19: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마19: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마19: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베드로의 질문으로 시작하는 마태복음 19:27~30은 ˚모든 것을 버리지” 못한 부자의 실패와 기꺼이 그렇게 한 제자들 사이에 분명한 대조로 시작하는 것 같지만, 보상의 주제를 확대하여 다룹니다.

 

예수의 대답에 대해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린 제자들에게 어떤 보상이 주어질 것인지 묻습니다. 여기서도  베드로는 열두 제자를 대표하여 질문합니다.  예수의 대답은 그들 모두에 대해 복수 형태로 주어집니다. “우리”라는 주어는 문법적으로 불필요하지만 부자와의 대조를 강조하기 위해 삽입되었습니다 베드로의 말에는, 부자 청년과 달리 우리는 예수의 요구에 응했다는 자만심과 하나님은 마땅히 우리에게 의무가 있다는 식으로 보상을 바라는 심리가 담겨 있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실제로 전부를 버린 것은 아니지만(8장 14-15), 순회하는 예수를 따라가는 삶은 모든 것을 버린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28,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예수는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하늘의 보상을 약속하십니다. 이 보상은 두 가지 형태로 제시됩니다. 28절에서는 특별한 권세의 지위로 제시되며(이 내용은 마태복음에만 나타납니다) 29절에서는 여러 배의 보상과 영생으로 제시됩니다. 보좌를 강조한 언급은 인자가 보좌에 앉는 장면을 다룬 다니엘 7장을 암시함으로써 이 주제를 더욱 발전시킵니다. 25 31-34절은 이 이미지를 더욱 구체적으로 적용하여 영광스러운 심판의 보좌에 “왕”으로 앉은 인자에 대해 묘사합니다. 25 31-46절은 명백히 최후 심판 장면에 해당하며 이러한 종말론적 관점은 “세상이 새롭게 되어”(‘헤 팔링게네시아’))라는 표현과 함께 이곳 본문에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앞서 “새 시대”로 번역된 바 있는 ‘헤 팔링게네시아’는 구약 성경의 “새 하늘과 새 땅”( 65:17; 66:22 )에 대한 종말론적 소망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구약 배경을 살펴보면, 본문이 다니엘 7:26-27의 암시라는 측면에서, 다니엘서의 인자 같은 이가 하늘법정에 앉아서 심판할 때 “거룩한 백성”이 그의 권위를 부여받는 것처럼, 제자들도 예수께서 하늘법정에서 마지막 심판장의 역할을 시작하실 때 그의 심판에 참여할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이 시작되면 그는 권세를 빼앗기고 완전히 멸망할 것이요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나라들의 위세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거룩한 백성에게 붙인 바 되리니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라 모든 권세 있는 자들이 다 그를 섬기며 복종하리라”( 7:26-27). 그런데 뒤에서 살펴볼 것처럼 인자와 제자들의 심판 행위가 단회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라는 사실은 심판이 “기간 동안” 통치한다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12:20).

 

이 새롭게 된 세상에서 인자는 공개적으로 왕으로 등극할 것입니다. 인자가 “그의 영광의 보좌”에 앉는 장면은 예수께서 종말의 심판자인 사실을 가리킵니다. 예수의 약속은 다니엘 7장과 시편 122편에 기초한 것으로 보입니다. 인자와 열두 제자의 관계는 다니엘 7장에서 인자 같은 이와 “지극히 높으신 이의 거룩한 백성”의 관계와 비슷합니다. 제자들은 열두 보좌에 앉아 인자의 심판에 참여할 것입니다( 7:13~14, 26~27). 어느 나라에서든지 심판하는 권세가 가장 높은 권세이므로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권위는 가장 높은 것입니다. 유대 묵시 전통에서 보좌에 앉는 것은 의인들이 종말에 받을 보상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예수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제자들은 가장 큰 것을 얻게 됩니다. 흥미롭게도, 영광의 보좌는 하나님의 보좌가 아니라 인자의 보좌입니다. 이만큼 예수의 권위는 절대적입니다.

 

다만 다니엘 7장에서 인자는 다른 나라들을 심판하는 이스라엘을 나타내지만 여기서는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습니다. 이러한 이미지의 전환은 “심판”의 성격에 기인합니다. 이 단어가 구약 성경 사무엘 시대 이전까지 이스라엘을 인도하던 “사사”처럼 임명된 통치자라는 의미를 가진다면, 제자들은 그들이 속한 공동체의 지도자가 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 단어가 사법적 판결이라는 더 일반적인 의미를 가진다면 제자들은 (그들도 유대인이지만)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고 그들에게 나타날 것입니다.

 

신약 성경 헬라어에는 “심판하다” 라는 동사가 “통치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된 다른 사례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동사는 여기서 이러한 일반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경우 이 구절은 인자의 통치를 받는 예수의 제자들은 실패한 옛 왕국과 대조되는 “새로운 이스라엘”을 구성한다는 마태의 특징적 신학을 반영합니다. 이러한 신학은 21 28-22 14절의 비유와 24장의 강화에서 가장 분명하게 제시됩니다. 열두 제자를 특별히 선택한 것은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하며, 이들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대표함으로써 이 숫자의 의미는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요한계시록 21 12, 14절에서도 나타난 열두 지파와 열두 사도의 연결에 대해 살필 수 있습니다.

 

29, 28절에 제시된 첫 번째 약속은 “너희”(열둘)에게 직접 말씀한 것이지만 두 번째 약속에서는 “내 이름을 위해”, 즉 천국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사람 전부에게로 범위가 확장됩니다.  버린 것들의 목록에는 자신의 소유(, 전토)와 가족(여기서는 누가복음과는 달리 아내는 포함되지 않고, 오직 부모로부터 형제자매와 자식으로 이어지는 3)이 포함됩니다. 마태는 열두 제자가 순회 사역에 아내를 데려간 사실(고전 9:5)에 영향을 받았을 수 있습니다. 가족 구성원을 가리키는 표현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인간관계를 의미하되, 이는 신앙을 핑계로 가족의 의무를 소홀히 여겨도 된다는 뜻은 당연히 아닙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정체성이나 충성심을 의미하는데, 29절의 이름은 후자를 가리키며, 예수 이름으로 버리는 것은 예수를 향한 충성심 때문에 받는 고난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름을 위해 버리는 자들은 예수의 부르심에 순종하기 위해 포기해야만 하는 것들을 의미합니다.

 

13 8, 23절에서처럼 “여러 배”는 어울리지 않게 큰 “보상”을 가리키며, 이어지는 비유는 하나님이 자기를 섬기는 자들에게 인간 사회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관대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에서는 이 보상이 현세”에 주어질 것이라고 언급함으로써 보상의 성격을 분명히 하지만, 마태와 누가는 보상의 내용에 대해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부자 청년이 소유를 포기하면 주겠다고 약속한 보화처럼 이 땅에서의 보상보다 하늘의 보상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 경우 여러 배의 보상과 영생의 상속(부장 청년이 구했으나 이루지 못한 목표)은 사실상 동의어입니다. 하늘의 생명은 지상의 손실에 대한 어떤 보상 보다 큰 보상입니다.

 

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제자들의 상황에 대한 매우 긍정적인 언급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그들은 집과 가족을 버린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인 반면에, 세상이 “먼저 된 자”로 보는 부자는 “나중 된 자”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나”가 29절의 내용과 대조되는 기능을 한다면 본문은 제자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 다시 반전이 일어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부자 청년의 실패는 천국의 새 백성에게 여전히 교훈으로 남습니다. 제자들이 첫째와 같은 위치에 있다고 우월감을 갖게 되면 첫째가 꼴찌가 되는 예로 변할 수 있습니다. 우선 이러한 보상을 당연시하는 베드로의 자만심에 대한 반박이라는 것입니다. 18 1절의 질문이 보여 주듯이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 사역의 전면에 나선 자들은 당연히 천국에서 가장 큰 자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천국을 위해 가장 많이 헌신한 자가 다른 사람보다 큰 보상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20:1-15). 아무리 많은 것을 버렸다고 해도 천국에서의 지위를 주장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보상을 기대할 수 있으나 반드시 탁월한 보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업적보다 하나님의 은혜로 운행되는 천국은 가장 평등한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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