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8: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마18: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마18: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18: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18: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마18: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18장은 예수의 네 번째 강화로, 흔히 “공동체 강화” 또는 “교회의 질서 또는 교회의 권징을 위한 설교”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보다 넓게, 공동체 안에서 가져야 할 제자도에 초점을 맞추어, 공동체 구성원들간의 관계에 대한 것으로 겸손, 다른 구성원을 실족시키는 일의 회피, 용서의 중요성과 같은 문제들을 차례로 다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 단락은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께서 대답하신 것으로 시작됩니다.
서두의 “그때에”와 번역상 생략된 “그렇다면 (천국에서는 누가…)”이라는 접속사는 앞선 단락과의 연결을 암시하므로, 그렇다면 어떻게 성전세에 관한 이슈가 이러한 질문을 야기하게 하였는가가 관심이 됩니다. 예수의 말씀은 비교 지위에 관한 것으로서 “아들”과 “타인”을 비교하며 그들이 가진 특권에 대해 언급하였습니다. 더구나 이 주장은 “세상 임금들”의 일반적 관행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천국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서열을 정하는가? 하는 것이 자연스런 관심사이고, 그렇다면 누가 “아들”의 특권을 누리는가? 하는 것이 설명되어야겠지요. 앞서 17장 24-27절에서 예수는 이 특별한 지위에 제자들이 포함될 수 있음을 보여 주셨으나 그들은 이 문제를 분명히 해 줄 것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질문을 더욱 민감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습니다. 앞의 본문에서 베드로는 (마태복음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마태가 그를 선두에 내세울 만큼(10:2) 두드러진 활동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16장 16절에 제시된 그의 고백은 예수로부터 그의 통찰력에 대한 칭찬(16:17)과 함께 예수의 ‘에클레시아’를 위한 그의 특별한 역할과 권위에 대한 진술(16:18-19)을 끌어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베드로는 어려운 상황에 처한 나머지 제자들을 뒤로 하고 두 명의 가까운 동료와 함께 예수를 수행하여 변화산에 오르는 특별한 여정에 동참하였습니다. 17장 24-27절에서는 베드로가 예수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이며 성전세 문제에 대한 예수의 “해결책”에는 열두 제자 가운데 베드로만 포함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분명히 했기 때문에 더욱 긴박한 문제가 되었고, 따라서 예수 사후에 누가 지도자의 자리를 맡을 것인지를 묻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다만 제자들이 생각하는 천국은 왕적인 메시아인 예수께서 다스릴 나라(사 52:7)를 가리키며, 지상에서 펼쳐질 나라, 이스라엘의 주권이 회복된 나라, 이방의 제국이 물러가고 세리와 죄인들이 심판을 받아 청결하게 된 나라를 가리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는 서열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자들은 권력의 순위에서 누가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인지 궁금해 한 것입니다. 여기서의 질문은 사실상 “누가 가장 높은 제자냐?”라는 뜻입니다
2-4절, 예수는 제자들의 질문을 듣고 한 어린아이를 그들 가운데 세우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제자들 가운데 서 있는 어린이는 그들이 배워야 할 모습이기에 가운데 세우신 것입니다.
다른 번역본에서 보다 전문적인 의미로서 “회개치 않으면”으로 번역된 “돌이켜”라는 동사는, 예수가 요구하시는 변화의 급진적 성향과 부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개인적 지위에 관한 인간적 생각을 버리고 바닥 서열을 택하거나 구하는 것이야말로 “회개”라는 용어가 의미하는 근본적인 방향 전환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된다는 것은 사실상 의도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태도로의 새로운 행보를 다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4절로 이어집니다. 이제 제자들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할 준비가 되었습니다.1절에 대한 대답으로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어린아이와 같이 된다는 것은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낮춘다”는 원형은, 형용사로서는 그 원래의 의미상 “겸손한”으로, 그러니까 강력한 윤리적 함축이 담긴 정신적 태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번역됩니다. 동사로서는 지위를 나타내며, “창피를 주다”에 가까습니다. 그러니까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아이들의 일반적인 특성이라고 우리가 생각하는 겸손의 미덕을 얻기 위한 시도가 아니라 아이들로 상징되는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아이들은 성인 사회에서 자주적 결정권이 없으며 “잘 아는” 어른들의 뜻에 따라야 합니다. 따라서 4절에 나타난 역설을 아직 이해하기에 충분치는 않습니다.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라는 19장 30절의 말씀처럼 가장 작은 자가 가장 크다는 것입니다.
5절,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예수가 사례로 제시하신 어린아이에 관한 두 번째 언급은 아이의 입장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보느냐에 초점을 맞추어집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우리를 이 강화의 주 관심사로 인도합니다. 즉 제자들은 서로에 대해 어떻게 대할 것이냐는 것이지요. 10장 40-42절에서 선지자나 의인 또는 “작은 자”를 “선지자/의인/제자의 이름으로” 영접한 것처럼 어린아이는 “예수의 이름으로” 영접을 받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의 이름으로”라는 표현에 대해 “그들은 개인적으로뿐 아니라 하나님의 선지자(의인, 제자)로서 영접을 받으며 그들이 영접을 받는 이유는 그들의 지위 때문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어린아이는 아이로서뿐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영접을 받습니다. 이것은 어린아이가 예수를 나타내며(아직은 25:40, 45에서 예수의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가 예수를 나타내듯이) 따라서 그들을 영접하는 것은 곧 예수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는 이와 같이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인간적 지위와 전혀 다른 탁월한 지위를 부여합니다.
이와 같이, 제자는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할 뿐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이 된 사람을 영접해야 합니다. 가장 낮은 위치에 처한 제자는 가장 높으신 예수를 대표하므로, 낮은 자를 영접하면 예수를 영접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