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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부터 처음 읽기/마 18:1-35

마 18:15-20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by pooh_in_the_Way 2022.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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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18: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마18: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마18: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마18: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18: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마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 시나리오는 한 제자가 다른 제자의 범죄 사실을 알았을 때 시작됩니다. “죄”의 내용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너에게” 또는 “네게 대하여”라는 구절이 없음으로 인하여 공동체 내의 어떤 특정인에 대한 구체적인 상처가 아니라 일반적인 죄에 대한 언급이라고 봅니다. 이 범죄와 범죄한 제자에 대한 관심은 범죄한 자의 영적 유익을 위한 것이거나 그들의 행위가 나머지 공동체나 평판에 미칠 영향 때문일 수 있습니다. 초점은 동료 제자가 죄를 범해 영적인 위험에 처했을 때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관한 내용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11-14절이 요구하는 “작은 자들”에 관한 목회적 관심의 실제적인 수행에 대한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공동체의 배척에 관한 규정이 아니라 문제를 처음 감지한 제자가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한 내용입니다. 여기서 제자는 공동체 전체의 상황 안에서 행하는 것으로 간주되나 초점은 개인의 태도와 행위에 맞추어집니다.

제자 공동체에서 죄는 어떤 형태로든 용납될 수 없지만 이 문제의 처리는 범죄 사실이 드러났을 때 시행되어야 합니다. 이 문제는 민감하게 다루어야 하며 가능한 비공개적이어야 합니다. 이 구절에 제시된 원리는 가능한 드러나지 않게 처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개입은 개인적인 접근이 실패한 경우에 한합니다.

그러나 이 방식은 명확하고 강력하게 시행되어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권고하라”는 표현은 결코 약한 의미가 아닙니다. 이 본문 전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여기에는 문제를 제기한 자가 옳고 비난의 대상이 되는 행위는 틀렸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실제적인 상황에서 이 문제는 결코 간단하지 않으며 조치를 취한 자가 이 “범죄”는 단순히 개인적인 취향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한두 사람”이나 이어지는 “교회”의 개입은 이러한 위험을 최소화합니다.

이러한 접근의 목회적 목적은 “얻다”라는 동사를 통해 강조됩니다. 이 단어는 이러한 관심이 공동체 전체의 안전이나 평판은 물론 개인의 영적 유익을 위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얻다”는 그가 잃어버릴 위험에 처했으나 회복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앞서 목자가 양을 찾고 즐거워한 이미지를 반영합니다.

 

첫 번째 단계인 일대일 시도가 실패할 경우 더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합니다. 이 부분에서도 “한두 사람”에 지도자가 포함된다거나 누구를 택할 것인가에 대한 암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들의 역할은 첫 번째 조치를 취한 제자를 뒷받침하고 그가 제기한 문제가 실제로 “범죄”에 해당된다는 판단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인식이나 동기에는 의문이 있을 수 있지만 두세 사람의 증거는 권위가 있습니다. 신명기 19 15절은 다수의 증거가 필요하다는 원리를 제시합니다.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 사법적 선고를 위해서는 복수의 증인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민수기 35 30절과 신명기 17 6절에는 이러한 원리가 사형과 관련하여 더 구체적으로 적용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 호소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앞서의 접근 방식이 가능한 피하고자 했던 일입니다. “교회에 말하고”는 공동체가 모였을 때 (은밀하게 다루는 것이 아니라) 공적인 진술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개적 접근은 가능한 피해야 하지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불가피합니다. 모임의 목적은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목회적 호소를 강화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듣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범죄한 자는 제자 공동체 전체의 반대에 직면하여 자신에 대한 권면이 개인적 불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처럼 일치된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더 이상 공동체의 지체로 적합하지 않은 자로 여기게 됩니다. “너”(단수 대명사로 공동체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제기한 당사자 개인을 가리킨다)는 그들을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방인”과 “세리”는 5 46-47절에서 수준 높은 행동을 기대할 수 없는 자들(그곳에서 살펴본 대로 "도덕적 수준이 최하”에 해당하는 자들)을 나타내기 위해 함께 사용되었으며 6 7절의 “이방인” 역시 비슷한 기능을 합니다. 이러한 용례는 하나님의 백성이 우월하다는 유대인의 전통적 사고와 세리는 유대인이지만 이방인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인식(9:9 참고)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용어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회중에 들지 못하는 자로서 교회가 식탁 교제를 거부하고 회피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대부분의 유대인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마태복음이 예수가 소외된 자들을 긍휼히 여기고 그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전통적 금기를 깬 것을 강조해 온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과연 예수께서는 이 용어를 그런 의미로 사용했겠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문이 됩니다. 8 10-13절에서 이방인의 믿음을 칭찬하고(어떤 이스라엘 사람보다 크다) 9 9-13절에서 마태를 비롯한 세리들을 받아들인 후라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구절은 범죄한 자를 이해하고 교제를 확장하라는 의미가 되어야 자연스럽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이 구절의 문맥과 전혀 부합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범죄한 자와 교제를 회복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기울였으나 무위로 끝났기 때문에 최종적 거부라는 공감대를 형성한 공동체가 더 이상 호혜를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곳의 용어는 유대인의 전통적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 제자는 범죄한 자와 정상적인 교제를 중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18,  예수는 교회가 땅에서 매고 풀 때마다 하늘에서 매이고 풀리는 것을 약속하십니다. 16 19절에서 베드로에게 주어진 위임은 동사가 복수로 바뀌고 제자들 전체를 대상으로 하며 “진실로”라는 삽입구를 통해 무게를 더한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축어적으로 반복됩니다. “매면”과 “풀면”의 의미에 대해서는 16 19절에서 이미 살펴 보았습니다.


15~17
절의 내용과 연결해 보면, 세 단계에 걸쳐 주어진 훈계와 회복의 절차를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을 교회가 징계했을 때, 교회는 이 결정이 하늘에서 인정을 받을 것으로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권위는 하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교회는 땅의 총회이고 하늘에는 하늘의 총회가 있는데, 두 총회 또는 회의는 서로 연결됩니다. 교회는 비록 약하고 형제의 문제로 인해 휘청거릴 수 있으나 교회의 뿌리가 하늘에 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교회의 결정에 하늘이 응답합니다.

 

우리는 앞서 이러한 표현들이 정죄나 용서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판단과 관련된다는 사실에 대해 살펴본 바 있습니다. 공동체의 한 지체의 “죄”를 다루고 있는 이곳 본문에서 이러한 표현은 “허락된 것과 되지 않은 것”이라는 랍비적 용례와 관련된 것으로 보입니다. 16 19절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매면”의 목적어는 남성이 아닌 중성으로 제시됩니다. 매거나 푸는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사물이나 이슈 또는 행동입니다. 물론 17절이 명백히 제시하는 대로 이러한 결정은 원칙적으로 당사자와 관련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17절에서 범죄한 자의 행위와 관련된 첫 번째 사람은 공동체에 호소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며 공동체는 그것이 “죄”라는 그의 판단을 확인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16 19절에서 베드로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동일한 권위를 행사합니다. 이 권위는 앞서의 말씀과 정확히 동일한 방식으로 진술됩니다. 따라서 베드로의 “천국 열쇠”는 그에게만 주어진 배타적 권위가 아니라 모든 제자가 누리는 권위입니다. 이러한 권위가, 하나님이 이 땅에서 자신의 뜻을 선포하는 역할을 그의 백성에게 맡겼다는 것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 하나님이 재가하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늘날 유대교는 공동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최소한의 인원을 남자 열 명으로 제시합니다. 예수의 원리는 훨씬 제한적이며 두 사람만 합의하면 됩니다. 본문의 기도는 죄인을 회복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이지만(서론적 해설을 보라) 한 가지 내용에 제한된 기도는 아니며, 앞서 살펴본 대로 이 구절은 원래 이 본문과 연결된 내용이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앞서 7 7-8절과 17 20절에서 기도의 응답에 대한 광범위한 약속에 대해 들은 바 있습니다. 광범위한 성경적 상황이 이처럼 끝없는 제안에 부과하는 제약에 대해서는 이들 구절에 대한 주석 ( 7:7-11의 서론)을 참고하라. 여기서는 확실히 또 하나의 제한이 부과됩니다. 즉 기도의 응답에 대한 이러한 약속은 개인의 변덕스러운 생각이 아니라 “너희 중의 두 사람”이 합심하여 간구하는 기도에 주어집니다.

물론 두 사람도 실수하거나 이기적인 마음에 좌우될 수 있으며 “응답 받지 못한 기도”는 결코 개인에게만 국한된 경험이 아닙니다


19
절에서 기도는 땅에 있는 두 사람과 하늘에 계신 하나님 사이에 직접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이제 제3자가 개입합니다. 이 구절의 어법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땅에 있는 제자들 가운데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을 내다보는 관점으로 볼 때만 이해됩니다. 땅의 합의를 하늘에서 집행하는 이유는 두세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예수께서 함께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10:40~42에서 “이름”에 대해 언급한 것과 같이, 이름으로 모이는 것은 그 이름의 사람 때문에 또는 그 이름의 사람을 위해서 모이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세 사람”은 공동체를 이루는 최소 단위입니다. 이는 아무리 적은 수로 모여도 부활하신 예수께서 공동체 가운데 함께하실 것을 강력히 약속하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두세 사람이 예수 때문에, 예수를 위해서 모이기 때문에 공동체가 합의하고 기도한 내용에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요점은 28 20절과 유사하지만 그곳에서는 예수가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언급이 새로운 부활 후 상황과 관련되지만 여기서는 놀랍게도 이미 그들 중에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은 예수의 사역 기간 중 제자들의 관점이라기보다 마태의 교회의 관점입니다. 이 구절은 합심하여 구하는 기도가 응답받는다는 사실의 근거를 제시하는 “~때문에”를 통해 19절과 연결됩니다. 그것은 두 사람이 합심하여 구하는 기도일 뿐 아니라 “그의 이름으로”86)(즉 그를 대신하는 제자로서 모였기 때문에 그들 중에 계시는 예수의 기도가 됩니다. 예수가 세상에 있을 때 그의 제자들은 서로 형제자매이지만(12:49-50) 예수가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을 때도 그는 여전히 그들의 구심점으로서 영적으로 임재해 있습니다.

이 구절과 28 20절은 마태가 1 23절에서 인용하여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로 번역한 “임마누엘”이라는 호칭을 더 분명하게 표현합니다. 그의 사역은 세상에서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통해 지속될 것이라는 기대에 근거합니다. 제자 공동체는 여전히 제자로 남을 뿐 아니라 예수와 함께합니다. 예수의 영적 임재는 하나님의 뜻을 선포할 수 있는 권위와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라는 기대의 근거가 됩니다. 또한 이러한 임재는 공식적으로 소집된 공의회가 아니라 그의 제자로서 모이는 두세 사람에게 약속됩니다.

 

교회는 긍휼의 공동체이면서 거룩해야 하는 공동체이므로 죄의 문제를 엄격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최종적인 결정을 내렸을 때 교회는 후유증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께서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공동체입니다. 교회의 결정을 하늘에서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권징을 하고 나서 담대해야 합니다.

 

그런데 21-22절을 보면, 이런 경우에서도 교회는 근본적으로 “용서”라는 공동체 원리를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슨 권징을 하더라도 용서라는 가르침을 기억해야 합니다. 용서는 실제로 어려운 일이어서 인간의 본성으로는 힘든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용서하지 않는 태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용서하지 못한 종의 운명이 보여 주는 것처럼 교회는 하나님에게서 받은 계산할 수 없는 용서를 기억하고 형제에 대해 용서를 베풀어야 하며, 권징도 용서라는 전제 가운데서 행해져야 합니다.

예수는 한 사람이 자신의 이름으로 활동할 때도 그 사람과 함께하시지만, 본문에서 예수는 의도적으로 두세 사람을 언급하심으로써 교회의 공동체성을 강조하십니다. 이 교훈은 교회 구성원의 합의를 강조하고 특정인의 독단적인 주장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공동체성은 임마누엘의 주제와 연결됩니다. 교회는 개인으로 모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 모였음을 늘 인식해야 하며, 공동체로 모여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갈 때 교회의 본질에 더 가깝게 다가 갈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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