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8: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마18:7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마18: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18: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2-4절에서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경고한 것이라면, 6-9절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운명을 게헨나에 던져지는 그림으로 묘사하십니다. 6~7절은 소자인 상대방을 실족시키는 자가 받을 심판을 묘사한다면, 8~9절은 세상과의 접촉을 통해서 유혹에 노출되는 제자들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6절의 실족시키는 것은 5절의 영접하는 것과 대조됩니다. 실족하게 하는 것은 죄를 짓게 만드는 행위, 이로 인해 예수와 복음을 믿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6절은 죽음 자체보다 더 무서운 죽음 이후의 형벌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예수는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10:28)고 경고하신 적이 있습니다. 연자 맷돌에 달려 죽는 것이 몸의 죽음을 가리킨다면, “작은 자”를 실족한 대가로 받을 형벌은 죽음 이후(실제로는 최후 심판 이후) 게헨나에서 받는 것입니다.
예수는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라고 제한시켜 “작은 자”로 낮아진 사람을 의도하심으로제자들에 대한 묘사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작은 자 중 하나”는 어린아이처럼 된 자(18:5)와 10:42에서 파송받아 소자로 낮아진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18:6의 작은 자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며, 10:42의 작은 자는 예수의 파송을 받은 제자이므로, 두 본문은 서로 연결됩니다. 또한 25:40, 45에도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가 나옵니다. 예수를 믿는 자를 실족시키는 사람은 양과 염소의 비유(25:31-36)에 나오는 염소의 운명처럼 될 것입니다.
예수는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시키는 죄의 대가에 대해 나귀로 돌리는 연자 맷돌을 목에 달아서 깊은 바다에 빠지는 것이 더 낫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소자를 실족시키는 것은 지옥(게헨나)에 던져지는 죄이기 때문입니다(8절). 연자 맷돌은 보통 돌보다 더 무거워 신속히 바다 밑으로 사람을 끌고 갑니다. 그러니까 예수는 사람을 실족시킨 사람의 운명은 나귀 맷돌을 목에 매달고 바다 깊숙한 곳에 던져지는 것이라고 강조하십니다.
유대인 청중에게 바다의 깊은 곳은 심연을 떠올렸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심연은 악의 세력이 나오는 출처이며 악의 존재들이 심판 전까지 갇혀서 대기하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심연에 연자 맷돌에 매달려 들어간다는 그림은 너무나 끔찍한 것입니다.
7절, “화가 있도다”라고 두 번씩 나옴으로 이 문제의 두 가지 국면을 강조합니다. 하나는 앞서 살펴본 대로 가해자가 당할 끔찍한 운명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보다 광범위한 의미를 가지는데, 세상 자체가 이러한 행위로 인해 고통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세상”은 외형적 피조 세계가 아니라 인간 세계를 가리킨다. 예수는 “불가피성”(아낭케)을 강조함으로 비극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인정하시는데, 모든 사람은 실족하게 하는 일에 직면하며 세상은 위험한 곳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당위성”은 신적 목적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타락한 세상의 본질적 요소에 기인합니다.
13:41의 “넘어지게 하는 것”을 포함하여 본문의 불법이 마지막 때까지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제자도는 결코 쉬운 명제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동료 제자에 대한 무책임한 행동으로 그것을 어렵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개념은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 전체에 흐르는 사상인데, 신약 성경의 대표적인 사례는 가룟 유다입니다. 26:24의 “화”는 구체적으로 그를 지목한다는 사실에 유의하여야 합니다.
8-9절, 이 두 구절은 5장 29-30절과 다른 어법 및 구조로 형성되지만 요점은 동일합니다. 이곳의 본문이 더 온전한 형태입니다. 6~7절이 타인을, 특히 작은 자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가해자의 입장에 있는 자들을 경고했다면, 8~9절은 세상에서 오는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에 대한, 말하자면 타인을 공격하는 것과 달리 스스로 무너지는 경우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손과 발이 자신을 걸려 넘어지게 하면 잘라서 던져야 한다, 왜냐하면 장애인이 되고 다리를 저는 것이 두 발을 달고 영원한 불, 곧 게헨나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즉 영원한 심판보다 수족 절단이 낫다는 충격적 이미지에 대해서는, 5:29~30에서와 같습니다. 발과 손과 눈은 세상과 접촉하는 신체 기관을 대표합니다. 사람은 세상과 접촉하는 신체 기관을 통해서 끊임없이 유혹을 받게 됩니다. 8~9절은 눈과 손이라는 신체 기관이 실족시키는 도구가 되면 그런 기관 없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낫다는 내용이 반복됩니다. 다만 거기에서는 간음(정신적 간음을 포함한다)이라는 구체적 범행에 대한 경고였으나, 여기서는 특정 영역이 제시되지 않으며 그곳에서 위험한 행동이나 태도를 피하라는 원리는 인간의 다른 범죄 영역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모든 경고는 2인칭 단수로 표현되는데, 이것은 특히 “실족하게 할” 위험이 있는 제자들에 대한 개인적 경고로,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