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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전적으로 성경 읽기
마태복음부터 처음 읽기/마 19:1-30

마 19:13-15 어린 아이들에게 안수하시다

by pooh_in_the_Way 2022.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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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19:13 그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마19:14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
마19:15 그들에게 안수하시고 거기를 떠나시니라

 

 

결혼, 이혼, 독신에 대해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 사람들은 어린이들에게 예수께서 안수하시고 기도해 주실 것을 바라고 데려왔습니다


가정과 사회의 가치관에 대해 다룬 본문(19:3-20:28)에서 이 단락은 결혼과 관련된 문제에 이어 자녀에 관한 문제를 다룹니다. 여기서도 제자들은 천국의 역설적 가치에 대해 배웁니다. 천국이라는 언급이 12절에 이어 14절에도 반복되고 계속해서 23절과 24절과 20 1절에도 나타나는 것은 이 장들의 초점이 전방을 향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아이들의 중요성이라는 주제는 새로운 것이 아니며 18 1-5절에서도 제시된 바 있지만(그곳 주석 참고), 이제 이러한 주제는 아이들과의 실제적인 만남을 통해 더욱 강조됨으로써 다시 한 번 제자들의 잘못을 깨우치고 그들이 여전히 예수의 가치관을 공유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어린 아이의 연령을 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모든 아이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로 사용됩니다. 마태는 마가복음과는 달리 예수가 그들을 안았다는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자들에 대한 언급은 제시되지 않지만 우리는 부모일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거룩한 자”가 아이들을 축복하기를 바랐다는 특별한 언급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13절에서 손을 얹는 행위는 기도를 위함입니다. 이 곳에서의 요구는 속죄일 저녁에 “축복과 격려와 기도”를 위해 아이들을 장로들에게 데려온 것(Sop. 18:5) 이나 누가복음 2 28(참고, 48:14-20) 에서 시므온이 성전에서 아이 예수를 축복한 장면에 비교할 수 있다. 마태복음에는 부모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제자들이 아이들을 직접 꾸짖은 것으로 제시되며 아이들이 혼자 올 정도라면 그것도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의 반응은 제자들이 쫓아내려 했던 대상이 아이들 자신임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이들을 데려온 것은 부모이며 수동태로 제시된 “데려오다”라는 동사에 함축된 주어가 그들일 것이라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꾸짖은 이유는 제시되지 않지만, 14절에 나타난 예수의 반응은 그들이 아이들은 주인의 관심을 끌지 못할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했을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제자들은 “그들을” 꾸짖었습니다. 제자들이 꾸짖은 대상은 어린이들을 데려온 사람들인가, 아니면 어린이들인가? 어린이들의 의존성을 고려할 때 데려온 어른들을 꾸짖었다고 할 수 있지만, 13절의 주어는 어린이들이고 “그들에게” 안수해 주시기를 사람들이 기대했으므로 어린이들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ㄴ다. 제자들은 기억력이 부족하며 그들의 태도는 “내 이름으로 이런 아이 하나를 영접”(18:5)하라는 말씀에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사역이 어린이들로 인해 방해를 받지 않기를 원했기 때문에 안수를 받지 못하게 했을 것입니다. 또한 제자들은 당시 사회에서 가장 낮은 지위에 해당한 어린이들에게까지 예수께서 관심을 두기 어렵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만일 제자들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들은 예수께서 어린이들을 환영하신다고 말씀하신 사실을 잊어버린 것입니다(18:5). 낮은 지위의 사람이 예수의 사역을 방해하지 못하게 막는 모습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무리가 치유를 요청하는 맹인들에게 침묵하게 만드는 데서도 나타납니다(20:31). 제자들이나 무리는 예수께서 가져오신 하늘나라가 정치적 승리를 위한 나라가 아니라 어린이나 맹인들처럼 사회적으로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을 돌보는 나라인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14-15
절, 예수는 아이들이 오는 것을 막지 못하게 하십니다. 예수는 어린이들에게 안수하도록 “허락하라” 또는 그렇게 하도록 “놔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어린이들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십니다. 흥미롭게도, “금하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저항하는 경우에 사용되는데,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것은 인간이 저항하지 말아야 하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천국은 아이와 같은 자가 들어가는 곳이며 자신을 낮추는 자가 가장 큰 자가 되는 곳입니다(18:3-4). 여기서 이슈의 초점은 18 2절에서처럼 실제 아이에 맞추어지지만 18 5절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이들”이라는 지시어 대신 “이런”이 사용된 것은 본문에 나오는 실제적인 아이보다 광범위한 의미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영접하고 격려해야 할 대상에는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이, 중요하지 않고 의존적이며 취약한 자들이 포함됩니다. 14절의 “천국은 …이다”는 팔복의 처음과 마지막 복에 나온 표현과 같습니다(5:3. 10). 첫 번째 복에서 천국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것이었기에, 어린이처럼 전적으로 의존하는 자는 복되며 천국이 허락됩니다(18:2). 그리고 예수께서 어린아이처럼 낮아져 어린아이를 영접하고 환영하는 모습은 제자들이 배워야 할 하늘나라의 가치입니다. 천국이 이런 자들의 것이라는 진술은 “심령이 가난한 자”와 박해받는 자들에 대한 동일한 진술이 나타나는 5 3, 10절을 상기시킵니다. 이런 자들을 예수에게서 떼어 놓는 것은 연자 맷돌을 매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것보다 위험한 일입니다(18:6).

안수는 성경의 다양한 상황에서 축복의 표시로 나타납니다. 손을 얹는 안수는 어린이들을 향한 예수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러한 행위가 치유와 관련하여 나타나며 (9:18; 참고, 8:3, 15; 9:29 "손을 대다”) 17 7절에서 예수는 두려워하지 않도록 손을 댑니다. 본문에서 예수의 관심은 아이들의 의존적인 특징, 긍정적으로 표현하자면 겸손함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떠나신 모습은 장면이 바뀌는 것을 암시합니다. 예수는 여전히 유대 지역에 머물었고 16절부터 다음 장면이 소개됩니다. 15절에서 기도가 언급되지 않지만 안수해서 기도하신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5절의 안수가 세례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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