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3:53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그 곳을 떠나서
마13:54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마13: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마13:56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
마13:57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마13:58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이 단락의 서두,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강화가 끝날 때마다 반복되는 어구로서, 13장의 천국 비유 강화를 마치신 것을 서술합니다. “그곳”은 예수께서 천국 비유에 대하여 제자들을 가르치신 집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사”, 이것은 예수의 공적 사역이 해변에서 시작된 후 예수께서 나사렛으로 돌아 왔다는 유일한 기록입니다. 이곳에서 “고향”으로 언급된 나사렛은 예수께서 실제로 태어나신 베들레헴(2장 1절)과 무관합니다. 내러티브는 여전히 갈릴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나사렛에 살고 있는 그의 가족이 내러티브 속에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회당”은 예수가 고향 사람들을 가르친, 그곳 사람들의 회당을 가리키는 것으로 12장 9절(“그들의 회당”)과 달리 이미 예수께서는 이미 가버나움으로 옮겨 사역을 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회당인 것입니다. 물론 이곳은 예수께서 어릴 때 출입하시던 회당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회당 방문은 환영받지 못합니다. 이 시점부터 더 이상 예수께서 회당에서 가르쳤다는 언급을 듣지 못합니다.
헬라어로 “가르치시니”를 읽는다면 느꼈을 분위기, 미완료시제이기에, 가르치기를 시작했으나 그들의 부정적인 반응으로 중단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일 수 있습니다. “놀라”는 7장 28절에서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 무리가 보인 반응과 같습니다. 7장에서는 칭찬이 제시되지만 본문에서는 즉시 의심으로 이어집니다.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지혜”는 그들이 직접 들을 수 있었으나 “능력”은 소문을 통해 들은 것입니다. 예수의 탄생에 대한 신학적 진실이 무엇이든 나사렛 사람들에게는 예수는 요셉의 아들일 뿐이며 마을 사회에서 그의 위치를 결정하는 기준 역시 목수의 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마가복음 6장 3절에는 예수 자신이 “목수”로 불리는데, 이것은 요셉이 죽어 장남인 예수가 가버나움으로 이주할 때까지 그 일을 맡았기 때문일 것으로 보입니다.). 동생들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이야기를 더욱 구체화하는 한 가지 방식이겠지만, 마태가 이 글을 기록할 당시 야고보(주후 62년에 순교할 때까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있었다)와 (아마도) 다른 동생들(사도행전 1장 14절과 고전 9장 5절)은 기독교 공동체에서 잘 알려진 인사였음이 분명합니다. 야고보와 유다는 전통적으로 신약 성경 서신서(야고보서, 유다서)의 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네 이름 모두 창세기에 나오는 족장의 이름에서 나왔는데 이것은 예수 가문의 보수적인 유대적 배경을 보여 줍니다.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언급은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최근에 예수와 함께 가버나움으로 이주한 반면, 이들은 나사렛을 떠나지 않고 현지인과 결혼하여 살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가족의 이름을 열거한 것은 이처럼 지역 족보가 잘 알려져 있는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42절,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에서 같은 어조를 발견합니다). 한편, 랍비는 가르치는 일을 하지만 마을 목수는 공식적인 교육을 받지 않는 한 특별히 선생인 체할 수 없다는 것도 포함됩니다. (역시 요한복음 7장 15절에서,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같은 경멸입니다).
결국 고향 사람들은 “예수를 배척한지라.” 고향 사람들에게서 받은, 익숙함으로 인한 반대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뜻밖에 메시아라는 점에 세례 요한이 느낀 “실족”(11장 6절)에 가까운 개념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늘나라의 복음이 자신을 통해 실현되고 있음을 요한에게 전하라고 하면서,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적어도 11장 6절의 복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예수의 냉소적 언급,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은 속담처럼 들립니다.
마태는 나사렛 사람들의 “믿지 않음”으로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셨다라고 서술합니다. 이 짧은 서술은 마태복음에서 치유나 기적 기사에서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믿음”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와 일치합니다. 이 곳의 문제는 예수가 특정 치유를 수행하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보다 권능을 행하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이미지 전체에 대한 불신입니다. “믿지 않음”은 예수를 거부한 자에게만 사용된 용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