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3:10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마13:11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마13: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마13:13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13:14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마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마13: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마13: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씨 뿌리는 비유와 해설 사이에 들어가 있는 13:10-17은, 제자들의 질문,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에 대한 예수의 대답입니다. 이 본문 역시 씨 뿌리는 자의 비유의 주제인 예수의 메시지에 대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반응에 초점을 맞춥니다. 앞 단락에서 청중은 무리였으나 본 단락에서 청중은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볼 수 있는 특권을 얻은 상태입니다. 제자들의 질문에서 “그들”은 무리를 가리킵니다. 제자들이 묻는 바, “비유로”는 단순히 “비유라는 매체를 사용하여”라는 뜻으로 보이지만, 비유, 즉 헬라어 ‘파라볼레’가 “비밀스러운 말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질문은 “왜 당신은 그처럼 비밀스럽게 가르칩니까”라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의 질문의 의도는 왜 분명하게 밝혀 주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우선, “너희”와 “그들”의 대조는 일차적으로는 제자들과 해변가의 무리를 가리키지만, 이미 11장 25-27절에서 볼 수 있듯이 두 부류의 사람이 있는데, 한 부류는 비밀이 계시된 자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계시되지 않은 자들입니다. 전자는 넓은 의미에서 12장 50절에서 언급하는 제자로 12장 끝부분에 예수와 함께 안에 있는 자들이며, 나머지 밖에 있는 자들은 후자에 해당합니다. 예수에게 속하여 새로운 가족의 일원이 되지 못한 “외인”(마가복음에 실제로 사용된 용어입니다, 막 4:11)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5-7장에서 살펴 본 바대로, 이 산상수훈에서 제자도의 삶을 “천국”에 속한 것으로 묘사하며, 따라서 이 구절은 두 그룹을 분리하는 원리를 요약한 것입니다.
천국의 비밀들에 대한 지식은 제자들에게만 주어집니다. “비밀”은, 헬라어로 ‘뮈스테리온’인데, 이전에는 드러나지 않은 신비로운 내용으로서 계시자의 도움이 없이는 스스로 알 수 없는 것을 가리킵니다. 내부자만 접근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비밀”이지만 다른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선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은 내부자가 되기 전까지는 깨닫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제자로서 “천국 말씀”(19절)을 공유하고 기꺼이 받아들일 때 비로소 비밀이 드러날 것입니다.
‘뮈스테리온’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다니엘 2장 18-19, 27-30, 47절의 용례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다른 지혜자들이 실패한 신적 “비밀”을 아는 특권을 주시며 다니엘은 그것을 왕에게 전합니다. 다니엘 2장에서 하늘의 하나님은 감춰진 것을 계시하시며, 계시의 내용은 영원히 멸하지 않는 나라에 대한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실 것을 알려 주는 하늘의 비밀은 다니엘 2:28, 44과 관련이 있습니다. “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가 느부갓네살 왕에게 후일에 될 일을 알게 하셨나이다……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 이 부분의 비밀은 “임시적으로 감춰진 것”으로서 계시를 통해서 해석됩니다. 그러나 “영원히 감춰진 것”으로서의 비밀은 다니엘도 알 수 없습니다(단 10:1~12:3). “내가 듣고도 깨닫지 못한지라 내가 이르되 내 주여 이 모든 일의 결국이 어떠하겠나이까 하니 그가 이르되 다니엘아 갈지어디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단 12:8-9). 바벨론의 지혜자들과 다니엘도 7~12장에 있는 자신의 계시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비밀을 지혜 있는 자들이 이해할 수 있을 때가 올 것입니다. 13:11에 있는 “천국의 비밀들”에서 비밀들이 천국에 속한 것임을 뜻합니다. 여기서 “천국”, 곧 “하늘나라”의 “하늘”은 하나님을 대체하는 용어가 아니라 하나님과 천사들이 거주하는 영역입니다. 천국의 비밀들은 “하늘의”(heavenly) 나라에 속한 비밀들을 가리킵니다. 구약에서 하늘과 관련된 비밀은 천상회의에 벌어진 일 혹은 다니엘서에서 종말론적 비밀, 하나님이 지시하신 미래의 징조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비밀”, “나라”, “하늘”은 13:11과 위에서 언급한 다니엘 2:28에도 등장하는 것으로, 하늘에 속한 나라가 땅의 나라에 옴으로써 다니엘이 기다렸던 나라가 성취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하늘에 속해 있는 비밀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가르침으로 계시되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은 천국이 왔다는 비밀을 예수의 가르침에 의해 배웁니다.
11절에서 “허락되었으나”와 “아니되었나니”는 신적 수동태입니다. 이 구절의 전체 어조는 다니엘 2장의 어조처럼 계시자로서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하나님이 계시할 때만 진리가 드러납니다.
12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분명히 잠언의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렇게 해석 가능합니다. 지금 가르침을 통해 유익을 얻는 위치에 있는 자는 이미 비밀이 허락된 제자들인데, 그들은 이미 영적 통찰의 노정을 출발한 자들로서 복이 배가되겠지만 “천국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은 자들은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없는 것을 잃는다’는 역설을 알고 있는 누가는 그들이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라는 현학적 진술을 제시합니다(눅 8:18).
좀 더 적극적인 해석은, 천국의 비밀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삶의 열매로 그것을 입증하기 때문에, 이해의 정도와 이해에 따른 삶이 자라게 될 것이며, 종말에 이르러 “주인의 즐거움”을 가득 얻게 될 것입니다(25:21, 23). 반면, 예수의 비유에 무관심했던 외인들에게는 실제로 주어진 것이 없으며 그나마 들었던 내용마저도 빼앗깁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비유라는 전략을 사용해 예수께 더 이상 다가오지 않는 사람들은 천국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임을 공적으로 선언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비유를 듣고도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고 떠나는 사람들은 들은 것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빼앗길 것이며, 떠남으로써 비유를 이해하지 못했음을 스스로 입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21:45~46(포도원 농부 비유)에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의 비유가 자신들에 대한 것임을 알았으나 그들의 이해는 올바른 반응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이해란 예수께서 해설해 주시는 “해석”을 받아들이는 것이지 자신들의 편의나 지식에 따라서 스스로 해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점에서 비유는 그 자체로 심판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심판을 받을 사람과 그렇지 않을 사람을 구분시키는 경계선의 역할을 합니다.
13절,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제자들의 질문에 대하여, 11~12절의 대답을 다른 방식으로 반복하면서 10절의 언어를 다시 사용하여, 구약 성경의 전례에 호소한 직접적인 대답이 주어집니다. 11~12절의 대답에서 첫 번째 부분이 각각 천국의 비밀을 깨달을 수 있는 사람들의 특권을 강조했다면, 두 번째 부분은 각각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강조합니다. 이사야 6:9로 요약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무지” 또는 “이해하지 못함”을 또다시 언급합니다. 이 논리는 14~15절에서 확장됩니다.
이사야 6장 9-10절에 나타난 이사야의 선포는 히브리어 본문이 말하는 대로 그들이 메시지를 깨닫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치유를 받지 못할 것이라는 분명한 생각으로 백성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 절 하반절은 이사야 6장 9절의 보고 듣는 것에 관한 역설적 구절에 초점을 맞추어 본문을 요약하되, 역순으로 제시되었지만 10절 대칭 구조의 후반부 순서를 반영하여, 이사야 본문 9절과 10절에서 반복될 뿐 아니라 이곳 18-23절에서도 핵심 역할을 하는 “깨닫다”라는 중요한 동사를 덧붙입니다.
마태는 마가나 누가복음(“~하기 위하여”라는 접속사를 사용합니다)과는 달리 “~때문에, 왜냐하면”의 뜻을 가진 접속사를 사용하며, 마가복음에 있는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를 빼어, 이사야의 어투를 다소 순화시킴으로써, 비유를 사용하는 원래의 의도 대신 백성의 완악함에 대한 반응처럼 제시되어 있습니다. 즉 외인에게 진리를 감추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깨닫지 못하는 자들을 계몽시키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혹자는 예수의 비유는 이스라엘 백성을 완고하게 만들거나 진리를 감추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그들이 완고하기 때문에 깨우칠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에 따르면, 마태는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의 책임성을 강조하고 예수께서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해명하는 설명이 됩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는 청중을 내부자와 외부자로 구분한다는 것과, 14-15절에서 이사야 6장 9-10절을 그대로 인용하심으으로써 13절의 요약을 통해 간략히 암시된 내용 즉 백성이 깨닫지 못함으로 회개를 통해 치유함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비유의 의도와 그 결과는 하나의 분명한 사실, 외인이 깨달을 희망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깨닫는 복이 허락된 것은 제자들뿐입니다(16-17절). 사람들은 자신의 수용 능력에 따라 혹자는 통찰력으로 혹자는 우둔함으로 반응할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이 의도하신 방식입니다. 외인이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은 가능하며 비유는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보지 못하는 자를 보게 하고 듣지 못하는 자를 듣게 하는 과정에 기여하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천국의 비밀을 감추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드러내려고 오셨습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이기에(1:21) 그의 비유는 하나님의 뜻을 듣지 않고 이해하지 못하는 백성을 위해 쉬운 도구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비유는 또한 백성의 완악한 상태를 드러내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거룩한 것과 진주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7:6) 예수의 비유를 듣고 배척하거나 무관심으로 등을 돌려 버립니다. 반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눈과 귀가 막혀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 됩니다. 예를 들어, 11~12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보여 준 부정적이고 적대적인 반응처럼, 메시아의 복음과 구원 사역을 거부한 믿음 없는 자들은 여러 비유를 듣고도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비유를 이해하지 못한 책임은 예수가 아니라 무리에게 있습니다.
14절,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마태는 인용한 본문을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으로 명시하면서 원 문맥에 있는 선지자적 심판이라는 주제를 사용합니다. 예수는 이사야 6:9~10(70인역)을 “인용”함으로써 13절의 내용을 확대하고 강화해서 이스라엘이 믿는 것에 실패한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이사야 6:9~10은 마음의 완악함과 심판을 표현하기 위해 구약과 신약 본문에 여러 차례 사용된 본문입니다. 예수는 선지자 이사야처럼(그리고 예레미야와 에스겔처럼) 선지자로서 이사야 6:9~10에 있는 마음의 완악함을 자신의 사역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십니다. 말하자면, 이사야 6:9~10은 예수의 사역에서 비로소 성취된 본문이 아니라 역사에서 여러 번 성취된 것이며 예수의 말씀과 사역에서 성취의 절정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듣지 않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강한 어조로 경고하며, 마음의 완악함을 표현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는 여전히 듣고 따르는 사람들을 기대하면서 찾습니다.
이사야 6장 9절의 70인역에서, “듣기는 들어도”(와 “보기는 보아도”)는 “계속해서 들어도” 또는 “최선을 다해 들어도”라는 뜻이 적합합니다. 그래서 이사야의 말씀은 결국 예언이 되게 하여, “백성은 이미 둔한 자들이기 때문에 너의 메시지는 그들을 깨닫지 못한 상태로 남겨 둘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오해할 수 있는 해석, “백성으로 하여금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이 선지자의 일이라”는 불편한 논리를 피하게 합니다.
마태복음 11-12장과 전체에서 천국의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의 태도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은 하나님이 이사야 선지자에게 주신 약속과 연결되며, 그들이 거부당하는 것은 이사야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뜻과 일치합니다. 이스라엘은 무디어졌고 진정으로 듣기를 거부했고 귀를 닫아 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은 깨닫지 않으려고 귀와 눈을 닫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비유를 전하셔도 그것을 경고의 메시지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귀와 눈이 완악한 그들에게 비유는 그저 비유일 뿐이었습니다.
15절,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다시 풀이하면, “왜냐하면 백성의 마음이 무디어졌으며, 그들의 귀로는 듣기 어려웠고 그들이 자신들의 눈을 감아 버렸기 때문인데,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돌이키지 못하게 함이다. 그러나 내가 그들을 고칠 것이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한 이유는 마음이 무디어진 것, 청각의 문제, 시각의 문제에 있습니다. 듣는 것과 보는 것의 문제는 반복되고 있지만 15절에는 마음의 문제가 덧붙여집니다. “깨닫다”라는 동사가 14절에서는 “듣는 것”과 연결되었는데 15절에서는 “마음”과 연결됩니다. “완악하다”는 “무디다” 또는 “둔감하다”의 뜻을 가집니다. 이 단어는 이사야 6:10의 인용으로(“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언제나 수동태로 쓰이며 “비만해지다”, “우둔하게 되다”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의 말씀은, “나는 명확한 가르침이 아니라 그들에게 비유로 말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디어졌기 때문이다 … 비유가 그들의 무디어짐을 촉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무디어진 상태로 내버려 둔다. 그래서 사람이 이미 가지고 있던 것도 잃게 만들어 버린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헬라어 다른 사본에서는,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고, 돌이키지 못하게 함이라(앞 네 동사는 모두 가정법 과거 3인칭 복수), 그러나 내가 그들을 고칠 것이다(직설법 1인칭 단수).”입니다. 그러니까 무리의 상태가 비록 네 가지로 드러나게 될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버려두거나 포기하지 않고 고치실 것이라는 논리가 됩니다. 비유를 통해서 무리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돌이키지 못하는 상태가 될 것입니다. 잘못의 책임은 그들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완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고 치유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14-15절을 무리 전체를 포기하는 본문으로 이해하는 것은 과도한 해석이며, 예수는 계속해서 그들과 접촉하시고 치유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16-17절,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16~17절은 11절에 이어서 제자들의 특권을 강조하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맡은 이사야 선지자는 마음이 굳은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되, 이스라엘이 무너져 포로로 끌려가는 순간까지 사명을 수행하며 그 가운데서도 그루터기는 남았던 것처럼(사 6:13), 예수의 메시지를 거부한 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제자들은 복됩니다. 이사야의 시대에 일어난 것과 같이 모든 유대인들이 천국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적은 무리만 받아들입니다.
제자들에게 있는 들을 귀와 볼 수 있는 눈은 예수에 대한 반응인데, 듣는 것은 깨닫는 것이며 신중한 태도입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비유로 가르치실 때 신중하게 들었고 비유의 의미를 알기 원했기에, 그들은 긍정적으로 반응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서 깨닫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한 사람의 이해가 보는 것과 듣는 것에 기초해서 성장하는 것처럼, 예수의 행위를 보고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서 그들의 이해가 자랍니다.
제자들이 예수와 함께 있으면서 천국의 사역을 눈으로 보고 그의 가르침을 듣고 그 의미를 예수의 설명으로 파악한 것은 큰 복입니다.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제자들은 하나님의 종들이 보기를 바랐던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제자들은 당시의 무리와 대조되는 동시에 이전 조상들과도 대조됩니다. 제자들은 선지자들과 의인들과 비교해도 복된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진리의 편에 섰던 선지자들과 의인들은 종말론적 회복의 날, 달리 말하면 예수께서 가져오신 천국의 도래를 기다렸지만 실제로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제자들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의인들과 연대감 가운데 있으며, 제자들로 대표되는 교회는 구약에서 선지자들과 의인들이 약속한 구원의 시대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사야 52:15은 적절한 배경입니다.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예를 들어, 제자들은 천국의 통치가 예수의 놀라운 행위로 실현되는 것을 본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