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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전적으로 성경 읽기
마태복음부터 처음 읽기/마 9:1-38

마 9:14-17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지만...

by pooh_in_the_Way 2021.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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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9:14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마9:1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마9: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마9: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이 단락은 4절에 불과한 짧은 분량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예수의 말씀으로 그 해석은 장대합니다. 두 차례에 걸쳐 수록합니다. 먼저 금식에 관한 논쟁만을 다루고, 예수가 논쟁의 뒤에 덧붙인 두 비유에 대한 해석은 다음 차례로 넘깁니다.

 

예수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로부터 금식에 관한 질문을 받습니다. 왜 금식하지 않느냐 라는 것입니다. 새삼스럽지만, 마태가 이 단락을 이곳에 배열한 까닭을 짐작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 있었던 예수와 제자들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 일과 맥락상 일치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마태는 ‘그때라는 부사어를 사용하여, 앞에서 이야기한 마태의 집에서의 식사와 여기  단락의 금식에 관한 논쟁 사이에 시간  이상의 관계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같은 날 연속적으로 일어난 사건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연결되지 않은 별개의 사건이되, 연이은 배치 의도가 연속성을 가진 사건으로 그립니다.   사건은 최소한 모두 금식일에 발생했을 가능성이 짙습니다(병행구절인 마가복음 2:18에는 “요한의 제자들과 바라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금식일에 제자들과 식사를 함께 하신 일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께서는 요한이나 바리새인들과는 대조적으로  제자들에게 금식일을 정기적으로 지키라고 가르치지 아니하는지 물을 만한 특별한 이유를 가지게 하였습니다.

 

예수 시대의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역사에 남을 만한 큰 슬픔의 순간들을 기억하며 다양한 금식일을 지켰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마태가 강조하듯이, 매우 “자주”(한글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습니다) 금식을 하곤 했습니다. 이와 같은 금식은 구약 율법에서 정해 놓은 단 하나의 정규적인 금식인 속죄일의 금식(레위기 16:29-31) 외에 포로기 이후 예루살렘 성이 멸망한 날에 공식적으로 행하는 금식(스가랴 8:19,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넷째 달의 금식과 다섯째 달의 금식과 일곱째 달의 금식과 열째 달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들이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리와 화평을 사랑할지니라”)과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 행하는 전민족적 금식(에스더 9:31)과는 차원을 달리했습니다. 구약의 정해진 유형보다는 개인적인 선택을 반영하고 있는데, 특히 바리새인들에게는 더욱 심하여 이레에 두 번씩 하는 금식은 상례적인 것이었습니다. 세례 요한과 그의 제자들도 금욕적인 생활 방식을 택하였습니다. 

 

예수의 대답은 그들의 금식을 묵살하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대답은 제자들이 금식하기에 적정한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임박한 종말론적인 심판에 대비하여 극도의 금욕주의적인 태도를 취하였지만, 이제 예수가 선포한 바와 같이,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고,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서 오는 기쁨을 파격적으로 표출시키곤 하였던 예수의 입장은 그들과 심한 대조를 이룬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자기와 제자들의 관계를 마치 자신은 신랑이 되시고 제자들은 손님의 입장이 된 한 혼인식에서의 행동에 비유하였습니다. 손님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문자적으로 ‘신부방의 아이들이란 뜻인데이는 신랑의 혼인예식 초대를 받은 친구들로서이들이  혼인을  치룰  있도록   있는  모든 일을 하는 자들(들러리들)이었습니다. 신랑의 친구들은 신부를 신랑에게 인도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예수는 신랑과 잔치에  신랑의 친구들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하여메시아의 도래와 관련된 환희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혼인 이미지는 새로운 시작이라는 의미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세워지는 새로운 관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새로운 상황이 야기한 기쁨과 들뜬 분위기는  혼인 잔치에 참석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스가랴서에서 예언한 바,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들이 되리니"와 같습니다. 이러한 이미지는 마태복음의 22 혼인 잔치 비유에서, 25 신랑을 맞는  처녀 비유에서도 매우 뚜렷하게 부각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더이상 금식을 계속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원리상, 그들의 구원이 예수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들이 금식을 계속한다면, 그들은 마치 혼인집 손님이 울고 있는 것 같은, 누가 보아도 모순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도 역시 이 축제의 시간이 중단될 것임을, 다시 말해 신랑이 빼앗길 때가 있을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이 구절을 예수 자신의 수난에 대한 예고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장차 그분이 겪으시게 될 갑작스러운 죽음이 처음으로 암시된 구절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때가 되면 제자들은 예수가 고난 받고, 죽임 당하고 마침내 떠나게 됨을 인하여 마땅히 금식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부활절 이후의 교회에서도 성 금요일(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날)을 기념하여 금식하였다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마태의 의도가 있었다고 봅니다. "그날에"에 대한 이런 해석을 보다 일반적으로 적용하여, 이 일들 후에 또 다른 변화가 일어날 것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바로 예수의 사역이 불러일으킨 즉각적인 흥분이 좀더 정착된 제자도의 형태로 대체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금식이 고유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의 사역을 넘어 다가오는 교회의 시대를 바라보는 이런 연속성을 띤 어조는 마태복음 내내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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