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9:14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마9:1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마9: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마9: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예수는 여기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와 제자들을 옛 틀 안에 남아있게 하려고 강요하였기 때문에, 한 원칙을 말씀하였던 것이고, 그 원칙의 충분한 의미는 미래에 가서야 분명해질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사역을 통해, 그리고 그 안에서 새롭게 드러난 하나님 나라의 실재로 인하여 금식이라는 종교 관행의 확고부동한 위치가 흔들리게 되었다면, 실제로 예수의 임재와 그가 전한 메시지를 통해 드러난 새로운 현실은 기존의 종교적 관행이나 행동 양식과 어떻게 결합되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갖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는 구조상 밀접하게 병행을 이루는 두 가지 비유를 줍니다.
“새 것”을 “낡은 것”에 단순히 첨가하거나 포함시키는 일의 부당성을 생생하게 설명해 주십니다. 이 비유의 근본 취지는 매우 분명합니다. 즉 “새 것”과 “낡은 것”이 단순히 융합될 경우에는 최악의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옛것의 한계 내에 새것을 담으려고 시도하는 것이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예가 낡은 옷에 한 조각의 탱탱한 새 헝겁을 깁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생베 조각”은 천을 다듬는 장인이 천연 지방질과 고무질을 제거하기 위해 아직 세정하고 빗질하지 않은 천, 곧 의복을 만드는 데 사용되게끔 표백해 두는 과정을 아직 거치지 않은 천을 말합니다. 그 천은 줄어듦의 방지를 위한 과정을 아직 거치지 않았으며, 축융 과정을 거치지 않은 그런 천은 세척 후에 줄어들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낡은(그래서 이미 충분히 줄어든) 옷에 덧대었을 때는 난감한 결과를 불러 일으키게 됩니다. 이런 일은 쓸모 없는 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조금만 잡아 당겨도 그 낡은 옷을 당기어 그 해어짐이 더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예화도 마찬가지입니다. 낡은 가죽 부대는 새 술의 힘을 견딜 수 없습니다. 여기서도 낡은 부대에 새 술을 담그면, 그 부대와 그 술 모두를 버리게 될 것입니다. “가죽 부대”는 가죽으로 만들어졌는데, 처음에는 부드럽고 유연하지만 계속 사용하다 보면 삭고 쉽게 부서지게 됩니다. 포도주를 만드는 과정에서 발효의 첫 단계는 양조용 통에서 진행되지만, 찌꺼기를 거른 다음에는 발효 과정을 완료하기 위해 항아리나 부대에 포도주를 넣어둡니다. 그러니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으면 발효로 생긴 압력 때문에 터져 버리기 쉽습니다.
이제 예수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여야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새 포도주는(그리고 생베 조각은) 분명히 예수의 가르침을 나타내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마주 대하고 있는 자들의 종교적 경험 안으로 들어오는 새로운 활력을 표현합니다. 이야기 맥락에서 보자면, 낡은 가죽 부대와 낡은 옷은 토라에 규정된 기존의 종교 관행이나 행동양식들입니다. 그것은 신학에서건(죄의 용서) 실천에서건(식탁 교제의 정결, 금식)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의 가르침으로 특별하게 대표됩니다. 이런 제한들로 계속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에게 도전하겠지만, 이러한 시도들은 이미 쓸데없음이 입증되었고, 그를 따르는 자들은 그런 시도들을 깨고 나올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예수가 이 두 예화에서 보이신 교훈의 요지는 사람이 구약의 형식에 남아있으면 예수가 오심으로 말미암아 도래한 새 시대를 경험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구약의 형식 안에서는 새 것과 옛 것 모두가 각각의 특성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가 구약의 형식을 무시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예수는 구약의 형식은 그것의 때가 있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더욱이 새 것과 옛 것의 차이점을 논할 때에, 그릇되게 대조시켜서는 안됩니다.
예수는 새 시대가, 그 시대를 몹시 기다려온 자들에게 가져다 줄 그 기쁨과 구원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새 시대에 사는 사람은 모든 외부적인 제약에서 자유롭게 됨을 뜻하지는 않습니다(마태복음 5:17-20). 오히려 새 시대의 제약은 구약의 그것에 비하여 단지 그 성격을 달리 할 뿐임을 뜻합니다. 이 시대의 제약들이 구약의 의식들로 표현될 수 없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이 점을 배워야만 했습니다. 그들의 지도자인 세례 요한은, 예수보다 앞에 가는 자로서, 그들을 성취 시기의 문턱에만 데려다 주었을 뿐입니다.(마태복음 11:11)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실재는 오로지 순종만을 요구하는 전통적인 체제 속에 갇히기에는 너무나도 역동성이 강합니다. 아마도 마태가 속한 유대계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이 둘을 결합시키려는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이 펼쳐 보이는 새로운 현실은 “새 부대”, 즉 토라의 참된 의미와 의도를 권위 있게 해석하신 예수의 윤리적인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행동양식을 요구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태의 특별한 관심과 독특한 관점(마가에 비할 경우, 보수주의적인 성향)을 발견하게 됩니다.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는 말씀에서 “둘”은,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실재, 즉 “새 포도주”와 예수께서 새롭게 해석하신 율법에 대한 성실한 준수, 즉 “새 부대"를 의미합니다. 마태는 복음과 율법이 교회 안에서 하나로 융합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율법에 대한 순종과 그 해석은 어디까지나 예수의 권위 있는 가르침이 표준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복음을 유대교의 가르침에 덧붙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이자 유일한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는(마태복음 23:8-12),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과 마찬가지로(13:52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바로 이러한 점에서 다른 스승들보다 탁월합니다. 예수께서 실현하신 새로운 시대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새롭게 이해하고 따를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차원의 순종은 예수의 독특한 신원과 사명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덧붙이자면, 산상수훈에서도 줄곧 강조해 온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이 전제되지 않고는 진정한 신앙행위가 수행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금식이라든가 구제라든가, 이런 종교적인 행위가 늘 있어 왔고 주님도 그것을 뒤엎어 버리실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행위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이어 받기 전에는 제대로 수행될 수 없는 것이 인류의 지금의 형편이다고 지적하시고 이 일을 가능케 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오셨다는 것을 각별히 부여하신 것입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담을 수 없다! 진정한 신앙을 진정한 신자가 되지 않고서는 행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신자가 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 말고는 다른 방법으로는 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는 이 일이 있어야 우리는 그를 믿고, 그의 십자가 사역을 근거로 해서,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고 비로소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서 의와 진리를 행하고 거룩을 행하고 생명에 줄을 서고 영원에 근거한 일들을 비로소 수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