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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부터 처음 읽기/마 9:1-38

마 9:1-8 중풍병자를 고치시다

by pooh_in_the_Way 2021.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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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9:1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마9: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마9:3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마9:4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마9:5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마9: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마9:7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마9:8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예수는 ‘그의 본 동네’ 가버나움으로 되돌아 옵니다. 그의 돌아온 소식을 듣고 그에게 몰려온 많은 군중들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 때에 몇 사람들이 누워있는 한 중풍병자를 예수께 데려왔습니다. 예수는 중풍병자와 그를 데려온 자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여기서의 믿음은, 마 8:5-13에서 백부장의 '믿음', 그리고 대조적이지만, 마 8:23-27 제자들의 '믿음'이 작음에 대한 책망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외형상으로 예수께 나아가려는 노력이 치유와 구원을 위한 말없는 간청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 예수의 도움을 얻고자 애쓰는 치유의 이적에서 분명히 존재하는 신뢰 혹은 태도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이제 좀더 광범위하고 기독론적으로 예수에 관한 선포를 믿는 참된 신앙으로 가야 합니다. 이 구절은 예수에 대한 선포를 듣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는 믿음의 기초를 제공하고 그 믿음을 해명해 주게 될 것입니다. 

 

명사(믿음) 혹은 동사(믿는다)가 치유 기사에서 그리고 자연에 대한 이적 기사에서 사용됩니다. 그것은 항상 인간적인 장애나 제한을 극복하고 사회적인 경계를 넘어서게 하거나 인간의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행동을 내포합니다. 각각의 경우에서 믿음은 어떤 특정한 기독론적인 내용보다 예수의 도움을 받아들이기 위해 취해진 행동들 가운데서 발견됩니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에게 이르시기를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는 병을 고쳐주시는 대신에 먼저 죄를 사해주셨는데, 이 죄 사함은 이제까지의 치유 이적에서는 한 번도 주시지 않았던 일이었습니다. 거기 있던 서기관들이 예수의 행동에 대하여 반발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자기 스스로를 하나님인 것처럼 말씀하고 계신 것이라고 제대로 알아차리고서, 하나님만이 죄를 사할 권세가 있기에, 지금 예수가 신성을 모독한다고 수군거렸습니다. 당시의 율법학자인 서기관들로서는 특히 하나님의 절대성에 대하여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비록 아직은 예수를 공개적으로 논박할 준비가 갖추어지지 않았다고 판단한 서기관들이 “속으로” 수군거렸지만, 예수는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그들의 생각을 알아 보았습니다. 수사학적인 질문을 통해 어찌하여 “악한 생각을 하느냐"고 책망하였습니다.

 

조금 다른 해석도 가능합니다. 랍비 훈련을 받지 않았을 뿐더러 제사장 자격도 없는 사람이 한 개인의 집에서 했던 이 놀라운 죄 사함의 선언이 충격적인 까닭은, 부분적으로는 예수는 일반적으로 성전을 통해 주어지던 것을 자신이 주려고하셨기 때문이지만 부분적으로는 그분이 ‘죄 사함(용서)’, 즉 놀라운 해방이 실제로 도래했다고 말씀하시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제 장차 부패하고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과 논쟁에서 드러나겠지만, 그들에 의해 강도의 굴혈이 된 성전, 그리고 부정한 자들이나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에게 그 문턱이 너무 높았습니다. 이와 같은 소외된 계층에게 성전과 제사제도는 오히려 장애물에 불과하였고 예수마저도 이 울타리를 부순다는 이유로서 축출될 것입니다. 결국 예수를 축출할 모의가 조금씩 시작됩니다. 서기관과 제사장 계급이 함께 공모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가 체포되고 고발된 이유가 바로 이 성전 모독으로 포장된 신성 모독 문제입니다. 

 

틀림없이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이름과 명예를 지켜드리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예수는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서, 그들과 논쟁하심으로 예수께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으심을 증거하기 위하여 그들의 마음을 폭로하셨습니다. 하지만 마태의 관점에서는 예수께 대한 반항은, 예수 안에 하나님의 현존과 능력이 임재하기에, 곧 하나님께 대한 반항이었고, 이 단락에서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예수께 대한 서기관들의 악의가 결국에는 그분을 죽음으로 몰고 가게 될 터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다고 떠벌릴 허풍선이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일을 통해서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을 입증하리라고 결심하셨습니다. 아마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인 이렇게 말하는 것이, “일어나 걸어가라”,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적적인 치유인 그렇게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쉬운 일이라는 데 대하여는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는 그 사람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말하는 것도 똑같이 어렵지 않은지를 물으셨습니다. 말로서 중풍병자를 고치는 일이란 죄를 용서하는 것만큼 사람의 능력 밖의 일입니다.

 

예수는 병자를 고치심으로써,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으심”을 증명하려 하셨습니다. 이 말이 이 단락의 참된 취지입니다. 예수는 의미심장한 이름인 ‘인자’를 사용하셨습니다. 이 칭호는 예수의 감추어진 지고의 권위의 모든 비밀을 담고 있습니다. 인자로서, 예수의 권세는 외견상으로 보아서는 지상에서 일반 사람의 그것보다 그리 커 보이지 않습니다. 이 점이 심지어는 부인하기까지 할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는 인자이신 동시에 하나님께로부터 이미 절대적인 권위와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모든 권세를 받으신 분이셨습니다(단 7:14). 예수는 그 중풍병자에게 기적적으로 치유케 하는 말씀을 선언하심으로써, 그의 권세가 땅의 그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절대적인 권세요, 죄도 사하실 수 있는 권세임을 나타내 보이시려고 하셨습니다.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신 목적은, 이 문장에 연결된 목적절,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에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 복음서에서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어 온 예수의 권세, 이미 “산상설교”에서는 말씀을 통해 드러났고(7:29) 8장에서부터는 치유 이야기들에서는 예수의 행적을 통해 드러난(8:9) 권세는 이 복음서 말미에 이르기까지 줄곧 중요한 주제로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10:1; 21:23-27; 28:18). “세상에서”라는 문구는 “마지막 때”가 이르기 전, 지금 이 세상을 가리킵니다. “인자”라는 칭호는 8:20에 이어 두 번째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칭호를 단순히 “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만은 없습니다.

 

예수는 그 칭호를 서술적으로(예컨대, “나는 인자라.”) 사용하신 경우는 한 번도 없고 항상 주어 또는 목적어로 사용하십니다. 예수가 이러한 칭호로 불리신 적도 한 번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예수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삼인칭으로 그것을 사용한 예도 없습니다. ‘인자’(son of man)라는 문구 그 자체는 단순히 ‘사람’(man)을 의미합니다. 히브라어와 아람어의 사용례에서 ‘~의 아들’이란 말은 종종 어떤 특질(자격)을 지시하기 위하여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외국인의 아들’(son of a foreigner)은 단순히 ‘외국인’(foreigner)을 의미합니다(출 12:43, NASB). ‘사람의 아들’(son of man, 인자)은 ‘사람’을 의미합니다(시 8:4).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이란 어구 그 자체는 아무런 문제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가 자신에 대한 이름으로 그것을 종종 사용하셨다는 것이며 더욱이 그가 자신을 특별히 '그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 언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단순히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한 예수님의 주장은 사람, 즉 일반적인 사람 또는 인류에 관한 주장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종종 그런 식으로 예수님의 주장을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마 8:20에서와 같이).

 

그런데, 인자가 세상에서 죄 사하는 권능을 가졌다고 말하고 이적을 행한 여기 이 단락에서, 역시 사람들은 별 구별 없이 듣고 이해하였겠지만(마 9:8), 예수의 의도는 일전에 이미 그 이름으로 명명되었던 사람으로 규정하여, 다니엘 7:13의 ‘한 인자 같은 이’와 연결시켜 말씀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다니엘서에서는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이신 불타는 보좌에 앉은 대재판장에게 나아오는 어떤 묵시적인 인물을 가리킵니다. 그는 온 세상을 포괄하는 영원한 권세를 그에게서 받았습니다. 마태복음 26:64에는 예수께서 자신을 인자로 명명함으로써 다니엘 7:13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 분명하여집니다(마 24:30; 28:18 역시). 또한 다니엘 7:9-14을 연상할 만한 용어로 인자를 언급하며, 그를 메시아라고 지명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는 여러 다른 곳에서도, 특히 누가복음 4:18, 19의 경우에서, 메시아에 관한 구약의 예언을 은근한 방법으로 자신에게 적용하셨습니다. 한편 ‘인자’라는 명칭은 예수님의 지고의 메시아직에 대한 암시를 줄 기회를 제공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 그것을 사람들의 무지와 불신앙 때문에 그의 정체를 은폐하는 역할도 했던 것입니다. 그 명칭에 대한 완전한 의미와 그의 온전한 자기 제시를 드러내는 것은 나중에 가서야 비로소 이루어졌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사역 마지막에 가서야 그 명칭을 다니엘 7:13에서 취한 것이라고 계시하셨다고 이해한다면 이 문제를 정확하게 해석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께서는 ‘인자’라는 칭호를 채용하여 그의 메시아적 엄위와 영광을 은근히 제시하셨던 것입니다. 다니엘 7:13에는 인자가 보좌에 앉으신, 옛적부터 계신 자에게서 영원히 쇠하지 아니하는 우주적인 나라를 받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사람으로서 그의 높으신 메시아직을 수행하셔야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역이 진행되어감에 따라 ‘인자’라는 명칭이 그의 고난과 낮아지심을 언급하는 것이 더욱 확연해집니다. 그 명칭에 대한 이러한 의미는 다니엘 7:13에는 들어 있지 않습니다. 다니엘 7:13 말씀에서는 메시아의 고난은 아직 부각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예언 성취에는 구약의 메시아 소망에 대한 모든 다양한 줄기들이 집약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다니엘서의 인자의 영광과 이사야의 여호와의 고난받는 종의 낮아지심을 모두 갖추어 ‘인자’라는 칭호가 상상을 초월하는 깊은 것임을 밝히셨습니다.

 

이 두 가지 사실 모두(인자의 영광과 여호와의 고난받는 종의 낮아지심) 예수님의 ‘인자’ 주장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 이 두 극단 사이의 엄중한 긴장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단락 8절에 기록된 군중들의 반응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그들이 이 칭호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인자”라는 칭호가 다니엘 7:13-14에 기록된 인물을 가리키고 그 인물의 등장으로 인해 “마지막 때”의 축복이 내려지기 시작했다면, 그가 이 세상에서 자신이 행할 본질적인 사역의 일부로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줄 권세를 갖는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못 될 것입니다. 실제로 중풍병자가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예수는 그에게 일어나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의 명령에 대하여 중풍병자는 순종합니다. 그러나 그의 반응은 예수를 따르는 길에 대한 마태의 일반적인 입장과도 일맥상통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기적이 일어났을 때, 무리(군중들)는 이 초자연적이고 거룩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을 먼저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 중풍병자가 참으로 큰 복을 받은 것을 보고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6절에 있는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라는 예수의 말씀의 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런 권능’이란 예수의 병 고치는 권세는 물론 이러한 권세로 입증된, 죄를 사하는 권세도 가리킴이 분명합니다만, 사람들은 예수 자신에 대해서는 여전히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은 인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사람’('인자'라는 용어의 유대적 사용 관례에 따른, 사람을 스스로 낮추어 일컫는 말)에게 적용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권세와 위대함이 모든 인간의 한계를 뛰어나신다는 사실을 깨닫기보다는, 자신들이 인간으로서 고귀해지고 우쭐해짐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런 것 때문에 이들은 이 이적의 진정한 의미를 놓쳐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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