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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복음주의 진영에서 빈곤과 전쟁 같은 심각한 사회적·정치적 문제들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대표적 지성 가운데 한 사람인 짐 월리스(Jim Wallis)가 그의 저서 《하나님 편에서 서라》에서 주장하는 정의, 공의, 그리고 사회 정의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다만 그의 글이 주로 미국이라는 정치적 · 사회적 지형에서의 성경적 해석을 통한 사회 정의를 기술하기에, 그의 글을 부분적으로 발췌하고 정리하여 배열할 뿐입니다.
12장, <잘못을 바로잡으라>에서 인용합니다.
최근 ‘사회 정의’라는 용어가 특히 우파 진영의 언론인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 왜 그들은 이토록 사회 정의를 두려워하는 것일까? 왜 그들은 정의에 대한 성경의 명령을 특히 두려워하는 것일까? 그 명령이 자선만을 촉구하는 그들의 입장을 부적절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일까? 성경이 매우 분명히 말하고 있듯이 정의는 반드시 ‘사회적’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우파 성향의 토크쇼 진행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단순히 정치나 정부의 크기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성경이 정말로 관심을 기울이는 바는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이다.
사회 정의에 대한 두려움
(미국에서) 사회 정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대단히 논쟁적인 일이다. 이 문제는 정치적인 것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정의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사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받는다. 일부에서는 정의를 옹호하는 것 곧 ‘큰 정부’를 믿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분명한 사실은, 이 사회의 몇몇 사람들―언론의 정치 평론가와 일부 정치 지도자, 심지어는 교회 지도자들까지도ᅳ은 사회 정의를 두려워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우리가 자선에―자선에만ᅳ초점을 맞추기 원한다. 그들은 자선을 좋아한다. 모두가 자선을 좋아한다. 그저 최선을 다해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라. 그러나 정의, 이 말은 몇몇 사람을 두렵게 만든다.
긍휼은 실로 놀랍고 강력하다. 우리는 긍휼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동참하고, 긍휼을 통해 세상의 문제를 더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한다. 긍휼은 종종 정의로 나아가는 관문이 되기도 한다.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세상의 문제로 고통당하는 이들을 위해 일할 때, 우리는 왜 세상이 잘못되었으며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지 알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정의를 성경적으로 이해해야 할까?
성경적 정의는 사회주의와는 상관이 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사회주의가 정부에 너무 많은 소유권과 권력을 부여하는 체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성경의 정의는 공산주의와도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체제 아래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적 정의는 ‘큰 정부’와도 상관이 없다.
다른 모든 나라들의 군사비 지출을 다 합친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군비 예산이나 잘못된 전쟁에 들이는 수십조 달러의 돈, 수십억 달러의 기업 보조금, 급등하는 의료비에 대한 불필요한 초과 지출에서 정부 예산을 삭감하고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정부가 해야 할 일에만 집중한다면, 이상적인 정부는 현재의 정부보다 훨씬 더 작고 집중적인 정부가 될 것이다.
정의는 사실 이런 ‘주의’나 정치철학, 정부의 크기와는 무관하다.
성경적 정의와 공의
성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정의를 뜻하는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원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성경적 공의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축소되고 말았다. 히브리어에는 정의를 뜻하는 단어가 적어도 세 개가 있으며, 각각 미묘한 어감을 담고 있다. 「베이커 성경신학 사전」(Baker’s Evangelical Dictionary of Biblical Theology)에 따르면, 히브리어 체데크와 미쉬팟, 그리스어 디카이오쉬네가 다 성경에서 ‘정의’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이 용어의 의미에 관해서는 앞 장에서 이미 간략히 논한 바 있다.
‘정의’(justice)를 뜻하는 성경의 용어들은 ‘공의’(righteousness)를 뜻하는 용어들과 대체될 수 있으며 상관관계가 있다. ‘정의로운’ 것과 ‘옳은’ 것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정의’를 뜻하는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원어는 ‘공의’로 번역된 말과 같은 단어다. 흠정역(King James Version)과 미국표준개역판(American Standard Revised Version)에서 ‘정의’나 ‘공의’로 번역된 단어들이 이후의 번역본에서 ‘옳은(right)’이나 ‘공의로운’(righteous), ‘공의’(righteousness)로 바뀌었다.
두 단어가 본질적으로 동일한 개념을 나타낸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성경에서 ‘정의’와 ‘공의’는 깊이 연결되어 있다. 이 두 단어는 공정한 무게와 측량에서부터 공정한 법적 절차, 인간의 선한 행위, 정직함과 진실함, 개인의 옳고 정의로운 주장, 고용주의 경제적으로 공정한 행동, 재판관의 공정한 판결, 왕과 통치자의 통치적 책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황에 적용된다.
‘정의’의 분명한 의미는 ‘옳은 것’, ‘옳음’, ‘정의로운 것’, ‘정상적인 것’, ‘마땅히 그래야 하는 바’ 등이다. 법과 법의 공정성 아래서 사람들을 공평하고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는 생각은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다,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과 이방인, 채무자, 과부, 고아를 옹호하고 보호하는 분이다. 정의는 ‘구원’이 나 ‘승리’ ‘신원’(伸宽) ‘번영’―소수의 사람들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ᅳ을 뜻하기도 한다. 정의는 구속(救讀)이라는 하나님의 목적의 일부다.
정의를 뜻하는 가장 분명하고 통전적인 말 중 하나는 ‘정의’와 ‘평화’ 모두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샬롬’이다. 샬롬은 ‘온전함’, 즉 사람들의 행복과 안전에 기여하는 모든 것, 특히 깨어진 관계의 회복을 포함한다. 성경에서 정의와 평화라는 의미를 가장 잘 담고 있는 단어인 샬롬은 관계 회복을 뜻한다. 그러므로 정의란 깨어진 관계, 즉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및 구조와 체제와의 관계, 사법 제도, 돈과 경제, 땅과 자원, 왕과 통치자와의 관계를 바로잡는 것을 뜻한다.
샬롬은 우리의 모든 인간적, 사회적 관계, 심지어는 우리 사회가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에 관한 우리의 상상력에도 적용될 수 있는, 놀라울 정도로 창의적이며 광범위한 관념이다. 샬롬의 초점은 관계를 바로잡고 우리의 사회적 삶을 다시 건강하게 만드는 데 있다. 샬롬이라는 심오한 성경적 사상 때문에 정의는 언제나 사회적’이어야만 한다. 우리는 어떻게 단순한 보복이 아니라 ‘회복적 정의’를 우리의 사법 제도의 기초로 삼을 수 있는지를 상상해 볼 수 있다.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관계ᅳ불공정하고 불의하고 착취적인 관행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에도 샬롬의 사상을 적용할 수 있다. 경제 체제와 구조, 거래에 관해서도 그것이 선하고 건강한 관계에 기여하는지 그런 관계를 파괴하는지를 그 판단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더 나아가 정부가 문제를 무시하는지, 의존적인 태도를 조성하는지, 혹은 실제로 시민 사회 속에서 시민들 사이의 더 나은 관계를 촉진하는지를 기준으로 정부를 평가할 수 있다.
정의는 깨어진 관계ᅳ잘못된 것들ᅳ를 바로잡고 치유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다시 바르게 만드는 것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정의 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하나 님의 모든 피조물과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우리가 맡은 역할을 수행하는 것도 포함된다. 불의는 깨어진 관계ᅳ사람들과 제도, 피조물, 궁극적으로 창조주와의 깨어진 관계ᅳ를 뜻한다.
예배 행위로서의 정의
정의를 나타내는 성경의 말들은 모두 하나님의 정의와 공평하심,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 하나님의 축복과 치유와 관계가 있다. 그리고 분명히 정의는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 예배의 일부이기도 하다. 예언자 아모스의 말, 암 5:21-24은 예배와 정의의 관계를 가장 분명히 표현한 성경 구절 중 하나다. 이 본문은 이 둘이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예배가 정의ᅳ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위해 문제를 바로잡는 행위―와 분리되어 있을 때,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이 드리는 (몇몇 다른 번역본의 표현처럼) ‘시끄러운’ 예배를 “기뻐하지 않으신다.” 더 나아가 열광적인 예배는 불의한 세상 현실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할 수도 있으며, 그로 인해 우리는 그분이 만드신 세상과 그분의 모든 자녀들을 사랑하시는 정의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예배는 불의를 은폐하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종교 집회ᅳ아파르트헤이트 체제 하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이나 인종적으로 분리된 미국의 남부 혹은 북부에서 드리는 주일 예배 같은 집회―에서 모든 것이 다 괜찮다는 듯이 행동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예언자는 그런 거짓 예배가 하나님께는 ‘악취’와 같다고 말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의와 공의 사이에는 분명한 상관관계가 있다. 그 구성원들이 세상 속에서 공의를 실현하기 위해 날마다 노력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 예배 공동체를 받아들이지 않으실 것이다. 세상에서 공의와 정의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참된 예배의 행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간단히 말해 정의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이다. 정의는 깨어진 관계를 바로잡고 고치고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의를 행할 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며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예배는 참된 예배가 된다.
이것이 모든 사회를 바라볼 때 우리가 사용하는 정의의 렌즈가 되어야 한다. 즉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살펴보고 잘못을 어떻게 바로잡을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정의는 이만큼이나 기초적이다. 그리고 정의를 위해 노력함으로써, 우리는 정의의 하나님이신 성경의 하나님을 우리가 사랑하고 예배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정의를 위한 투쟁
정의를 위한 투쟁은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누군가가 인식할 때 시작된다. 우리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들,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들이 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믿을 때, 그것은 종종 새로운 사회 운동을 위한 출발점이 된다. 반면에 (젊은이들이)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닫지 못할 때, 아무것도 그들의 관심을 끌지 못할 때, 그들이 자신ᅳ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어떻게 느끼는지, 무엇을 먹거나 마시고 싶은지, 누구를 좋아하는지, 누가 자신을 좋아하는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일 때, 사회는 큰 어려움에 처한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그리스도인이고 자신 안에 갇혀 있을 때, 교회와 복음은 큰 어려움에 처한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의무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무엇이 잘못되었으며 불공정하고 잔인하고 불의한지를 인식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즉 어떤 깨어진 관계가 하나님의 자녀들과 하나님의 세상을 아프게 하는지, 무엇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알아야 한다.
예언자의 말
불의를 변화시키고 바로잡기 위해 우리는 세상의 체제와 논리에 맞서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다. 성경은 사랑의 하나님뿐만 아니라 정의의 하나님을 계시한다. 성경에는 ‘억압’과 ‘정의’ 같은 말이 가득하다. 가장 빈번하게 예언자들의 심판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왕과 통치자, 재판관, 고용주들―세상의 정부, 법원, 경제, 체제, 구조를 지배하는 부자와 권력자들, 세상의 논리를 좌지우지하는 사람들ᅳ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부당하게 대할 때 그것은 그저 불친절한 것이 아니라 그릇되고 불의한 것이며 하나님을 화나게 만든다고 성경은 말한다. 성경이 관심을 기울이는 대상은 언제나 과부와 고아들, 가난한 사람과 억압받는 사람들, 법원이나 파렴치한 고용주 때문에 피해를 입는 사람들, 빚을 탕감 받아야 할 채무자들, 환영받아야 할 이방인들이다. 그리고 권력자들에게 전하는 예언자의 메시지 주제는 땅과 노동, 자본, 사법적 판결, 고용주의 관행, 통치자의 명령, 권력자의 결정 같은 것들ᅳ정의와 정치와 관련된 모든 사안들ᅳ이다.
무언가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리고 심금을 울릴 때 변화를 위한 운동이 시작된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신앙적 양심을 일깨운다. 사람들은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관심을 갖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잘못을 바로잡을 방법을 모색한다. 이것이 바로 정의다. 그 누구도 당신에게 그것이 위험한 일이라고 말하지 못하게 하라. 정의는 불의에 대해서만, 체제와 구조를 현상 유지함으로써 이익을 얻는 사람들에게만 위험하다.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뀌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문제는 정치 제도나 철학, 정부의 크기가 아니다. 오히려 잘못된 상황의 근본 원인을 밝히고 문제의 핵심으로 들아가 그것을 다시 바로잡는 것이다. 그것은 태도와 문화, 제도, 체제와 구조, 정치와 법의 변화를 뜻한다.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정치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뜻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파적인 대의에 매일 필요는 없다. 그리고 가장 성공적인 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초당적인 지원을 끌어들여야 한다. 이런 운동이 실제로 잘못된 것을 바꾸고 바로잡는다. 이것이 바로 정의가 언제나 요구하는 바다. 지금은 새로운 세대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판단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필요한 일에 헌신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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