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 선언Evangelical Manifesto은 복음적 원리와 사명이 기독교 신앙에서 지니는 근본적 중요성을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특히 복음주의 운동 또는 복음주의에 속한 사람들에게 재천명하기 위해 2008년 5월 워싱턴 DC에서 발표되었다. ... 이 선언을 작성하고 서명한 사람들은 대부분 미국의 복음주의자였으나, 읽어 보면 누구나 알듯이 이 선언의 중요성은 일개 국가나 시대를 훌쩍 뛰어넘는다.
오늘날 복음적 원리와 사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의 큰 아이러니 앞에 봉착해 있다. 한편으로 복음주의자나 복음적이라는 말은 요즈음에는 대체로 비웃음을 사거나 무시된다. 문화적•정치적 때가 잔뜩 끼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아예 이 용어와 운동을 버리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래서 일부 아래와 같은 우려가 확산되어 이 선언의 배경으로 작용했다. 즉 “복음주의자”와 "복음적”이라는 말은 너무 중요해서 문화적•정치적 호칭과 혼동되도록 방치될 수 없으며, 따라서 그런 잘못된 인상을 불식시킬 명문화된 진술이 필요했다.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 신앙의 다른 전통들에 속한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이 이해하는 신앙에 복음적 원리를 재도입해야 한다는 인식이 점점 재고되고 있다. 따라서 그 중요성이 불가피해짐에 따라 “복음적 가톨릭 교회”, “복음적 정교회” 등에 대한 말이 나오고 있다.
이런 아이러니의 교훈은 명백하다. 복음적 원리와 사명은 기독교 신앙의 골자인 만큼 결코 버려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C. S. 루이스가 리처드 백스터 Richard Baxter를 따라 “순전한 기독교”라 부른 “명백한 핵심적 기독교”의 일부다. 그런데 이것은 본질상 신학 용어이므로 순전히 인간적인 운동과 혼동되어서는 안되며, 덧없는 한 세대의 정치적•문화적 때가 잔뜩 끼게 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그러므로 복음주의 선언은 “복음적” 기초의 영적 • 신학적 중요성을 재천명한다. 아울러 제대로만 이해한다면 그것이 불변의 원리와 사명이므로, 이로써 예수의 기쁜 소식을 이해하고 표현하며, 기독교 신앙을 실천하고, 세속화되고 부패한 교회를 개혁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의미심장하게도 개신교도(‘항의하는 사람’이라는 뜻, Protestant)라는 말은 반종교개혁 (종교개혁에 대항하여 일어난 가톨릭의 개혁 운동) 쪽에서 나쁜 뜻으로 지어낸 용어다. 사실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은 “개신교도”로 불리기 전에 “복음주의자”로 불렸다. 그들은 복음주의자로서 자신들이 어디로 돌아가려 하는지 천명했다. 1536년에 제네바 시의 총회가 베른 시처럼 종교개혁에 합류 하기로 결정할 때 표결한 것이 “복음대로 살자”는 것이었다. 일찍이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도 일상생활을 예수의 방식에 더 가깝게 살기로 결단한 뒤로 당대의 사람들에게 “복음적”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그보다 더 일찍 선지자 이사야도 “복음적 선지자”라는 정당한 평가를 받았다.
다시 말해 역사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갈수록 다른 명칭들로는 덜 충분해진다. 그런 명칭들은 어느 한 시대의 산물로 등장했으며, 예수 자신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역사가 개신교 이전부터 있었다는 가톨릭의 말은 옳다. 개신교란 어차피 시대의 제약을 받는 용어다. 그러나 역사는 가톨릭과 정교회 이전에도 있었으며, 그 두 명칭 또한 예수의 권위와 기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요컨대 기원을 종교개혁으로 보든 18세기의 제1차 대각성 운동으로 보든 복음주의 운동 자체는 비교적 근래에 나왔으며, 지금 이 운동은 여러 모로 핵심 원리를 잃을 위험에 처해 있다. 그런데 그 핵심 원리는 복음 자체와 동의어다. 그러므로 제대로만 이해한다면 복음적 원리와 사명을 대체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앞으로도 영영 대체되지 않을 것이고 대체될 수도 없다. 그것은 울창한 신앙의 거목에 들러붙은 기생목이 아니라 그 거목의 줄기와 수액 자체다.
이 땅에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다음의 진리를 분명히 이해하는 사람들도 늘 있을 것이다. 각 세대를 규정짓는 이슈가 무엇이든 간에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적 사고와 기독교적 생활방식을 정의할 때, 예수 자신이 내놓으신 최 고의 기준보다 더 권위적인 정의는 없다. 거기에는 그분이 선포하고 가르치고 예시하고 진척시키신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 그분이 지지하신 성경의 절대적 권위, 그분이 보내신 성령의 능력이 두루 포함된다. 그 외에는 무오한 권위가 없다. 모든 권위는 말씀과 성령의 절대적 최종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 다름 아닌 말씀 전체와 성령의 권위다.
성 아타나시우스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종교개혁이 있기 1천 년도 더 전에 살았지만, 이미 기독교 시대 전체를 재창조와 개혁의 시대로 보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은 무엇이었는가?” 아타나시우스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다름 아닌 “재창조”라고 썼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인류 안에 있는 자신의 형상을 새롭게 하시는 일 말고 또 무엇이겠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 시대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지는” 시대라고 썼다. 이들의 요지는 “지속적 개혁”의 원리와 아주 비슷하다. 다만 실제적인 면에서 종교개혁의 원리가 부정적인 면-교회는 반복되는 여러 가지 굴레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면, 아타나시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는 긍정적인 면-우리는 첫 창조 때처럼 예수 자신을 닮은 모습으로 변화되어 간다-에 강조점을 두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그 도전은 예수 자신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각자의 전통이 무엇이든 우리는 다 개인이면서 동시에 전 세계 교회의 일원이다. 예수를 따르는 우리의 목표는 존재와 사고와 행동에서 점점 더 예수를 닮은 모습으로 성장하고 빚어지는 것이다. 삶이 예수의 방식에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도 이 모험에 동참하도록 우리가 거리낌 없이 그들을 초대할 수 있다. 그 길에 우리 각 자의 자유와 섬김의 삶이 있고, 그 길에 인류의 소망인 개혁과 회복과 쇄신이 있다. 오늘날 “복음적 가톨릭 교회”와 “복음적 정교회”를 향한 적절하고 납득할 만한 부르심이 있을진대, “복음적 복음주의”를 향한 부르심도 그 못지않게 긴박하다. 예수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참으로 온전히 복음적이 될 때에만 우리는 함께 그분의 위대한 부르심에 합당해질 것이다.
복음주의 선언
복음주의 정체성과 공적 헌신에 대한 선언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의 이 시점을 그리고 지상의 동료 인간과 세계의 동료 그리스도인 앞에 닥친 중대한 도전들을 예리하게 인식하는 가운데, 우리는 기독교 신앙에서 세계 최대이자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운동 중 하나인 복음주의의 미국 지도자와 일원들로서 이 선언에 서명한다.
복음주의에는 최고 지도자나 공식 대변인이 없으므로 아무도 복음주의자 전원과 특히 자칭 복음주의자를 대변하지 않는다. 이 선언은 미국의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우리 자신의 입장이다. 우리가 감사하게 인식하고 있듯이 우리의 영적 뿌리와 역사적 뿌리는 이 나라 바깥에 있고, 동료 복음주의자의 절대 다수는 북반구가 아닌 남반구에 있으며, 근래에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복음주의자들이 새롭게 유입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훨씬 큰 세계적 운동의 작은 일부이며, 이 운동은 앞을 내다봄과 동시에 밖으로 뻗어 나가고 있다. 그들과 더불어 우리는 오늘의 세계에서 신앙에 충실하고 소명에 사려 깊게 임하기로 헌신했다.
이 선언의 취지는 두 가지다. 첫째, 오늘의 미국과 대부분의 서구 세계에서 복음주의라는 용어에 수반되는 혼란과 와전을 정리하는 것이다. 둘째, 공적 생활에서 복음주의자들로 하여금 반감이 들게 하는 이슈들에 대해 우리의 입장을 명확히 밝히는 것이다.
“좁은 길”을 따르는 우리는 대중에게 존중받고 인정받는 데 관심이 없다. 피해자 행세를 하거나 차별에 항의하는 일도 우리가 보기에 온당하거나 충실하지 못하다. 더욱이 우리는 세상 도처의 동료 신자들처럼 박해에 직면해 있지도 않다.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에게 닥친 문제라면 우리가 자초한 경우가 너무 많다. 항의한다면 그 항의는 먼저 우리 자신을 상대로 시작되어야 한다.
그보다 우려되는 사실은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둘러싼 혼란과 왜곡이 깊을 대로 깊어져 그 고유의 의미가 흐려지고 중요성이 상실되었다는 것이다. 이 운동 바깥의 많은 사람들이 복음주의가 과연 긍정적인 말인지 의심하고 있고, 내부에도 이 용어가 더 이상 유익한 목적에 부합하는지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의혹에 맞서 담대히 고백하거니와, 우리는 이제부터 밝히려는 본래 의미의 복음주의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 용어가 중요하다고 믿는 것은 거기에 담긴 진리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복음주의와 복음주의자를 제대로 이해하면 교회뿐 아니라 세상 전체에도 유익이 된다. 특히 지역 사회에서 가난하거나 취약하거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의 곤경에 유익이 된다.
우리의 입장과 그것이 중요한 이유
이 선언은 동료 신자들뿐 아니라 세상 전체를 향한 공적 선언이다. 우리의 정체성과 공적 입장을 고백하는 일이 중요함은 모든 종교와 이념의 사람들처럼 미국의 복음주의도 세계화 시대의 가장 큰 도전 중 하나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가장 깊은 견해 차이를 안고 살아가는 일이다. 이 도전이 특히 까다로워질 때는 그런 종교적•이념적 차이가 환원 불가능의 근본적 차이일 때 그리고 개인적 세계관의 차이만이 아니라 동일한 사회에 공존하는 생활방식 전체의 차이일 때다.
인간의 삶에서 종교가 차지하는 자리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인간은 의미와 소속을 추구하고 세상의 이치와 안전한 삶을 찾으려 하므로 이 추구보다 더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것은 없다. 이 추구에 양심의 자유라는 권리가 수반되면 저마다 다양한 신앙과 생활방식을 자유로이 선택하게 된다. 그중에는 종교적이고 초월적인 것도 있고 세속적이고 자연주의적인 것도 있다.
그러나 상이한 종교와 종파들이 삶에 대해 내놓는 답은 서로 크게 다르며, 이 차이는 개인에게만 아니라 사회와 전체 문명에도 결정적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가장 깊은 견해 차이를 안고 살아갈 줄 안다는 것은 개인과 국가에 공히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공적 생활에서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토론과 숙고와 결정은 중대하고도 불가피한 일이다. 독재적 강압이나 니체가 말한 종교 전쟁의 참변 등 다른 대안은 생각할 수 없다.
우리는 나사렛 예수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믿으며(요 14:6) 또한 그분을 따르는 이들에게 요구되는 큰 변화에는 철저히 새로운 인생관뿐 아니라 결정적으로 다른 생활방식, 사고방식, 행동양식이 수반됨을 믿는다.
우리의 취지는 동료 시민들과 동료 신자들 앞에 명백한 진술을 내놓는 것이다. 각자의 시각에 따라 그들은 우리의 친구, 방관자, 회의론자, 적 등일 수 있다. 우리가 말하는 복음주의란 어떤 의미인가? 공적 생활에서 동료 시민들과 더불어 그리고 오늘의 세계에서 동료 인간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복음주의자라는 신분은 어떤 의미인가? 지금부터 그것을 밝히고자 한다. 우리는 복음주의자의 주된 사명을 세 가지로 본다.
1 우리의 정체성을 재천명해야 한다
첫 번째 과제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재천명하는 일이다. 복음주의자는 자신과 자신의 신앙과 삶을 나사렛 예수의 기쁜 소식에 근거하여 규정하는 그리스도인이다(복음주의라는 말의 그리스 어 어원은 복음 곧 기쁜 소식이다). 예수의 복음이 온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기쁜 소식임을 믿기에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고백한다(롬 1:16). 오늘날 만연해 있는 오해와 달리 우리 복음주의자는 신학적으로 규정되어야 하며 정치적•사회적•문화적으로 규정되어서는 안된다
이런 고백의 배후에는 정체성이 개인 못지않게 단체에게도 강력하고 소중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진보적 관점의 전형적 자유도 정체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정체성을 이용한 정략은 매우 위험하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할 권리가 학계나 언론이나 여론에 있지 않고 우리 자신에게 있음을 강조한다. 우리의 정체성은 어느 누구도 아닌 우리가 말하는 대로다. 우리의 “본심”과 “의도”의 관점에서 우리를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를 우리는 거부한다.
이렇게 정의되고 이해되는 복음주의는 역사 속에서 기독교 교회 내에 출현한 훌륭한 전통들 중 하나다. 우리는 다른 주요 전통들의 핵심 원리를 십분 존중하며, 공통 관심사인 많은 윤리적•사회적 이슈에서 그들과 조화를 이루어 협력한다. 그들처럼 우리도 “바른 믿음과 바른 예배”에 있는 우선순위, 시대와 대륙과 문화를 초월하는 기독교 교회의 “보편성”, 삼위일체와 기독론처럼 초대 교회가 합의한 기독교의 핵심 교리 등에 전심으로 헌신되어 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우리는 다른 전통들과 중요하게 구별되는 복음주의의 신조를 고수한다. 이런 차이점을 고백하는 이유는, 우리가 보기에 그것이 성경적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 진리는 개신교의 종교개혁을 통해 회복되었고, 이후의 많은 부흥과 쇄신 운동을 통해 지켜졌으며, 하나님을 아는 확실한 구원의 지식에 반드시 필요하다. 요컨대 이런 소신은 예수의 기쁜 소식에 충실한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주의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고, 2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고전적이고 역사적인 의미에서 지극히 평범한 그리스도인이다. 복음주의자는 예수께서 사시고 가르치신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살기로 헌신되어 있으며, 세상을 위한 기쁜 소식과 진리를 누가 보기에도 제자답게 구현하려 한다. 우리 복음주의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치체스터의 리처드 Richard of Chichester의 표현이자 성경의 가르침대로 “그 분을 더 똑똑히 보고 더 극진히 사랑하며 더 가까이 따르려는” 열망과 헌신이다.
우리의 신앙과 삶을 예수의 기쁜 소식으로 규정한다는 이 복음주의의 원리를 우리는 우리만의 것으로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의 취지는 공격하거나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환기하고 재천명하여 결국에는 결집하고 개혁하는 것이다. 우리가 믿기로 이 원리는 예수의 방식을 따르려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결정적 사명이요 최고의 목표다.
아울러 공적 생활에서 우리는 대개 처음부터 복음주의자라는 이름을 쓰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인, 예수를 따르는 사람, “순전한 기독교”의 추종자다. 다만 신앙을 보는 우리의 관점과 실천방식의 핵심에 복음주의의 원리가 있다.
이것은 말로는 쉬워도 실제로 그렇게 살기는 만만치 않다. 복음주의자가 되어 우리의 신앙과 삶을 성경이 가르치는 예수의 기쁜 소식으로 규정하려면, 예수의 주되심에 그리고 그분이 제자들에게 요구하시는 진리와 생활방식에 우리의 삶을 완전히 바쳐야 한다. 그래야 그분을 닮아 가고, 그분이 가르치신 대로 살며, 그분이 믿으신 대로 믿을 수 있다. 지난 세월 이 비전을 추구하면서 복음주의자들이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긴 일정한 신조가 있다. 우리가 보기에 이는 예수의 메시지의 핵심이며 따라서 우리에게도 기초가 된다. 그중 특히 일곱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온전한 하나님이시며 또한 온전한 인간이 되셨다고 믿는다.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과 목적 자체가 예수를 통해 독특하고 확실하고 충분하게 계시되었다. 그분 외에는 다른 신이 없으며, 그분 외에는 사람이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도 없다.
둘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과 부활하신 삶을 통해 지금 행하고 계신 일만이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유일한 근거임을 믿는다. 그분은 인간의 죄와 불법을 드러내 그 방향을 되돌리셨고, 우리 죄의 형벌을 대신 당하셨고,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셨고, 악의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구속하셨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고, “위에서” 나는 자신의 생명으로 우리에게 능력을 입혀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에 우리의 공로는 전혀 없다.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은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그분의 구속을 받아들일 뿐이다.
셋째, 우리는 영적 중생을 통해 초자연적으로 주어지는 새 생명이 선물일 뿐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믿는다. 거기서 비롯되는 평생의 회심만이 우리의 성품과 생활방식이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유일한 길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충실하고 도덕적으로 온전하게 살아가려면, 이를 위한 충족한 능력은 오직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에만 있다.
넷째, 우리는 성경이 우리의 신앙과 실천의 최종 기준임을 믿는다. 예수께서 친히 성경 곧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말씀의 절대적 충실성과 지고한 권위를 가르치시고 그렇게 대하셨기 때문이다.
다섯째, 우리는 예수의 제자란 이 땅에 목숨이 붙어 있는 매 순간 삶의 모든 영역-성과 속, 공과 사, 말과 행동-에서 그 분을 주님으로 섬겨야 하고, 그분이 그러셨던 것처럼 잃은 영혼들에게는 물론이고 가난하고 병들고 굶주리고 압제당하고 멸시받는 사람들에게 늘 다가가야 하며, 창조 세계와 모든 피조물의 충실한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여섯째, 우리는 예수께서 친히 다시 오신다는 복된 소망이 우리가 하고 있는 일에 힘과 알맹이를 부여한다고 믿는다. 반대로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장차 우리가 갈 곳에 대한 희망의 징표가 된다. 양쪽이 협력하여 역사를 완성시키고,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임하는 영원한 나라를 실현한다.
일곱째, 우리는 예수를 따르는 모든 사람이 부르심에 충실하여 예배를 통해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고,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의 가족을 사랑하며, 제자도를 통해 그리스도를 닮아 가야 한다고 믿는다. 또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 의 필요를 채워 줌으로써 그분을 섬기고, 아직 그분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땅 끝과 종말의 날까지 그리스도를 전하여, 그들도 우리처럼 그분의 제자가 되어 그분의 방식대로 살도록 초대해야 한다고 믿는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삶이 그 고귀한 부르심에 거듭 부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죄의 교리를 사실로 예증할 때가 많음을 인정한다. 인류의 “삐딱한 성질”과 온갖 죄와 실패와 위선이 우리 복음주의자에게도 똑같이 있다. 이는 하나님께나 우리를 알고 지켜보는 이들에게나 비밀이 아니다.
우리를 규정하는 특성
복음주의를 그렇게 정의하고 나면 거기서 몇 가지 함축된 의미가 따라 나온다.
첫째, 복음주의가 품는 신조는 동시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다. 복음주의자는 세계 교회의 여러 위대한 공의회의 역사적 신경信經들에 표현된 그리고 개신교 종교개혁의 위대한 고백에 표현된 기독교 신앙을 온전히 고수하며, 대대로 전수되어 내려 온 그 신앙에 충실하려 애쓴다. 그러나 언제나 복음주의의 핵심은 진술된 신경, 소속된 기관, 가입된 운동 그 이상이다. 우리에게는 최고 지도자가 없으며 신경이나 전통도 결국 우리의 결정적 요인이 못 된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만이 우리의 궁극적 권위이며, 우리의 마땅한 반응은 전심을 다한 사랑과 신뢰와 순종이다.
둘째, 복음주의의 신앙과 주님을 향한 사랑은 그런 신경 못지않게 예배와 행위로 표현된다.「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과 같은 찬송가들의 대중화에서 보듯이, 우리의 위대한 신학자들 곁에 위대한 작사가들이 함께 있다. 종종 우리의 헌신은 공식 성명보다 베풀고 돌보는 삶을 통해 더 잘 드러난다. 우리의 정체성을 책이나 선언에도 담아낼 수 있지만 또한 빈민과 노숙인과 고아를 돌보는 일, 재소자를 찾아가는 일, 굶주린 사람과 재난의 피해자에게 베푸는 긍휼, 노예제도와 인신 매매 같은 악에 시달리는 사람을 위한 정의의 투쟁 등에도 담아낼 수 있다.
셋째, 복음주의자가 예수를 따르는 방식은 특정한 교회에 국한되거나 한정된 운동에 갇히지 않는다. 우리는 주류 교단이나 독립 교회 할 것 없이 아주 다양한 교회와 교단의 일원이며, 복음주의에 헌신하면 연합의 중핵이 생겨나 폭넓은 다양성이 하나로 모아진다. 이것은 정보 시대의 네트워크 사회에서 어느 운동에나 아주 중요하지만, 복음주의는 계급이 없으며 늘 다양성과 융통성과 적응력을 갖춘 많은 형태를 취했다. 전 세 계 복음주의의 다채로움과 생동감에서 보듯이, 이는 이전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 더욱 그렇다. 복음주의란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하여 다른 시대 다른 문화 속에서 그분의 부르심대로 힘써 제자의 삶을 사는 것이다.
넷째, 앞서 강조했듯이 복음주의는 신학적•고백적으로 규정되어야 하며 정치적•문화적으로 규정되어서는 안 된다. 복음주의는 다른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과 가르침과 생활방식을 사랑하고 거기에 헌신하며, 이 땅의 모든 권세나 충성이나 충절의 대상보다 그분의 주되심에 끊임없이 헌신한다. 따라서 복음주의는 부족이나 국가의 울타리에 갇혀서는 안 된다. “보수”니 “진보”니 하는 정치적 범주나 “퇴행”이니 “발달”이니 하는 심리학적 범주로 전락하거나 그것과 혼동되어서도 안 된다.
다섯째, 본질상 “기쁜 소식”인 복음주의의 메시지는 무한히 긍정적이며, 부정적이기 이전에 언제나 긍정적이다. 물론 “부정의 위력”은 신학적, 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모든 것이 허용되고” “금지가 금지되는” 이 시대에는 특히 더하다. 예수께서 그러셨듯이 복음주의자도 때로 거짓과 불의와 악을 강력히 비판해야 한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우리 복음주의자는 누군가나 뭔가를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위하고 뭔가를 위한다. 예수의 복음은 환영과 용서와 은혜의 기쁜 소식이다. 율법과 율법주의로부터 해방된다는 소식이다. 복음은 생명과 인간의 열망을 열렬히 긍정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의 진정한 숙명에 어긋나는 부분만 강경히 부정한다.
여섯째, 개신교는 진보 수정주의와 보수 근본주의라는 양극단으로 치닫곤 하는데, 복음주의는 그 둘과 구별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을 “세상 안에 있되 세상에 속하지 않도록” 부르셨다. 그런데 특히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양극단으로 떠밀리곤 한다. 진보 진영은 세상에 너무 동화되어 시대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을 닮다 못해 아예 그리스도께 불충실하는 성향을 보이는 반면, 보수 진영은 세상을 너무 거부하고 무 조건 적대시하여 역시 그리스도께 불충실하는 성향을 보인다.
진보 수정주의의 성향은 18세기에 처음 등장하여 지금은 더 세를 불렸다. 그것이 절정에 달한 기독교 신앙의 버전들을 보면, 인간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악과 진리와 하나님에 대한 관점이 얄팍하고 미흡하며 부실하다는 약점을 특징으로 보인다. 결국 더 이상 기독교라 보기 힘들 때도 있다. 이것은 초라한 항복이다. 이런 “대안 복음들”은 아래와 같은 여러 심각한 상실 때문에 결국 자멸할 수밖에 없다.
첫째, 권위를 상실한다. “오직 성경으로”Sola Sciptura가 “오직 문화로” sola cultura로 대체되기 때문이다.
둘째, 공동체와 연속성을 상실한다.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이 단지 한 집단과 한 시대의 믿음으로 둔감하여 동서고금의 모든 신자들로부터 떨어져 나가기 때문이다.
셋째, 안정성을 상실한다. 딘 잉게Dean Inge의 적절한 표현처럼 누구든지 “시대정신과 결혼하면 머잖아 홀아비가 되기” 때문이다.
넷째, 신빙성을 상실한다. 알고 보면 이 “새로운 신앙”은 회의론자들이 이미 믿고 있는 내용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확고 부동한 기독교가 없어졌으니 구도자들이 검토하고 믿으려 해도 그럴 수 없다.
마지막으로, 정체성을 상실한다. 이렇게 수정된 신앙은 예수께 충실한 역사적 기독교 신앙과의 유사성을 점점 더 잃어 가기 때문이다.
요컨대 아무리 진실한 취지로 시의성을 꾀한다 해도 진보 수정주의를 극단적으로 옹호하는 사람들은 쇠렌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입 맞추는 유다들”-해석으로 예수를 배반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될 위험이 있다.
근본주의의 성향은 더 근래에 나타났고 복음주의와 더 비슷하다. 어찌나 비슷한지 많은 사람들의 눈에 그 둘이 겹쳐져 보인다. 물론 신앙의 근본에 충실하려는 값진 소원을 품었던 옛 사람들을 우리는 칭송한다. 그러나 근본주의는 기독교 신앙을 완전히 뒤덮고 본질상 현대 세계에 대한 현대식 반작용으로 빗나갔다. 현대 세계에 대한 반작용이다 보니, 과거와 이미 지나간 어떤 순간을 낭만화하고 현재를 극단화하는 경향이 있다. 반작용의 방식도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심히 호전적이어서 기독교라 보기 어려울 정도다.
많은 종교와 심지어 세속주의에도 기독교의 근본주의에 상응하는 노선이 있다. 기독교의 근본주의는 기독교적 정체를 내건 사회 운동이 될 때도 많지만 기독교적 내용과 품행은 심히 빈곤하다. 예컨대 복음주의자들도 그럴 수 있듯이 근본주의는 복음주의의 원리를 너무 쉽게 내버린다. 즉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지상계명에 따르지 않기 일쑤이며, 예수의 제자라면 한없이 용서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는 그 분의 급진적 요구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일곱째, 복음주의는 과거와 미래를 똑같이 바라본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본질상 복음주의는 예수와 성경에까지 직접 거슬러 올라간다. 이는 단지 역사적 뿌리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헌신이고 열망과 사고의 흐름이며, 딱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활방식의 필수 원리이기에 계속 반복된다. 그러므로 복음주의자는 개인적으로 믿음이 깊고, 윤리적으로 거룩한 삶에 힘써 헌신하며, 철저히 자유의지에 따라 활동할 뿐 아니라, 또한 진리와 역사가 부끄럼 없이 빚어 낸 역동적 신앙을 실천한다.
그러나 복음주의는 무조건적인 보수주의와는 거리가 멀며 무턱대고 전통과 현 상태를 옹호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 지속적으로 헌신하기에 혁신과 쇄신과 개혁과 진취적 역동성이 수반된다. 모든 시대의 모든 것은 예수와 그분의 말씀에 비추어 평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음주의의 원리는 자기성찰과 반성,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기꺼이 고치고 변화하려는 의지를 요구한다. 동시에 복음주의는 오늘 날 공허하게 부르짖는 “변화를 위한 변화”와도 거리가 멀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를 가리켜 보이는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며, 따라서 모든 개혁re-form의 바탕이 되는 원형form을 보존할 필요성을 인식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성과 신앙을 적이 아니라 동지로 여긴다. 머리와 가슴도 모순 관계가 아니고 한편으로 온전한 충실성과 다른 한편으로 온전한 지성적 비판과 시대성도 서로 모순이 아니다. 그래서 복음주의는 개혁과 혁신을 통해 복고주의와 결별할 뿐 아니라, “새것일수록 진리”이고 “무조건 최신이 최고”라는 주의에 맞서 진리와 의와 선을 보존함으로써 현대의 진보주의와도 결별한다. 복음주의의 역설적 진실이 있으니, 곧 전진하는 가장 확실한 길은 언제나 먼저 후퇴하는 것이다. “돌이킴”이야말로 모든 진정한 소생과 개혁의 비결이다.
요컨대 복음주의는 개신교보다 시기적으로 더 이르고 더 영속적이다. 개신교 종교개혁의 핵심은 복음주의의 추구였고, 종교개혁에 기독교적 정당성을 부여한 것은 성경적 진리의 회복이었다. 일부 국가들에서는 여전히 복음주의가 개신교와 동의어다. 하지만 성경으로 돌아가려는 열망과 더불어 복음주의라는 용어는 분명히 역사적 형태의 개신교 프로젝트보다 선행하며 더 오래까지 남는다. `”protest”라는 단어는 “대신 증언하 다”pro-testances라는 본래의 긍정적 의미를 갈수록 상실했고 “개신교”Protestant라는 용어는 점점 더 역사의 한 시대로 국한된다. 다른 명칭들은 오고 가지만, 예수의 기쁜 소식과 성경에 충실 하려는 복음주의의 원리는 언제나 남는다.
2 우리 자신의 행동을 개혁해야 한다
우리의 두 번째 주요 관심사는 우리 자신의 행동의 개혁이다. 고백컨대 복음주의자로 불리려면 우리의 신앙과 삶을 예수의 길이라는 가르침과 기준에 따라 형성할 뿐 아니라 그 일을 늘 반복해야 한다. 그런데 복음주의의 동력은 급진적, 개혁적, 혁신적 힘인 데 반해 오늘 우리가 서글프게 고백하는 일대 아이러니가 있다. 그동안 우리는 진부한 형식의 쇄신, 죽은 교회의 소생, 냉랭한 마음의 회개, 부패한 관행과 이단적 신념의 개혁, 사회의 큰 불의의 혁신 등을 위해 수없이 싸웠다. 하지만 그런 우리가 지금 개혁과 쇄신이 절실히 필요한 상태에 놓여 있다. 개혁자인 우리 자신에게 개혁이 필요하고 개신교도(“항의하는 사람”)인 우리가 바로 항의의 대상이다.
이에 우리는 우리 복음주의자들이 아래와 같이 자신의 행동으로 신앙을 배반했음을 고백한다.
걸핏하면 우리는 예수의 복음을 외치면서 사실은 성경의 진리를 치유 기법으로, 예배를 오락으로, 제자도를 인간의 잠재력 개발로, 교회 성장을 기업식 확장으로 교회와 지역교회에 대한 애정을 교회 없는 무기력한 영성의 신앙 표현으로, 진정한 필요를 채워 주는 일을 주관적 필요에 대한 영합으로, 선교 원리를 마케팅 수법으로 대체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상업적이고 희석되고 기분 좋은 복음으로 건강과 재물과 인간의 잠재력과 종교적 덕담이나 전하는 사람들로 알려졌다. 이는 하나같이 주변 세상의 일시적 유행과 구별되지 않는 것들이다.
걸핏하면 우리는 분명하고 고상하게 성경의 권위를 진술하면서 사실은 우리의 생활방식으로 그것을 욕되게 했다. 우리의 삶이 자신의 악한 취향과 현대의 편의와 유행을 통해 더 빚어졌기 때문이다.
걸핏하면 우리는 정통성을 자랑하면서 정작 교회를 성장시킬 때는 시대정신의 일시적 표출을 기독교적으로 각색한 가장 세속적인 방법과 기법을 동원했다.
걸핏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연합과 화합을 예시하지 못했고, 복음의 진리와 은혜를 표현하기보다 내분에 빠졌다. 그런 내분을 규정한 것은 역사의 사건들이고 더 악화시킨 것은 사랑 없는 진리다.
걸핏하면 우리는 강력한 영적 부흥과 개혁 운동들로 우리의 뿌리를 추적해 올라가지만 사실은 부지불식간에 무신론자일 때가 허다하고, 실제로는 세속주의자처럼 초자연적 세계와 단절된 채로 살아가며,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실상 하나님이 필요 없는 것처럼 영위할 때가 많다.
걸핏하면 우리는 낙태 등 다른 사람들의 악과 불의를 그리고 “다른 복음”으로 관점이 돌아선 신학적 자유주의의 이단과 배교를 공격하지만, 정작 우리 자신의 죄를 묵과하고 우리 자신의 악을 못 본 체하며, 신앙에 어긋나게 물질주의와 소비지상주의 같은 세력에 예속되어 살았다.
걸핏하면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와 같은 성경의 위대한 진리들에 집중하면서 그것을 창조 세계와 같은 성경의 다른 진리들에는 적용하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 스스로 피폐해졌을 뿐 아니라, 우리가 지지해 온 문화는 대체로 이 땅을 향한 청지기 직분에 무관심하고 사회의 창조 무대와 예술을 도외시 한다.
걸핏하면 우리는 현대 세계의 주도력에 미혹되어 값비싼 은혜 대신 편의를 택하고, 진정한 공동체 대신 개인주의를 수용하고, 신학적 권위를 개인적 취향의 문제로 끌어내리며, 진리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예수를 향한 배타적 충성을 버린 채 혼합주의와 다를 바 없는 온갖 잡다한 입장을 취했다.
걸핏하면 우리는 마음과 영혼과 힘과 지성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지상계명에 불순종하여 부당한 반지성주의라는 심각한 문화적 장애이자 죄에 빠졌다. 특히 우리 중에는 과학을 존중하는 강력한 기독교 전통-특히 현대 과학을 탄생시킨 사상의 모체가 된-을 저버리고, 과학과 신앙의 잘못된 적대 관계에 대해 스스로 놀림감이 된 사람들도 있다. 이로써 본의 아니게 우리는 오늘날 우리 문화에 과학주의와 자연주의가 고삐 풀린 듯 만연하도록 조장했다.
걸핏하면 우리는 세계 교회의 인종적•민족적 다양성을 자랑하면서 정작 국내에서는 분리되어 지내는 데 만족했다.
걸핏하면 우리는 세상의 그늘과 음지와 흑암 속에 있는 사람들을 향한 주님의 관심을 외면한 채, 힘 있는 사람들의 응원단이 되고 권력자와 부자들의 순진한 아첨꾼이 되었다.
걸핏하면 우리는 “새 포도주에 맞는 새 가죽 부대”를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 시의성의 미명하에 당장의 일시적 유행에 굴했다. 모더니즘 같은 어제의 오류는 요란하게 공격하면서 포스트모더 니즘 같은 오늘의 오류에는 순순히 항복했다.
이제 우리는 복음주의의 개혁 원리를 회복할 것과, 그리하여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 전체에 깊은 개혁과 쇄신을 이룰 것을 겸허하고도 단호하게 촉구한다.
동료 복음주의자들에게는 말로만 예수와 성경을 떠받들 것이 아니라 그 두 권위를 우리의 사고와 실천의 가장 높은 자리에 복원할 것을 촉구한다.
우리의 공동체들에게는 세상과 이 세대를 분별력 있게 비판할 것을 촉구한다. 우리는 세상의 명백한 이질적 세력도 물리쳐야 하지만, 더 똑똑한 통찰과 수법으로 영향을 미치려는 모더니즘의 은근한 유혹도 물리쳐야 한다. 다만 “세상을 위하여 세상을 대적하는” 것임을 늘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는 그분의 계명을 지켜 서로 사랑하고 모든 부수적 차이를 떠받치는 그분 안에서의 연합에 충실하며, 바깥세상에 절실히 필요한 화해를 교회 안에 먼저 실천할 것을 촉구한다. 정체성과 성별을 이용한 정략으로 사회가 분열된 때일수록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안의 정체성이 그 모든 차이를 초월할 수 있음을 삶으로 증언해야 한다.
우리는 낙태와 결혼 등 단일 이슈의 정책 너머로 관심사를 확대하여, 복음의 포괄적 대의와 관심사, 그리고 공적 생활에서 상대해야 할 인간의 제반 이슈들을 더 폭넓게 인식할 것을 촉구한다. 물론 우리는 태아를 포함한 모든 신성한 인명에 대한 성경적 헌신에서 물러날 수 없고, 하나님이 제정하신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거룩한 결혼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평화의 왕이신 예수를 본받아 갈등, 인종차별, 부패, 빈곤, 전염병, 문맹, 무지, 영적 공허함 같은 세계적 거인들과 싸워야 한다. 그러려면 화해를 촉진하고 윤리적인 섬기는 리더십을 장려하고, 빈민을 지원하고, 병자를 돌보고, 차세대를 교육해야 한다. 선한 청지기답게 하나님이 맡겨 주신 모든 것을 잘 보전하여 후대에 물려주는 일이 우리의 소명이라 믿는다.
우리는 또한 제자도를 더욱 온전하게 이해하여 성과 속, 영과 육 등 삶의 모든 소명과 영역에 온전한 믿음을 적용할 것과, 사고의 지경을 넓혀 정치뿐 아니라 예술과 과학과 언론과 다양한 문화 창출에도 기여할 것을 촉구한다.
무엇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의 기쁜 소식을 전하려면 우리부터 그 기쁜 소식으로 빚어져 명실상부한 복음주의자가 되어야 함을 상기한다.
3 공적 생활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자리를 재고해야 한다
우리는 공적 생활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자리를 새롭게 이해해야 한다. 고백컨대 예수의 이름에 합당한 복음주의자가 되려면 하나님 나라의 핵심인 자유와 정의와 평화와 복지에 충실해야 하고, 이런 선물을 공적 생활에 들여놓아 만인을 섬겨야 하며, 이런 이상을 공유하고 공공선에 힘쓰는 모든 사람들과 협력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성의 시민이며 이 땅의 도성의 거류 외국인이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세상 “안에” 있되 세상에 “속하지” 않도록 부르셨다. 따라서 우리는 공적 책무에 온전히 참여하되 그 어떤 정당, 당파적 이념, 경제 제도, 계급, 종족, 국가 정체와도 완전히 같아져서는 안 된다.
근본주의는 처음부터 세상을 완전히 부정하며 정치에 등을 돌렸지만 미국의 존 제이John Jay, 존 위더스푼 John Witherspoon, 존 울먼 John Woolman, 프랜시스 월라드 Frances Willard와 영국의 월리엄 월버포스, 샤프츠베리 경 같은 인물들은 다른 전통을 일깨워 준다. 복음주의자들은 정치 전반에 눈부시게 기여했다. 노예제도의 폐지와 여성 참정권 같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도덕적•사회적 개혁 중 다수에 기여했고, 오늘의 정치적 담론에 빠질 수 없는 여러 개념에도 기여했다. 예컨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복음주의는 자발적 단체의 출현에 중요하게 기여했고, 이를 통해 시민사회와 사회자본 같은 핵심 개념에 대한 인식을 높였다.
사물화도 아니고 정치화도 아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복음주의자는 공적 생활에서 복음주의와 널리 혼동되고 있는 몇 가지 입장에 분명히 거리를 두고자 한다.
첫째, 우리 복음주의자는 근래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빠진 대등하고도 상반된 두 가지 오류를 배격한다. 첫 번째 오류는 신앙을 사물화私物化하여 개인적•영적 영역에만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이다. 이런 이원론은 부당하게 성과 속을 분리시키며, 그 결과 신앙은 온전함을 잃고 “사적으로만 관계되고 공적으로는 무관한” 것으로 변한다. 또 다른 형태의 기복 신앙이다.
최근 수십 년 사이에 종교 좌익과 종교 우익이 공히 범한 또 다른 오류는 신앙을 정치화하며, 성경적 진리와 무관해진 본질상 정치적 의제의 표명에 이용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신앙은 독자성을 잃고 교회는 “기도하는 정부”가 되고 그리스도인은 이런저런 정당의 “쓸 만한 바보”가 되며, 기독교는 순전히 이념이 된다. 결국 기독교 신앙이 정치적 이해관계를 위한 무기로 이용된다.
신앙을 정치화하는 잘못을 범한 그리스도인은 정치적 좌익에도 있고 우익에도 있다. 약해진 종교 우익에 대응하여 종교 좌익을 강화하는 것은 전혀 발전의 길이 아니다. 둘 중 어느 쪽이든 정치화된 신앙은 불충실하고 미련하며 교회에 재난을 부른다. 헌법상의 이유라기보다 먼저 기독교적 이유로 재난을 초래한다.
우리 복음주의자는 정당과 이념과 국적보다 더 높은 대상에 충성하도록 부름받았다. 따라서 정치에 참여할 의무도 있지만 동시에 그 어떤 정당, 당파적 이념, 경제 제도, 국적 등과 완전히 같아져서는 안 될 의무도 있다. 우리의 기준으로 보면 영적•도덕적•사회적 권력도 정치적 권력 못지않게 중요하다. 또 한 원칙이 정당보다 중요하듯 정의가 인기보다 중요하고 진리가 인맥보다 중요하며, 양심이 권력과 생존보다 중요하다.
신앙의 정치화는 결코 힘의 징표가 아니라 오히려 그만큼 약하다는 표시다. “정치에 대해 맨 먼저 할 말은 정치가 맨 먼저가 아니라는 것이다.” 역시 지혜로운 격언이다.
복음주의의 정신을 다시 팔 수는 없다. 그것을 사는 데 이미 무한한 값이 치러졌다.
신성한 광장이나 불모의 광장이 아니라 시민 광장이다
둘째, 우리 복음주의자는 미국의 현재 문화 전쟁을 규정하는 양극단을 배격한다. 물론 문화 전쟁에는 깊고 중요한 이슈들이 걸려 있으며, 미국과 서구 문명의 미래가 그 이슈들로 좌우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이슈들을 놓고 싸우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특히 우리 복음주의자가 문화 전쟁에서 슬퍼하는 것은 공공선에 대한 공공의 비전이 전반적으로 붕괴된 것만이 아니라, 공적 생활에서 신앙이 차지할 제자리에 대한-그리하여 신앙적 관점에서 공적 생활에 들어가 참여할 자유의 제자리에 대한-끝없는 공방이다. 상이한 종교의 사람들이 광장에 들어가 활발하면서도 시민답게 서로를 상대하는 지침과 원리에 관한 한, 현재 엄청난 혼란이 지배하고 있다. 그 결과가 미국의 문화 전쟁 전반에 “성전”聖戰의 전선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그 속에 위험한 충돌과 증오와 소송이 배태되어 있다.
한편으로 우리는 신성한 광장의 지지층을 배격한다. 종교적•역사적•문화적 이유로 그들은 공적 생활에서 계속 어느 한 종교에 특혜를 부여하려 한다. 현재로서는 대다수의 경우에 그것이 기독교이지만 얼마든지 타 종교일 수도 있다. 오늘의 미국처럼 종교적 다양성이 큰 사회에서 어느 한 신앙이 사회 전체의 규범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다만 광장에서 신앙을 자유롭게 표현할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
명백히 밝히거니와 우리는 만인의 종교의 자유에 헌신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기독교 신앙을 택하거나 버리는 회심의 권리도 포함된다. 다원적인 우리 사회에 신정神政을 강요하는 것을 우리는 단호히 반대한다. 동시에 우리는 정치적 공정성을 내세워 전도를 공격하는 편협함에도 우려를 표한다. 우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신앙을 강요하거나 행동을 억지로 시킬 마음이 없다. 다만 자유로이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고 우리 자신의 삶과 특히 사랑으로 예시할 뿐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불모의 광장의 지지층도 배격한다. 그들은 일체의 종교적 표현을 완벽하게 사물화하고, 광장을 완벽하게 세속적 공간으로 유지하려 한다. 세속주의자와 지유주의자와 엄격한 정교분리 지지자가 대충 연대하여 지지하는 이 입장은 더욱 부당하고 실효성이 없다. 여전히 종교심이 깊은 절대다수의 시민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기껏 사람들을 광장으로 불러 놓고 그들의 정체성이자 세계관인 신앙을 다 벗 으라고 우기는 것보다 더 편협한 일은 없다.
이런 양극단과는 반대로 우리는 시민 광장에 헌신한다. 공적 생활에 대한 이 관점에 따르면, 모든 종교의 시민이 각자의 종교에 기초하여 자유로이 광장에 들어가 참여하되, 모든 종교의 공정성과 자유라는 합의된 틀 안에서 그리한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을 위해 주장하는 모든 권리를 동시에 타인을 위해서도 옹호한다. 그리스도인의 권리는 곧 유대교도의 권리, 세속주의자의 권리, 모르몬교도의 권리, 무슬림의 권리, 사이언톨로지 신도의 권리, 기타 전국 모든 종교의 모든 신자의 권리다.
콘스탄티누스의 길이 아니라 예수의 길이다
동료 시민들에게 주의를 당부하고 싶은 두 가지 관심사가 더 있다. 한편으로 우리가 특히 우려하는 사실은, 한 세대의 문화 전쟁-전 세계의 종교적 극단주의에 대한 반작용이 그것을 부추긴 점은 이해할 만하다-이 많은 식자들 사이에 공적 생활에서 모든 종교에 대한 막강한 반격을 유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이대로 굳어져 미국도 공적 생활에서 종교에 대해 적개심을 품은 지 오래인 유럽처럼 된다면, 그 결과로 미국 공화국에 재난을 초래하고 만인의 종교의 자유를 심각하게 위축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흥 무신론자들의 이런 명 백하고 확연한 불관용에 경고를 발함과 동시에, 모든 선의의 시민들과 모든 종교의 신자들과 종교가 없는 사람들에게 우리와 함께 시민 광장을 건설할 것과 모두를 위한 강인한 시민정신을 회복할 것을 촉구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또한 우려하는 사실은, 세계화가 진척되고 지구촌 광장이 출현하고 있는데도 이 세계무대에서 가장 깊은 견해 차이를 안고 자유롭고 정의롭고 평화롭게 살아갈 방도에 대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비전이 없다는 점이다. 최근에 무슬림들은 이슬람교가 모욕당한다는 인식하에 항변과 폭동을 일삼고 있다. 이런 예에서 보듯이, 인터넷 시대는 만인에게 알릴 의도가 없는 말까지도 만인에게 알려지는 세상을 만들어 냈다. 가장 깊은 견해 차이를 안고 살아가는 도전은 인터넷 같은 첨단기술의 지구촌 시대를 맞아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이런 지구촌 광장이 출현하면서 우리가 피해야 할 대등하고도 상반된 두 가지 오류가 있다. 한쪽에는 강압적 세속주의가 있다. 한때 공산주의가 그 전형이었으나 지금은 더 유연하면서도 엄격한 프랑스식 세속주의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다른 쪽에는 종교적 극단주의가 있다. 이슬람교의 폭력이 대표적인 예다.
동시에 우리는 현재 많은 사람들이 빠지고 있는 두 가지 주된 입장을 배격한다. 한편으로 우리가 배격하는 부류는 자기네 길이 유일한 길이자 만인의 길이라 믿고 무조건 타인에게 강압하는 사람들이다. 문제의 신앙이나 이념이 무엇이든-공산주의나 이슬람교나 심지어 민주주의일지라도 이 입장은 불가피하게 충돌을 야기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단행한 정부 주도의 압제 때문에 분명히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을 모두 싸잡아 이 범주에 넣을 것이다. 그런 압제는 정부와 교회의 위험한 동맹을 낳아 현재까지도 유럽의 정교政敎 관계에 지속되고 있다.
우리도 무제한의 자유의지와 무절제한 개인주의를 비판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교회와 정부의 위험한 동맹과 그 어두운 열매인 압제를 철저히 개탄한다. 복음주의자가 추적해 올라가는 우리 유산의 기원은 콘스탄티누스가 아니라 그 와는 판이한 입장인 나사렛 예수다. 물론 우리 중에는 반전주의자도 있고 정의로운 전쟁을 옹호하는 사람도 있지만, 다음의 믿음만은 모두가 동일하다. 즉 온 세상을 위한 예수의 정의로운 기쁜 소식을 퍼뜨리는 것은 정복자의 권력과 검이 아니라 권력을 비우고 기꺼이 죽으심으로 자신이 오신 목적을 이루신 “고난의 종” 예수다. 일부 타 종교의 신자들과 달리 우리는 기독교에 대한 공격과 비난을 “모욕”과 “신성모독”으로 보 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평이나 피해의식 없이 감수해야 할 제자도의 대가로 본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배격하는 부류는 가치관의 차이를 단지 상대적 문화 차이로만 보고 다른 사람이나 문화에 대한 비판을 일체 허용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이다. 이 입장은 얼핏 듣기에는 더 관용적인 것 같지만 무사안일이라는 악으로 직행한다. 세상에 집단학살, 노예제도, 여성 압제, 낙태 같은 악이 있는 한 우리가 반드시 권리를 옹호하고 악을 퇴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타인의 일에 개입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
아울러 우리는 이중적 지구촌 광장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상부에 세계적 세속 자유주의자들이 있고 하부에 지역적 종교 신자들이 있는 이런 구조는 종교의 자유를 생색만 낼 뿐 사실은 심각하게 제약한다. 아울러 진정한 자유주의에도 걸맞지 않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시민 광장을 선택한다. 또한 우리와 견해가 다른 사람들까지 포함하며 일단 만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입장을 선택한다. 중세의 종교 지도자들과 현대의 일부 무신론자들은 “오류는 권리가 없다”고 믿지만, 그와 달리 우리는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권리도 존중한다. 동시에 우리는 “무엇이든 믿을 권리”가 있다 해서 “누가 무엇을 믿든 그 내용이 다 옳다”는 결론에 이르지는 않음을 강조한다. 오히려 양심에 기초한 견해 차이를 존중할수록 그 차이에 대한 토론이 필요할 수 있으며, 토론은 서로 존중하는 자세로 이루어져야 한다.
모든 사람을 초대한다
앞서 진술했듯이, 이 선언에 서명하는 우리는 감히 모든 복음주의자를 대변하지 않는다. 이 선언은 우리 자신의 입장일 뿐이지만 그렇다고 대상이 우리 자신만은 아니다. 따라서 전국과 전 세계의 모든 동료 그리스도인들, 동료 시민들, 타 종교의 사람들은 우리의 초대에 응하여 이 선언에 진지하게 주목하고 적절하게 반응해 주기를 바란다.
우선 동료 복음주의자들에게는 이 고백을 숙고할 것과 복음주의를 둘러싼 깊은 혼란을 우리와 함께 명료히 규명할 것을 촉구한다. 그리하여 함께 우리 주님과 그분의 독특한 생활방식에 충실할 수 있기를 바란다.
동료 시민들에게는 현재의 문화 전쟁의 악영향을 평가할 것과 공적 생활에 자유와 시민정신을 회복하는 긴박한 과업에 우리와 함께 협력할 것을 촉구한다. 그리하여 반드시 이 자유를 자자손손 물려줄 수 있기를 바란다.
전 세계의 타 종교 신자들에게는 당신의 양심에 따라 당신의 종교를 믿을 권리를 우리가 존중함을 바로 알 것을 촉구하며, 따라서 당신도 황금률대로 우리와 모든 타 종교 신자들에게 똑같은 권리와 존중을 베풀 것을 당부한다. 그리하여 함께 종교의 자유를 실현하고 종교의 박해를 줄여, 인류의 다양성이 인류의 복지에 방해가 아니라 오히려 보완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학자와 언론인과 공공정책 입안자 등 공무를 보도하고 분석하는 사람들에게는 신입견을 버릴 것과 우리와 타 종교 신자들을 기술할 때 정확하고 공정한 정의定義와 빔주를 사용해 줄 것을 촉구한다. 아울러 어조도 당신 자신에게 똑같이 적용되기를 바라는 어조를 써 주기를 바란다.
권력과 권위의 직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거주 지역과 도시와 국가의 복지를 추구하지만 우리에게는 늘 궁극적 충성의 대상이 있고 다른 모든 기준을 심사하는 더 높은 기준이 있음을 인식해 줄 것을 촉구한다. 기독교가 문명에 기여하고 개혁에 힘쓰는 비결이 바로 그 헌신임을 알기를 바란다.
우리처럼 빈민과 고통당하고 압제받는 무리에게 헌신한 사람들에게는 우리와 협력하여 그 수많은 동료 인간들에게 보호와 평화와 정의와 자유를 가져다줄 것을 촉구한다. 온 세상의 기성 질서는 그들을 무시하거나 압제하거나 노예로 만들거나 인간쓰레기와 무익한 인생으로 취급한다.
작금의 혼돈스러운 철학들과 깨지고 소외된 현대 사회 속에서 의미와 소속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기쁜 소식으로 경험한 이 복음이 정말 사상 최고의 소식임을 숙고할 것을 촉구한다. 복음은 만인에게 열려 있으므로 누구라도 오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고 공유하려는 이것을 발견할 수 있다.
끝으로, 거짓과 허위와 조작이 만연하고 진실이 짓밟히기 일쑤이며 말이 심각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는 세상에서, 우리는 문구를 신중히 고르고 검토하여 이 선언을 작성했음을 엄숙히 서약한다. 하나님 아래서 우리는 이 선언에 스스로 구속된다. 기쁜 소식의 백성인 우리는 그것을 말로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과 이 세대를 향해 기쁜 소식의 화신이 되고자 한다.
이상이 우리의 입장이다. 우리 자신의 신앙을 부끄럼 없이 확신하는 가운데 우리는 사랑과 소망과 겸손의 마음으로 모든 타 종교의 사람들에게 손을 내민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우리는 당신과 함께 이 시대의 도전에 맞서고 인류의 더 큰 번영을 위해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다.
@ 2008 복음주의 선언 운영 위원회
출처: 오스 기니스의 《르네상스》(복 있는 사람, 2016년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