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시간
오스 기니스
세상이 묻고 진리가 답하다, 2장
1989년은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지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세기의 해’입니다. 저자는 또 하나의 사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삼십만이 넘는 인파가 프라하 바출라프 광장에 모여들어 바출라프 하벨(Vaclav Havel)의 연설을 듣던 모습입니다. 그는 반체제 인사로서, 후에 체코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는 벨벳 혁명으로 유명합니다. 벨벳 혁명가들은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모토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진리는, 진리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위해 승리한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역시 진리의 힘으로 소련의 무력을 압도할 수 있었음을 증명했습니다.
저자는 오늘날의 유럽과 미국을 둘러보면서, 오히려 "진리의 개념을 둘러싼 반목과 혼란만이 무성합니다. 그래서 진리가 죽은 것같이 여겨지기까지 합니다"고 진술합니다.
객관적 진리 혹은 절대적 진리를 신봉하는 사람은 네안데르탈인이나 반동 분자 취급을 받으며, 진리는 기껏해야 상대적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해석에 따라 달라지고 어떤 관점을 취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사고가 사회적으로 보편화되었다는 점입니다. 증거와 주장을 표출하는 능력을 통해 그러한 사고는 사회에 알려지고 정착되었습니다. 반면, 진리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과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은 오늘날 반동 분자로 여겨집니다. 거만하고 배타적이며 완전히 잘못된 사고에 찌들었다고 취급받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저자는 진리에 대한 이러한 위기는 미국의 개인뿐 아니라 사회에도 대단히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진리는 우리에게 매우 소중하고 본질적인 것입니다. 진리는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이며, 그것 없이는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고 삶을 끌어가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의 삶을 선하게 만들기 위해 진리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도 진리는 절대적으로 핵심입니다. 따라서 자유롭게 살고 그 자유를 유지하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진리에 대한 이런 현실적인 도전에 진지하게 맞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저자는 다음의 주제로 그의 주장을 펼칩니다.
1. 진리의 위기와 함께 따라오는 두 가지 위기
2. 진리를 믿기는 하지만 그것에 무신경해진 이들을 위한 두 가지 논증
3. 진리에 대해 극단적으로 회의적이며 아무런 관심이 없는 이들을 위한 두 가지 논증
4. 진리에 대한 흔들림 없는 관점을 가진 우리 모두에게 진리가 던지는 두 가지 도전
01 진리의 위기와 함께 따라오는 두 가지 위기
먼저 진리의 위기와 함께 따라오는 두 가지 위기, 성품의 위기와 윤리의 위기도 함께 따라옵니다. 이렇게 세 가지의 위기가 결합해 한때 이 나라의 본질이라고 여겼던 것들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고 봅니다.
1-1 성품의 위기
1979년 카줄(Chajul)이라고 불리는 콰테말라의 한 작은 마을에서 있었던 스물세 명의 공산주의 게릴라들이 처형된 사건의 비참함을 그때 처형된 게릴라 중 한 명의 여동생이 13년 동안 증언하였습니다. 그 일로 그녀는 1992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교수에 의하여 그녀의 증언이 일부 허구적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폭풍 같은 비난의 화살은 진실을 이야기한 교수에게로 떨어졌습니다.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던 아메리카 원주민 소녀의 이야기에 서구 저널리스트들이 가지는 진실성의 잣대를 갖다댔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소녀는 자신의 동족에 대한 확장된 진리를 표현했다는 것이었고, 그녀는 피해자로서 거짓을 말할 권리가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례를 오늘날 ‘창조적 발명’ 혹은 ‘창조적 재창조’라고 부릅니다. 지난 백 년간 (미국 문화에서는), 특히 성품에 관한 한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진실은 죽었습니다. 성품도 죽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어떤 형태로든 이미지를 창조해 낼 수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과거에 우리가 알던 것과 아주 다른 것입니다. 고대 세계는 성품은 어떤 사람을 그 사람으로 만드는 내적 요소로 봅니다. 이 내적 요소가 모든 외적 표현 아래 흐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말이든 행동이든 관계 없으며 성격이나 이미지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성경적인 이해에 따르면 성품은 하나님 외에 아무도 그 사람을 볼 수 없을 때 그 사람이 가지는 모습입니다. 예수가 ‘외식하는 자들’이라는 말씀을 여러 차례 하신 것에서 성품에 관한 전통적인 관점이 무엇인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hypocrite 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배우’를 뜻합니다. 즉,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역할을 연기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위선이라고 호통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겉으로 보이는 말과 행동, 성격과 이미지 등이,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그들 속의 성품과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물론 다른 목소리들이 많습니다. 저자는 마키아벨리를 인용합니다. 마키아벨리에게는, 성품이란 좋은 것인데, 하지만 중요한 것은 권력의 유지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무엇이 희생된다 해도 말입니다. 만약 권력자가 좋은 성품을 가지고 있다면, 좋겠지만, 하지만 다른 길을 선택해야 한다면, 그렇게 해서 그 권력자의 지배를 계속시킬 수 있다면 순전히 악한 방법이라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것이 일반 법칙이 되어 버렸습니다.
인류 대부분의 생활 환경이 농촌 시골 지역에서 도시로 옮겨지면서, 깊이 있는 소수의 공동체 관계에서 수없이 많은 얕은 관계로 변화되었습니다. 또한 문자 중심의 소통이 이미지 중심의 소통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첫인상이야말로 유일하게 의미 있는 것이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액면 가치입니다. “미국에서 성공의 열쇠는 정직이다. 만약 그것을 꾸며 낼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성공한 것이다.” 혹은 “이봐, 이것이 내 원칙이야. 내 도덕 원칙이라고. 그런데 이게 마음에 안 들어? 그러면 다른 것을 보여 줄게.” 다시 말해, 오늘날에는 아무런 확고한 중심이 없습니다. 그저 외양의 세계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이것은 유동성과 미디어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현대의 생활 방식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1-2 윤리의 위기.
저자는 오늘날의 대학이란 곳이 ‘무엇이 악이다’라고 판단 내리는 것이 실제 악을 행하는 것보다도 더 나쁘게 여겨지는 곳이라고 염려합니다. 혼란과 불확실성, 관용에 대한 강조, 도덕 문제에 대한 무비판주의 등으로 인해 악행 그 자체보다도 악에 대한 판별을 더 꺼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대한 윤리적 혼란입니다.
여기에 물론 다양한 사상적 뿌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상가는 프레드리히 니체입니다. 그가 휘두르는 망치와 대포는 진리와 윤리를 공격할 양방향의 무기를 상징합니다. 첫 번째 무기는 좀더 분명합니다. 니체는 그것을 철학의 관점주의(perspectivism)라고 불렀습니다. “수많은 관점이 있다. 따라서 수많은 진리가 있다. 따라서 진리란 없다.” 모든 것은 관점의 문제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고 어떻게 그것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모든 것은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종, 계급, 성 등이 근본적인 요인이 됩니다.
진리와 윤리에 대한 니체의 가장 치명적인 일격은 이른바 ‘도덕의 계보’(genealogy of morals)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아름답고 위대해 보이는 동정이나 관용 같은 미덕 이면에는 사실은 음흉한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덕으로 몸을 가장하고, 미덕을 이용해 권력의 의제를 표현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군중이 영웅을 지배하게 되고, 노예의 도덕이 주인의 도덕을 정복하게 됩니다.
즉,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족보의 근원을 추적하다 보면, 그 어떤 것도 보이는 그대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무것도 보이는 그대로이지 않습니다. 위대한 미덕 이면에는 악이 숨어 있습니다. 모든 것의 이면에는 권력에 대한 의지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벗겨내 보십시오. 모든 것을 분해해 보고 파괴해 보십시오. 그러면 힘에 대한 욕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아주 치명적인 공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니체의 저작을 살펴보면, 진리는 객관적으로 죽었습니다. 지식만이 유일한 힘입니다. 옳고 그름도 당연히 죽었습니다. 그의 관점에서라면 우리 인간은 선함과 악함의 차원을 뛰어넘은 존재들입니다. 학계를 비롯한 많은 곳에서 이런 사고를 엿볼 수 있습니다.
02 신자들을 위한 진리에 대한 논증.
먼저 신자들을 위해 진리에 대한 두 가지 논증을 들겠습니다. 높은 차원의 것이 있고 낮은 차원의 것이 있습니다. 신자를 위한 낮은 차원의 논증은, 그들은 진리에 속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그들의 믿음이 나쁜 믿음이거나 부적절하고 약한 믿음이라고 비난받을 때 피할 길을 찾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쁜 믿음이란,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다른 대안이 두렵거나 혹은 무의미함에 대한 공포 때문인 경우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나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대체물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어떤 신자도 대안이 두렵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두려움은 신과 신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사고하며 이를 추구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믿음을 갖게 되는 궁극적이고 적절한, 유일한 이유는 그것이 진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약한 믿음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그들에게는 진리이기 때문이라고 믿지만, 상대주의일 때의 위험을 가집니다. 또는 그렇게 느껴졌기 때문에 혹은 거기에 대한 구체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니면 그렇게 믿는 것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기본적으로 실용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신자들에게 상대주의나 실용주의, 주관주의는 부적절한 믿음의 세 가지 주요 양상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이란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진리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실재가 되는 믿음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사람들이 왕왕 이런 부적절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은 나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자신들이 갖는 믿음을 분명히 대변할 논리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회의나 반대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상대주의나 주관주의 따위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본질적으로 부정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쁜 믿음이나 약한 믿음을 해결하는 방법은 진리에 대한 분명한 인식 외에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들에게 주는 낮은 차원의 논증입니다.
높은 차원의 논증은 유대인과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해당합니다. 진리를 믿는 궁극적인 이유는 그것이 그럴듯한 철학이어서가 아니라 확고한 신학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적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세속적 믿음이나 동양적 믿음과는 달리 진리가 바로 믿음의 핵심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유일한 진리이기 때문에 믿음을 가집니다. 인격적이며 무한한 능력의 하나님이 유일한 진리입니다. 그분은 진리를 말씀하시고 진리에 따라 일하십니다. 그의 말씀하심과 행하심은 역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믿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과 진실성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집니다. 궁극적으로 진리란 유대인에게나 그리스도인에게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문제입니다.
03 불신자들을 위한 진리에 대한 두 가지 논증.
불신자들, 즉 전통적으로는 진리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들에게는 어떤 논증을 제시할 수 있을까요?
저자는 여기에도 두 가지 주장을 펼쳐보입니다. 소극적인 논증과 적극적인 논증입니다.
소극적인 논증이 좀더 간결하고 좀더 극적입니다. 하지만 적극적인 논증 역시 동일하게 중요합니다.
소극적인 논증이란, 진리가 없다면 오직 조작과 속임수만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삶의 어떤 상황에서든 불의에 맞서 일어설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은 바로 진리입니다. 진리가 없다면 오직 조작과 권모술수만 있을 뿐입니다. 진리가 없이는 속임수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간단하지만 매우 강력한 논증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중 그 누구도 속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분명히 해 둡시다. 진리 없이는 힘의 논리만 존재할 뿐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우리보다 강한 이들에게서 살아 남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하는 게임이란 조작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알렉산더 솔제니친과 바출라프 하벨이 맞섰던 벽입니다. 그들에게는 힘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진리가 있었습니다. 진리 때문에 그들은 속임수와 조작에 넘어갈 수도 없었고 넘어가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적극적인 논증은 좀더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바로 진리 없이는 자유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독재자나 억압적인 권위가 있다면, 무언가로부터의 자유는 매우 중요한 가치가 됩니다. 이런 소극적인 자유는 반쪽짜리 자유라고 말합니다. 자유는 단지 무언가로부터의 자유뿐 아니라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자유여야 합니다. 적극적 자유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아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일 수 있을 때 가장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체스터턴이 말하길 호랑이를 우리에서 풀어 줄 수는 있어도 줄무늬로부터는 자유롭게 해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줄무늬는 호랑이의 본질적인 일부입니다. 낙타를 동물원에서 풀어 줄 수는 있어도 등의 혹을 떼어 줄 수는 없습니다. 등에 솟은 혹이 낙타의 본질적인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스스로를 위해 그리고 자유로워지기 위해 진리와 성품, 사물의 본성을 밝혀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진실을 알아내야 합니다. 진리가 없으면 자유도 없습니다.
04 진리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두 가지 논증
진리를 극단적으로 의심하고 진리에 반대하며, 지극히 회의적인 방식으로 진리를 무시하는 이들을 위한 두 가지 논증을 제시합니다. 이 두 가지 논증은 매우 강력한 것입니다. 이 두 논증도 소극적인 논증과 적극적인 논증으로 나뉠 수 있습니다.
4-1 일관성이 부족한 상대주의.
극단적 회의주의자들에 접근하는 소극적인 방법은, 피터 버거가 말한 바와 같이 ‘상대주의자들을 상대화’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상대주의를 떠받듭니다. 하지만 그들의 상대주의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대개 이중 잣대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들은 과거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면서 현재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또 그들은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면서 자신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자기 자신들에 대해서는 상대주의를 적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리에는 명백한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상대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것이 진리라고 말하고 싶어도 그러한 일관성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간단히 생각해도, 어떤 생각이든 사고할 수 있고 어떤 논증이든 주장할 수 있다면, 그중 어떤 생각들은 주장할 수 있기는 하지만 명맥을 이어갈 수 없는 것들도 있습니다. 상대주의자들이 믿고 있는 것이 허구임을 폭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온갖 종류의 반대 논증을 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다 좋아, 알았어”라고 말하고 그들이 생각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진리일 거라고 인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모든 총각은 남자다’와 같은 분석적 주장은, 결론에서 주장하고 있는 내용이 이미 전제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 명제의 진위는 자동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종류의 주장은 오감을 통해 경험적으로 검증되어야 하고 검증되지 않을 시에는 무의미한 진술이 됩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적 주장이나 형이상학적 주장은 허튼소리로 여겨집니다. 예를 들자면, 개는 오감의 세계에 속한 존재로 경험적으로 증명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은 오감의 세계에 속하지 않은 존재로 경험적으로 증명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신은 넌센스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철학을 아는 사람이라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잘 알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검증 원칙 자체는 오감을 통해 검증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원칙 그 자체가 넌센스라는 것입니다!
상대주의자들을 상대화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의 사상에 대해 이중 잣대를 숨기고 있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4-2 초월성의 신호.
극단적 회의주의자들을 위한 두 번째 답변은 좀더 적극적인 것입니다. 피터 버거는 그것을 두고 ‘초월성의 신호 가리키기’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회의주의자이고 헛된 폭로를 일삼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버거가 지적했다시피, 그들의 경험 속에는 경험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지시하면서도 경험할 수 있게는 허락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경험 속에 그들의 경험과 모순되는 것들이 있고, 그들의 갈망 속에는 경험할 수 있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들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초월성의 신호입니다.
대체로 인간이 깨닫는 것은, 우선 인간의 본성에 악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 본성의 선함에 대한 믿음과, 그리고 좀더 세심한 심리 분석과 약간의 교육, 개선된 정치 체계를 통해 우리는 인간의 선한 본성을 보다 찬란하게 구현시킬 수 있다고 믿어 오지만, 어느날 문득 악이 인간의 본성에 내재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만약 무엇이 악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무엇이 악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신론자들조차도 진짜 사악한 것을 대면하게 될 때면 종종 직관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천벌 받을!’(God damn it, 빌어먹을)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것들은 정말 심오하게 잘못되어 그것들을 정죄할 수 있는 어떤 절대적인 기준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이 바로 피터 버거가 ‘초월성의 신호’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비로소 믿음을 갖게 됩니다. 초월성의 신호를 가리키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자 오스 기니스의 말입니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대담한 회의주의자들입니다. 극단적인 회의주의자들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기존의 믿음과 사고 체계를 회의하고 붕괴시킬 수 있는 자신들의 기술을 대단히 자랑스러워합니다. 그저 그 상대주의자들을 상대화해 버리십시오. 그리고 그들의 삶 속에 거할 수 있을 만큼 그들을 사랑하십시오. 언젠가 초월성의 신호가 켜지고 삐 소리를 내며 그들 삶 저 너머를 가리키게 될 때 그들을 감싸 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그 극단적인 회의주의자들이 방향을 선회해 자신들이 얼마나 틀렸었는지를 깨닫고 진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되는 것을 목격할 것입니다.
05 진리의 두 가지 도전
진리와, 진리에 잇따르는 두 가지 도전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입니다. 회의주의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특히 진리에 단단히 매인 자들, 진리에 대한 믿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자들에게 해당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참으로 만만치 않은 것입니다. 성경적인 관점에 따르면 유대인과 그리스도인 모두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동양의 사고나 세속주의와는 다릅니다. 성경은 진리의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에 대한 전반적인 틀이 제시하고, 그 틀 안에 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업 운영에서의 정직이나 성실, 언론의 진실성, 정치적 소통에서의 성품과 진정성, 과학에서의 사실 규명 등 삶의 원칙을 중시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성경적인 관점에서 유래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은 인간이 진리의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단지 진리를 추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왜곡하기도 한다고 지적합니다. 성경적 이상은 단지 우리가 진리에 대해 말하고 진리를 위해 싸우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가 진리 안에 거하고 진리를 실천하기를 바랍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진리에 대한 진정한 도덕적 도전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지난 몇 세기 동안 사상가들이 진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규정하였는가 돌아보면, 두 가지 방식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 두 가지 가운데서 갈등합니다. 하나는 진리를 우리의 욕망에 맞추어 규정하고 쫓으려는 방식입니다. 다른 하나는 진리에 우리의 욕망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방식입니다.
5-1 욕망에 맞추어 진리를 규정하기.
자신들의 욕망에 맞추어 진리를 규정하려는 방식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학자들은 진리에 온전히 열정적으로 헌신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많은 학자들이 실제로 그러했습니다. 교육이 정교해질수록 합리화와 잠재성 또한 커집니다. 그러자 인류의 지성들이 남긴 기록들은, 특히 현대 사회의 경우, 경고성 충고에 가깝습니다. 그들은 진리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찾아보고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가기 위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결정 내린 것입니다. 이런 방식은 단기적으로는 정말 좋습니다. 놀랄 일이 아닙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기, 자신의 현실을 스스로 개척하기, 하지만 삶을 좌지우지하는 이 핸들은 혼란과 상실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삶의 의미를 규정한 사람들이 가진 핵심 단어는 ‘구획화’입니다. 삶의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것을 별도로 분리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삶 전체를 진리와 연합시키지 않았다면, ‘구획화’란 삶에 통합성이 결여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즉, 자기의 욕망을 따라 진리를 규정하는 것입니다.
5-2 진리에 욕망을 맞추기.
진리에 욕망을 맞추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진리에 맞추어 욕망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이론의 여지없이, 단기적으로 이 방식은 불편합니다. 때로는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진리는 타협의 대상이 아닙니다. 진리는 실재이기 때문입니다. 장기적으로 볼 때,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이 그 실재와 나란히 맞추어질 때 우리는 인간답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여기 ‘구획화’와 대조를 이루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유대교와 그리스도인의 신앙에서 매우 강력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바로 ‘고백’(confession)입니다. 미셸 푸코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미워한 저명한 포스트모던 사상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푸코는 그가 유대교와 그리스도인 신앙에 대해 존경하는 한 가지가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바로 고백 혹은 자백입니다. 강압에 의한 고백이 아니라 자발적인 고백은 실제로 대단히 비범한 도덕적 행위입니다. 왜일까요? 누군가 “제가 틀렸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그들은 스스로를 공식적으로 무너뜨리게 됩니다. 단기적으로 보면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참으로 위로가 되고 자유로운 일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진리는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미국 헌법을 주창한 이들의 생각에서도) 진리는 나라를 세우는 주춧돌 가운데 하나입니다. 진리가 없이 이 나라는 자유롭지도, 자유를 유지할 수도 없습니다. 지금 나라의 근간이라고 여겼던 많은 기초들이 산산이 조각나고 내팽개쳐졌습니다. 놀랄 만한 속도와 규모로 말입니다. 하지만 개인의 차원에서나 국가의 차원에서도 진리가 없다면 자유도 없습니다.
예수의 말씀을 따라가 보십시오.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논란과 논쟁을 겪든, 결국에 가서는 예수님이 얼마나 간결하면서도 분명하게 진리를 이야기하셨는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말씀은 진리를 놀랄 만큼 심오하게 표현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오늘날 미국의 비극은 이 모토가 캠퍼스의 벽은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을지 몰라도 캠퍼스를 오가는 이들의 마음속에는 살아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진리, 인간성 그리고 자유. 간단히 말해 우리는 뭐든 선택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진리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고 용기 있게 그 본연의 길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포스트모더니즘이 가져온 최신의 회의주의와 함께 흘러갈 것인지,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진리가 없으면, 자유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