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예수의 이 경고는 그 성격이 앞의 것들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보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전후 문맥과 관련지어 볼 때 전혀 연관이 없는 독립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선 이런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는 이웃과의 관계상 피해야 할 또 다른 극단에 대하여 말씀하신다고 보는 방식입니다. 앞에서, 마태복음 7장 1-5절에서 (문자적으로 읽어서 판단하기를) 교만한 판단을 하지말라는 명령으로 인해, 그렇다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어야 하느냐 하면,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본문의 요지라는 식으로 읽을 우려가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로서,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관대하고 애정이 있어야 하며,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거룩한 것들에 대하여는 책임을 져야 한다. 제자들은 남을 판단해서는 안되지만, 거룩한 것을 발로 밟고 그것을 던져주는 사람에게 위협의 몸짓을 취하는 ‘개’와 ‘돼지’는 분별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 말씀을 단순하게 보면, 알 만한 사람한테 이야기해라, 알아듣는 사람한테 말해라, 이렇게 보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이 익숙한 은유로서, “거룩한 것”과 “진주”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돼지”가 더러운 짐승을, 그리고 “개”는 이방인들을 의미했으므로, 이 말씀은 결국 이방인들에게는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선 개, 돼지를 경멸할 만한 대상으로 보고 한 말씀이 아닙니다. 개 돼지에게는 진주보다 더 급한 다른 무엇이 있다, 그런 뜻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진주를 팔아서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사면 됩니다. 그러나 개와 돼지에게는 그런 개념이 없습니다. 개와 돼지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우리가 그저 보편적인 이해를 갖고 보자면 먹을 것이 가장 급한 것입니다. 돼지는 자기 앞에 던져진 진주를 팔아, 당장 필요한 먹을 음식을 얼마나 많이 살 수 있는가를 모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5장 이후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의와 다른, 인간이 자랑하는 의에 내포된 결정적 결함을 지적하는 내용을 예수의 말씀을 통하여 추적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5절에서, 인간의 비판 정신이 의를 추구하지만, 이 의가 자기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는가, 남의 눈에 티를 볼 수 있지만, 자기 눈에 들보를 깨닫지 못하며, 깨닫는다 하여도 스스로 빼낼 수도 없는, 그래서 겉치장 밖에 할 수 없는 의인가를 지적하였습니다.
분명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가 나름대로 옳습니다. 하나의 진리일 수 있고, 도덕일 수 있고 또 저들이 그것을 진심과 호의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을 지켜야 하고 그 말을 들어야 하는 사람들을 변화시킬 능력은 없습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상대방이 얼마나 잘못했고 지금 어떻게 해야 된다고 말해서, 상대방이 그 말에 귀를 기울이고 납득하고 감사해야 하는 그 정도 수준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와 대비되는 예수 안에서의 하나님의 의가 왜 필요한가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 의는 뭐냐, 요한복음 6장 53절 이후에 이렇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요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6: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요6: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예수는 진주를 던지지 않고 진주를 팔아 음식을 주기로 하신 겁니다. 당신이 우리를 설득하러 오거나 정죄하러 오시지 않고 당신을 우리의 양식으로 내 주시기로 하신 겁니다. 그래서 그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라고 권함으로써 우리라는 존재가 우리의 살과 피가 예수로 재구성되는 일을 위하여 오셨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넉넉하심 속에서 비로소 우리는 누구의 말을 들을 수 있고, 호의를 받을 수 있고, 비판을 감수할 수 있고, 화해할 수 있고, 용서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꼭 '예수 안에서'만이라고 해야 됩니까?
우리가 우리 자연인들이 현실에서 가장 많이 갈등을 겪는 대목이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을 납득하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호의, 진심, 희생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수용되고 납득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상대방이 몰라서 그렇지 않습니까? 아는데 그것을 받아들일 어떤 가장 근본적인 어떤 그릇도, 자세도, 근거도 우리 안에는 없습니다. 거기에 대한 갈증은 있지만, 우리 안에서 그것을 받을 만한 어떤 그릇이 스스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격이 있고 영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리와 행복과 생명과 옳음과 또 용서와 화목과, 이런 모든 것들을 받아들일 어떤 것도 우리 안에는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들어 오면, 우리는 그걸 치워 버리거나 뱉어 버리거나, 그것이 우리에게 양식이 되고 안에서 우리를 만드는 어떤 것도 되지를 않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가 들어오시지 않으면", 그로 말미암아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넉넉한 인격과 영적인 부요함을 가지지 않으면, 무엇을 담을 수도, 무엇을 받을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이 마태복음 7:7절,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마라, 진주를 돼지 앞에 주지 마라" 라는 말씀이 가지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 없이는 어떤 호의도 어떤 진심도 어떤 옳음도 무용합니다.
이제 복음서 저자들이 진정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 예수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사, 당신의 귀한 백성을 불러, 그 부르신 우리를 부활시키시는 예수의 생명으로 새로 빚으시는 일이 전제되지 않으면, 우리에게 진리, 진심, 헌신, 의미, 가치, 이상, 모두가 힘을 잃습니다.
우리가 7장에 들어와 지금 다루는 본문들을 비틀어 긍정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비판하지 말고) 긍휼을 베풀어라, 나아가 용서하라, (그리고 앞에서 이미 예수가 명령하신 대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실상 우리에게는 이런 명령을 수행할 아무런 대책이 없다는 걸 알아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겉으로의 의로서 이런 율법의 요구를 수행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어느 한 사람의 변화를 위하여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우리 스스로에게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설명을 잘 합니다. 내가 다른 무슨 음흉한 생각을 가지고 내 욕심을 위하여 상대방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이 되면, 상대방이 납득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사람은 그것으로 납득하지 않습니다. 우리 영혼의 갈증은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영적 풍요로움을 받지 않고는 인간은 인간다울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것이 “비판하지 말라”에서부터 출발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시급한 것이 무엇이냐 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영적으로 살찌우는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만 허락되는 것이고, 그것으로, 우리는 비로소 예수 안에 있다는 것으로 자신과 이웃에게 대한 책임을 다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안에서 얻은 이런 해답들과 넉넉함들과 이제 주고 받고 용서하고 기다리고 이해할 수 있는 일들을, 나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불쌍히 여기는 것으로, 친절하게 하는 것으로, 그리고 용서하는 것으로, 긍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으로 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의 본성, 상대방을 내 마음에 들게 명분과 논리로 강제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