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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부터 처음 읽기/마 7:1-29 산상수훈 3

마 7:7-12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by pooh_in_the_Way 2021.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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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7: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7: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마7: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마7: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마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기독교 자체 안에서가 아니라 밖에서 기독교인들의 신앙 내용이라고 해도 좋고 성경의 가르침 중에서 최고의 내용으로 꼽는 것이 마 7:12입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황금율(the Golden Rule)이라고 합니다.
이 단락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로 시작하여 '구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어서,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라는 일종의 간구와 응답 관계에서 결론으로 등장합니다. 보통 이 내용을 기도와 연결하여 생각하곤 합니다. 기도에 관한 것보다는 폭넓게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어떻게 찾아 오시며 어떻게 대접하시는가와 관계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은 "비판하지 말라"로 시작하였습니다. 비판하지 말라는 것은 쉽게 이야기하면 정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6절에 보듯이,

마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돼지나 개에게 진주를 던지는 사람은 잘못하는 일이다는 것이었습니다. 개에게는 개밥을 주고 돼지에게는 돼지밥을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돼지에게 진주를 주고 그 진주를 못 알아본다고 돼지에게 화를 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누구에게 진주를 주었다는 것으로, 누구나 자신에게 항복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이야기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가치 있는 것을 준다는 입장에 서면, 무례해집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자신의 진심과 가치로 판단합니다.

 

이 전체적인 문맥에서 보면, 쉽게 기도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제가 조금 달라 보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응답을 받고야 만다는 식으로 해석하면, 12절은 하나님과의 아주 고약한 관계 즉 주고 받는 식의 기도와 응답으로 해석하고 맙니다.

 

7절 이하에 나오는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것은, 6절까지의 문맥에서, 상대방을 명령하거나 상대방을 복종시키려 하지 말고, 상대방에게 요청하라는 것입니다. 요청하라는 것은, 상대방이 듣고 반응하도록 하여야지, 상대방의 마음을 내 마음대로 꺼내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12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라는 결론에 연결하여 이해되어지는 대목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대접하셨다. 무력으로 굴복시키거나 강요하거나 억지로 복종시키지 않으셨다. 그 아들을 보내어 그 아들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어,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요청하고 계신다. 구원을 허락하셨으나, 우리로 하여금 정한 마음으로 반응하도록 요청하고 계신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접하시는 방법이다. 모든 인격자에게 대하는 방법을 본을 보이시는 것이다"로 해석 됩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인격자로 대접하셨다. 그러니 너희도 서로의 관계를 필요와 착취와 통제의 대상으로 대하지 말고 마땅히 대접 맏아야 할 인격자로 대접해라." 


황금율 말미에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가 붙어 나옵니다.

마태복음 22장 34절에 이렇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마22: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마22: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마22: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마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여기서 말하는 ‘계명’은 십계명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모든 율법의 요약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첫째되는 계명이란, 십계명을 주셨을 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두 돌판에 계명을 써서 주셨는데, 첫번째 돌판에 제 일 계명부터 제 사 계명까지, 두번째 돌판에 제 오 계명에서 제 십 계명까지 있습니다.

첫번째 돌판에 있는 제 일 계명에서 제 사 계명은, 여호와만 섬겨라, 우상을 만들지 마라,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라, 하는 하나님께 대한 계명입니다. 그리고 제 오 계명부터는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이웃에게 거짓 증거하지 말라,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얼핏 보기에는 이 계명들이 모두 매우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어투의) 명령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것을 굉장히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설명하십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율법에서는, 대표적으로 십계명에서는, 범법의 경계선을 가르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법을 정하고 범법한 자는 처벌하시는 하나님으로 보입니다. 마땅히 그것으로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예수는, 더 나아가,  그 하나님이 사랑을 요구하시는 하나님, 사랑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가, 성경이 전체를 통하여 가르치는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가르치는 하나님의 뜻은 이겁니다. “너희에게 하나님은 이 하나님 한 분으로 충분하다”, 이것이 첫째 계명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와 만족과 감격의 충분한 하나님이시다, 그런 뜻입니다. 우리의 필요를 채우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만족케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감격케하시는 하나님이다, 감사할 뿐입니다.

오 계명부터 십 계명까지는 둘째 계명이라고 소개하는 내용은, “네 이웃을 약탈해서 네 필요를 채울 필요가 없다”, 그런 뜻입니다. “너는 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충분하기 때문에 네 이웃하고 경쟁하거나 싸우거나 시기하거나 증오할 필요가 없다.” 이것이 둘째 계명입니다.

 

이 계명을 이해하는 이런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놓고 보자면,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분명 이런 결론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이웃을 이용하거나 이웃을 격파할 필요 없이 하나님안에서 충분해야 합니다. 내가 이웃과 경쟁과 싸움과 증오를 벗어날 때, 이웃은 나를 나로써 존귀히 여길 것이요, 우리도 우리의 이웃을 약탈의 대상, 수단 이해관계로 보지 않고, 하나님이 저들의 필요를 채우고 내가 저들의 필요를 채울 수 없다는 사실 속에서 이웃을 내 손에서 놓고, 경멸과 멸시, 수단, 흉악한 생각을 비로소 털어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7절, "구하라"는 것은, 상대방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며, 내가 문을 부수고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문을 좀 열어 주십시오!" 상대방에게 거룩하고 가치 있는 것을 준다 하여, 상대방을 함부로 조작할 수 없는 인격적인 대상으로 여긴다면, 어느 경우든 나는 요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찾으라"는 것은 내가 진심을 가지고 있고 명분을 가지고 있다 해서, 내 앞에 오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찾으라는 것은, "너 이리 와"가 아니라, 내가 찾아 다녀서 가야 합니다. 인격과 영혼이라는 것은 인간이 조작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독립된 인격은 마음대로 굴복시킬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마저도 그런 방법을 택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문을 두드리라"는 것은, 당사자가 빗장을 풀어 문을 열어 주지 않는 한 남의 마음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문이나 빗장이 안으로 결려 있습니다. 당사자가 우리의 요청을 이해하고 우리의 필요에 응답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는 결코 기도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기도, 신앙의 실천, 신앙의 한 방법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의를 만들어 낼 실력이 없음을 인정하라, 너희의 한계를 확인하라", 이겁니다. "너희 안에서 의를 만들어 낼 수 없다, 너희가 만들어 내는 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뿐이다. 그것은 명분이 있고, 그것은 잘난 척은 할 수 있지만, 실제적인 능력은 가지지 못한 것이다. “외식 한다” 그러죠. 겉치레를 할 수 밖에 없다, 한 영혼을 회복시킬 수 없다, 살려 낼 수 없고 채울 수 없다" 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구하라!” 이겁니다. 밖에 있다, 너희 안에는 없다, 그리고 뭐가 등장하느냐 하면,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는 데"로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르리라'가 연결됩니다.

그리고 9절 이하, 아버지와 아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시는 길은 딱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무서운 신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아버지가 된 것은 예수로 말미암아서 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시고, 당신의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시며, 우리를 끌어모아 당신 안에서 하나님을 같이 아버지로 부르도록 하십니다. 이 단락 속에 뭐가 뭐가 중요하게 들어가 있느냐, 예수로 말미암은 하나님과의 관계 개선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개선이라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의를, 우리 홀로 만들어 내는 의에서는, 자신에게나 이웃에게나 그 영혼과 인격에 답을 줄 수 없었던 존재로부터, 아버지의 자녀가 됨으로 아버지로부터 우리의 필요를 얻을 수 있는 자리로 우리를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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