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오늘 본문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성경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길이라든가 진리라든가 생명이라는 것에다 예수님 자신의 인격을 결부시키고 계시다는 사실이 특별히 주목할 점입니다.
원래 길이니 진리니 생명이라는 것은 어떤 도(Way)로서, 사람이 깨우칠 수 있는 것이며 동시에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야 마땅할 텐데 여기서는 그런 식으로 나눠 가질 수 없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것이 놀라운 점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이런 표현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나는 생명의 떡이라!`, `나는 세상의 빛이라!`,`나는 선한 목자라!` 등의 표현들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떡을 가져 오셔서 나눠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떡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름을 나눠 주셔서 불을 붙여 줌으로 빛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빛이신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중심으로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살펴 보고자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갑자기 제자들에게 경악스런 침묵의 순간이 엄습합니다. 그들은 이미 자기들 중의 하나가 배신자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유다가 밤의 어두움 속으로 빠져 나가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이제 베드로가 스승을 부인하리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예수님 역시 제자들 가운데 있는 배신에 직면하여 심령이 괴로웠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시는 명령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이전의 예수(여호수아, 히브리어로는 철자가 같다)가 이스라엘 자녀들에게 반복하였던 말을 상기시킵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지금 더 위대한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자녀가 따라올 수 있는 길을 열기 위하여 더 깊고 더 넓은 요단강을 건너려 하고 있습니다. 그 길은 믿음의 길인데,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히 12:2)로서 어두운 물을 통과하도록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분에 대한 믿음에 이르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사역을 시작하셨고, 이제 그분은 모든 흑암의 세력이 자신을 엄습할 완전한 침수(침례)에 의해 그 세례를 완성하려 하십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은 어디인가?
우리가 하나님과 동거하고 그분이 우리와 함께 거하실 곳은 어디인가? 그것은 죽음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세계일 뿐인가? 그것은 인류의 대표적인 종교 체험이 장래를 내다본 방식입니다. 즉, 현재 우리에게 가려져 있는 커튼 너머의 저 세상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 이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나온 약속은 그와 다릅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셔서 그들을 예수님에게로 영접하실 것입니다. 신랑이 신부를 다시 만나러 와서 그녀를 위해 준비된 집으로 데려갑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 함께 거하는 곳이 없음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최후의 완성이 이르기까지 우리는 홀로 전장터에 남겨져서 풍파를 헤쳐나가야 하고 마지막에 가서야 거할 곳이 있으리라는 희망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위안이 담긴 말씀입니다. 곧 이어질 담론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거하는 것과 그들이 그 분 안에 거하는 것, 그분이 아버지 안에 거하는 것에 관해 많이 이야기하실 것입니다. 이제 그 대화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그들을 재확신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내 아버지 집에” 거할 처소가 많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처소란 우리가 이미 배웠듯이 손으로 지어진 건물이 아닙니다. 죽음 너머의 다른 세상도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설립된 것으로서 성령 안에 있는 아버지의 새 처소입니다.(참 2:19-22, 참조 엡 2:19-22).
요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2: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요2: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2: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엡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엡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엡2: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엡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 것입니다. 즉 우리는 아직도 도상에 있으면서도 벌써 여정의 마지막, 곧 사랑하는 자들을 만나는 기쁨, 주와 함께 있는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살전 4:17).
살전4: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바로 이런 이유로 헤어짐이 그들을 슬프게 하지만 슬픔은 잠시뿐이라고 확신시키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들을 위한 처소를 준비하려 가시는데 그들은 그곳에서 예수님과 함께 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처소가 단지 여정의 목적지로만 이해되어서는 안되는데, 그 도상에 거할 처소가 많으며 그 모든 처소는 아버지의 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질문과 동일하게 어디로 가시는지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대답은 “너희는 그 길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도마의 즉각적인 이의 제기는 타당한 반응입니다.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니아까?” 그런데 이 분명한 이의 제기로 말미암아 문제의 핵심이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는 그 목적지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인 삶이나 세상의 삶의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 그 한계를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을 우리는 모르고 있으며 알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상상력을 뛰어 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목적지는 알지 못하나 그 길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커튼을 관통하는 그 길은 예수님의 ‘육체’로서(히 10:20), 삶과 죽음과 부활을 겪으신 예수님의 구체적인 인간성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그 길을 가르치신다거나 그 길로 우리를 안내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의 가르침에 감사하고서 우리 나름대로 그 길을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분 자신이 바로 그 길이며 따라서 오직 그분의 인간성의 일부가 됨으로써만 우리는 그 길 위에 있게 되고, 목적지를 보지 못할지라도 길을 잃지 않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길, 곧 휘장을 관통하는 길을 제공하는 도상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도입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서만 기능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가 십자가의 길을 배운 다음 나중에 따르게 될 길입니다(요 21:18-19).
이것이 바로 참되고 산 길인데, 이는 예수님이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진리라는 의미는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신실성이 계시되고 실제로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고후1: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이러므로 그 분 안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신실성을 입증하십니다.
예수님이 생명이신 것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인간을 위하여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은 것을 몸에 짊어지면서 그 길을 따라갈 때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의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됩니다(고후 4:10).
고후4: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사실 그 길을 좇는 것이 아버지께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 나아와서 그분이 아버지임을 할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는데, 그 길은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로 가는 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아는 것은 곧 아버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인간 경험으로부터 심지어 인간의 종교적인 체험까지도 포함하여 추리하여 하나님을 아는 참 지식에 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참 지식에 이르는 것은 예수님, 유일한 길 되신 분을 앎으로써 그리고 그분이 가신 길을 따라 그분을 좇음으로서만 가능합니다.
복음서 전체로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예수님이야말로 세상 속에 임재하는 하나님의 진리요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사실과, 아버지를 안다는 것은 그 길, 즉 예수님 자신, 그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커튼을 가로질러 열어 놓은 길을 좇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