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1: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1: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시1: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1 그대, 하나님께서 좋이하실 수밖에!
죄악 소굴에 들락거리길 하나,
망할 길에 얼씬거리길 하나
배웠다고 입만 살았길 하나.
2-3 오직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혀 밤낮 성경말씀 곱씹는 그대!
에덴에 다시 심긴 나무,
달마다 신선한 과실 맺고 잎사귀 하나 지는 일 없이,
늘 꽃 만발한 나무라네.
4-5 악인들의 처지는 얼마나 다른가. 바람에 날리는 먼지 같은 그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는 죄인들이라 떳덧한 이들 사이에 끼지 못하네.
6 그대의 길은 하나님께서 지도해 주시나, 악인들의 종착지는 구렁텅이일 뿐.
_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시가서》, 1편
시편 1편의 시작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히브리어로 보면, 첫 단어가 ‘아쉐레이’(복 있는)입니다. 구문론적이나 성경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1절은 절(clause)이 아니라 구(phrase)입니다. “행복한 사람.” 히브리어로 ‘아쉐레이 하이쉬’입니다. ‘아쉐레이’는 “다시 없는 행복” 곧 지복(至福)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행복 가득한 사람”입니다. 시편 1편이 시편 2편과 함께 표제어 없습니다. 시편 2편의 마지막 어구가 역시 ‘아쉐레이’입니다.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그런 면에서 “행복한 사람”은 시편 1편뿐 아니라 시편 전체의 제목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복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주제를 1편에서도 그리고 시편 전체에서도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설명하기 시작하면서, 먼저 복수로 표현된 세 집단과 대조합니다.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이 누구일까요? 그리고 시편 1편의 저자는 치밀하게 점진적 표현을 구사합니다. ‘꾀’, ‘길’, ‘자리’로 점진적인 이동이 있습니다. 그리고 동사는 ‘따르다’, ‘서다’, ‘앉다’입니다. 상상을 해 보아야 합니다. ‘악인들의 꾀’는 무엇일까, ‘죄인들의 길’은 무엇일까? ‘오만한 자들의 자리’는 무엇일까? 원문에서는 ‘자리’보다는 ‘모임’, ‘회합’이 더 가깝다고 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이들과 같은 꾀를 갖지 아니하고, 그들이 가는 길을 걷지 아니하고, 그들의 모임에 함께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1편을 그림으로 그려보자면, 한 ‘복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걷는 길에는 악인들이 꾀를 내어 유혹하고, 죄인들의 길을 아차 하면 걷기 쉽고, 오만한 자들의 모임은 세를 불려 그를 비아냥거리고 업신여깁니다. 삼중의 유혹과 위협을 느낍니다. 그는 오직 하나, 여호와의 율법을 필사적으로 붙잡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찌보면 어쩔 수 없어(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여호와께 피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인간의 권고가 아니라 여호와의 교훈(2절의 율법은 모세 율법이라기 보다는 ‘교훈’에 가깝습니다)을 따릅니다. ‘묵상하다’는 단어는 내면화된 인지적 활동을 가리키기보다는 말을 내뱉으며 숙고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그 일은 차라리 기도와 찬양으로 중얼거린다고 보는 것이 더 맞습니다. 시편 전체도 비슷합니다. 시편 전반부는 왜 그리 원수들이 많이 등장합니까? 원수들에 둘러싸여 어찌 할 바를 모르는 시편 저자는,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하나, 하나님 앞에서 아우성칩니다. 왜냐하면 호소할 데는 하나님 밖에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침내 찬양으로 끝냅니다(꼭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현실적인 조치나 안전을 위한 응답을 받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알아 주신다고 그는 마침내 믿게 됩니다. 그것으로 되었다고 안심하고 그 자리를 떠납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시련과 내적 갈등 속에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시편 저자는 ‘그의 죄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는 일도 많습니다. 주변에서 하나님 부재와 무용론을 걸먹거리며 ‘네 힘을 믿어 보라’고, ‘나를 의지해 보라’고, ‘그렇게 살아 보았자 누가 알아주더냐’고, ‘쉬운 길이 얼마든지 있잖아’라고, ‘네 하나님이 어디 있더냐’라고, 유혹하고 비아냥거리고 위협하는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 틈 사이에서 살아야 하는 이들은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복 있습니다. 그들이 세상의 길에서 형통하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 궁극적인 목적지는 의인들의 모임이며,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는’ 일이 그들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묶여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습니다. 나무의 뿌리는 본성적으로 물을 찾습니다. 시냇가에 심겨진 이상, 그 잎사귀는 마를 수가 없습니다. 철을 따라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알기에 기다리며 믿으며 견딜 줄 압니다. 그는 총체적으로 형통합니다. 그 이미지는 안정성, 지속성, 신성함, 생산성입니다.
팔복에 가봅니다.
우선 참고하시라고,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복음서》 성경에서의 팔복 부분을 옮겨 적습니다.
3 벼랑끝에 서 있는 너희는 복이 있다. 너희가 작아질수록 하나님과 그분의 다스림은 커진다.
4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고 느끼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에야 너희는 가장 소중한 분의 품에 안길 수 있다.
5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자신의 모습 그대로 만족하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 너희는 돈으로 살 수 없는 모든 것의 당당한 주인이 된다.
6 하나님께 입맛이 당기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분은 너희 평생에 맛볼 최고의 음식이요 음료다.
7 남을 돌보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렇게 정성 들여 돌보는 순간에 너희도 돌봄을 받는다.
8 내면세계, 곧 마음과 생각이 올바른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에야 너희는 바깥세상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다.
9 경쟁하거나 다투는 대신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 너희는 진정 자신이 누구이며, 하나님의 집에서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알게 된다.
10 하나님께 헌신했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 박해로 인해 너희는 하나님 나라에 더 깊이 들어가게 된다.
11-12 그뿐 아니다. 사람들이 내 평판을 떨어뜨리려고 너희를 깔보거나 내쫓거나 너회에 대해 거짓을 말할 때마다, 너희는 복을 받은 줄로 알아라.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진리가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그들이 불편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일어날 때 너희는 기뻐해도 좋다. 아예 만세를 불러도 좋다! 그들은 싫어하겠지만, 나는 좋아하니 말이다! 온 천국이 박수를 보낼 것이다. 또한 너희만 그런 일올 당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라. 내 예언자와 증인들은 언제나 그런 고생을 했다.
팔복에서의 시작은, 마태복음에 의하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입니다만, 실상 헬라어 성경에는 산문적이기보다는 시적인 표현들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그의 산상수훈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마카리오스(복 있는).” 곧 “복이 있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아.” 그 다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이 있도다, 애통하는 자들아, …”, 이어 “복이 있도다, 온유한 자들아,…,”, “복이 있도다, 의에 주리고 목 마른 자들아, …”, 계속 반복하는 패턴입니다. 도대체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해 하며, 온유하며, 의에 주리고 목 마른 자들은 누구일까요? 예수는 팔복 선포에서, 복 받을 조건이 아니라 복을 이미 받은 자들의 상태을, 복 받는 자의 증상을 말씀하고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죄인이라고 절망하기에 하나님께 달려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에 대하여 애통해 합니다. 그들은 절대적으로 하나님 앞에 호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의에 목 말라 합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기에 이웃에 대하여도 긍휼히 여깁니다. 그들은 하나님 외에 세상의 어느 것에도 한 눈을 팔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렇지만 세상 누구와도 화평을 이룹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기꺼이 세상의 협박을 받아냅니다. 또한 그것을 기뻐합니다. 예수가 가신 길을 따라가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에 세상이 내미는 복을 바라지 않습니다. 세상과는 화해할 수 없기에 하나님이 내미신 손을 놓치지 않기 위하여 세상에서의 험한 길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하나님께서 신원하신다고 믿고 담대하게 삽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로서의 품위를 놓치지 않기 위하여 힘써 이미 마음에 새겨진 예수의 말씀을 순종하여 따릅니다. 그들은 분명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시편 2편은 다윗 가문에서 나오는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 즉 메시아를 위해 여호와께서 이루시려는 것과 그 메시아를 통한 계획의 성취를 그리고 있습니다. 시편 2편에서 찬미하는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는 예수, 그리고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복된 선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