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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관한 크고 작은 소감들/종려주일과 고난주간에

고난주간 다섯째날 - 막 15:34 묵상

by pooh_in_the_Way 2021.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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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15:33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막15: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막15:35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막15:36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고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막15: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막15: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막15:39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1

예수는 6시간 동안(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가 갑자기크게 소리를 지르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정오부터 땅이 어두워진 것은 심판을 의미한다. 마가가 묘사한 예수의 십자가 처형 기사는 9시까지  땅을 덮었던 어두움만큼 침울하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배신당하고 버림 당하고 부인당하고 극단적인 고독 가운데서 죽음에 이른다. 그가 아들이라고 확언하는 구름으로부터 나오는 음성 대신에  그를 버렸는가라고 묻는 십자가로부터의 고뇌에  부르짖음을 우리는 듣는다. 

 

예수께서 이와 같이 소리를 지르신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부분적으로 그에게 임했음을 보여 준다. 이것은 앞서 마가복음 14:27에서 인유된 스가랴 13:7과도 부합한다.

 

막14:2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거부한(12:1-12 나오는 포도원 농부 비유를 보라) 자기 백성을 이스라엘의 목자로부터 치시기 시작한다. 하나님께서 이미 일어난 음란한 행위로부터 눈을 돌리실  어두움은  땅을 덮는다

 

악이 십자가에 있는 예수를 삼켜버렸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 잔인하게 저질러진 인간 소경됨의 극치요 죄악이다그것은 뒤죽박죽된 세상을 보여준다예수는 사회의 무법한 죽음에 의해 죽으신 왕이다예수는 구원하러  백성들에게 거절당한 메시야이시다예수는  능력을 자기를 위하여 사용하지 않으신외관상으로 무기력하게 죽으신 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모든 전통적인 상징들이 뒤집어졌다약함은 강함의 표시다죽음은 생명으로 가는 수단이다하나님의 저버리심이 하나님과 화해로 이끌어간다예수를 처형했던 흉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시행하고(execute ‘시행하다’  ‘사형시키다 의미를 동시에 가진다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하였고(14:36), 예수는 하나님의 순종하는 아들로서 기꺼이 복종하셨다(10:45). 그들은 또한  죽음이 그의 끝이 아닐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오히려 그것은 그들의 전체 질서의 종말을 의미했다그들은 어떻게 그와 같이 무능력한 죽음이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을 드러낼  있는지를 헤아릴  없었다.

 

어떤 사람은  부르짖음을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의 관점에서 그리고 죄인을 하나님으로부터 갈라놓은 죄의 성격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한다( 59:2). 예수는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했던 죄에 대한 심판에 직면하여 그가 바라바의 자리를 대신하였던 것처럼,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쓰라린 진노의 잔을 마셨다. 바울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또한  3:13 보라) 기록하고 있다.

 

땅을 덮었던 어두움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며, 예수는  심판의 자리에 있었다. 죄인들을 대신하는 그는 우리가 받아야할 징계를 받으셨고, 하나님과 분리되셨을  심각한 공포를 표현하셨다. 그는 인간 안팎에 있는 악과 만나셨으며, 그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악으로부터 돌아서시는 하나님을 깨달았을  부르짖으셨다( 21:23;  3:13).  두려움의 시간에 예수는 의식 속에서 극단적인 형벌을 당하셨고, 하나님에 의해 두려운 음부로 내던져졌을  부르짖으셨다.

 

많은 사람은 이러한 해석을 속죄하시는 예수의 사역 가운데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아버지와의 목적의 하나됨과 모순된 것으로 의문시한다. 만일 고린도후서 5:21 인용한다면, 5:19 인용할  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인간에게 배반을 당하고, 버림당하고, 고소 당하고, 부인당하고, 발가벗겨지고 조롱당하신 예수가  처참한 시간에 하나님에게 버림을 당했다는 사실을 어떤 이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움을 발견한다. 우리는 인자가 극단적인 비하를 당할 것이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유기를 수반하지 않았다는 분명한 암시를 가지고 있다. 마가복음 어디서도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가 하나님이 죄로부터 돌아서셔야 했음을 요구했다는 암시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은 예수의  말씀을 패배와 소외에 직면하여 인간적 절망의 부르짖음으로 해석한다. 예수의 사역 전체를 통틀어서 예수가 유지하셨던 신뢰가 갑자기 그에게서 무너졌다.

 

2

예수는 수난 기사의 여러 대목들에 반영된 있는 시편인 시편 22:1 인용하셨다.

 

시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한 예언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예수의 입에서 나온 명시적인 인용문이다( 14:27에서 13:7 인용한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이들은 예수께서 시편 전체, 특히 신원(伸冤) 회복(回復) 얘기하는 결론부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22:22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

시22:24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

시22:30 후손이 그를 섬길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시22:31 와서 그의 공의를 태어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

 

성경말씀으로 살았고, 자신이 성경 말씀을 이루고 있었다고 믿었던(14:49)  수가 절망적인 곤란 가운데 있었을  위안을 얻기 위하여 성경으로 돌아갔으리라는 것은 타당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마가는 예수가 부르짖었을 , 그때가 9  유대인의 기도의 때였다는 사실(참조  3:1) 예수가 하나님의 보호를 완전히 신뢰하는 의로운 고난자의 기도를 드리셨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가 조롱을 받았고( 22:7-9), 그의 힘이 소진했고(22:15-16), 그의 손과 발이 찔렸고(22:16), 그의 옷이 나누어졌으므로 인하여(22:18) 시편 22편이 자연적으로 마음 속에 떠올랐다. 그러므로 예수는 단순히 고통에 대한 괴로운 부르짖음을 내뱉은 것이 아니라, 고통의 표현으로부터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신뢰로 이동하는  애가를 의도적으로 인용하셨다. 하나님이 실로 그곳에 계시고 그를 구원하실  있다고 믿지 않았다면, 예수가  부재하신 하나님에게 외치셨는가? 

 

아마도 예수는 이런 낙관적인 결론부를 포함한 시편 전체를 염두에 두셨을 것이지만, 우리는 예수께서 버림받았다고 느끼신 것의 현실성을 약화시켜서는 된다. 예수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는 번의 부름말을 통해 있듯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으나, 자기가 전적으로 버림받았다는 것을 느끼신다.

 

시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시22: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시22: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시22:4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시22:5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시22: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그리스도 당시의 구약 성경에는 오늘날의 성경과 달리 장과 절이 표기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랍비가 청중에게 시편이나 다른 성경 말씀을 가르치려면,  본문의  구절을 먼저 읽어주어야 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렇게 부르짖으심으로 시편 22편을 가리키셨고,  분이 짊어진 고난의 성격과 목적을 계시하셨다.

 

1, 2절은 메시아가 불평하는 말을 기록하고 있다. 메시아는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셨다고 생각했다. 메시아는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셨고, 자신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셨다고 생각했다. 이는 상징적으로나 비유적으로 버림받았다는 뜻이 아니다. 메시아는 실제로 버림받았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상태를 가장 생생히 느껴본 사람이 있다면, 바로 갈보리의 십자가에 매달리신 하나님의 아들이실 것이다.

 

4, 5절은 메시아가 당해야  고통이 한층  강렬해진 이유를 설명한다. 메시아는 언약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떠올렸다. 그는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말했다. 한눈에 봐도 서로 대조되는 상황이 분명히 드러난다. 언약 백성의 역사에서 의인이 하나님께 부르짖을  구원받지 못한 적은  번도 없었다. 그러나 무죄한 메시아는 온전히 버려진 상태로 나무에 매달렸다. 하나님이 그분을 버리신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하나님은  독생자를 버리셨을까?

 

예수님은 고통에  부르짖음으로  곤혹스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대신하셨다. 그분은 3절에서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6절에서는 자신이 벌레일 , 사람이 아니라는 입에 담기도 무서운 말을 토해내셨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가리켜 그렇게 모욕적이고 자기비하적인 표현을 사용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분이 자신을 벌레라고 하신 것은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 되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스스로를 그렇게까지 낮추어야   크고 두려운 이유가 있으셨기 때문일까?( 22:6)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사람들이 어찌 저를 버리나이까?”라고 부르짖지 않으셨다. 그분이 알고자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신 이유였다.  의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이 우리 모두의 죄를 예수님께 전가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벌레처럼 버림받아 짓밟히셨다 가혹한 진리 안에서 찾을  있다( 53:5-6).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후대의 복음서 기자들이 절규의 맺음말을 마가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로 그려낸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아버지여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23:46)에서는 하나님의 뜻과 보호에 대한 체념의 부르짖음을 듣는다. 이루었다( 19:30)에서는 승리자의 승리의 부르짖음을 듣는다(19:30, “ 이루었다”). 

 

3

사실상 말씀은 겟세마네에서 있었던 기도의 마지막 부분이다. 그곳에서 그는 애통 속에서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온전한 공포를 느끼면서도 아버지에 대한 깨어지지 않은 신뢰를 확증했다(14:32-42).

 

다시 말해서, 예수는 시편 22편을 사용하심으로써 자신의 고난과 비극에 관해서 소리로 부르짖으려고 하셨을 것이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의로운 자를 옹호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신뢰를 표현하셨을 것이다. 예수는 시험의 고통을 느끼시는 의로운 고난자와 자신을 동일시하시지만, 하나님과의 그의 친밀성이 그로 하여금 솔직하게 불평을 말하게 하고 구조를 요청하게 한다. 그는 그의 죽음에서 하나님의 개입이 있을 것을 신뢰하면서 고난을 받아들인다. 만일 부르짖음을 기도로 이해한다면, 하나님은 즉시 그것에 답하신다. 어두움이 6시로부터 9시까지 계속되고, 뒤따라오는 사건들이 하나님의 옹호에 대한 신뢰의 소망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압도적인 형태를 드러난다.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 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22:24).

 

마가는 예수의 수난기간 동안에 행동을 그를 따르는 자들의 모델로 제시한다. 극단적인 고통에 직면했을 , 예수는 기도하셨다. 당국자들에게 끌려가서 생명을 좌우하는 재판정에 섰을 그는 두려움 없이 증언하셨다. 때리고 비웃을 , 욕하지 않고 고통을 참으셨다. 우리는 그가 죽으신 방식을 통하여 죽음과 고난을 대처하는 방법을 배워야한다. 그러므로 마가는 예수의 죽음을 단순히 하나의 거래로 제시하지 않는다. 그는 예수의 믿음이 나중에 흔들렸고, 아연실색한 절망 중에 죽었다고 독자들이 생각하기를 확실히 원치 않는다. 예수는 제자들이 믿음이 없음으로 인하여 책망하셨고(4:40) 환난 중에서와(9:23) 엄청난 곤란에 직면했을 때도 믿음을 가지라고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셨다(11:23-24). 백부장이 사람이 극단적인 유기로 죽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고백하지 않았다. 예수는 잔을 마셔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을 고통스럽게 받아들이셨다. 제자들과 달리 그는 십자가의 필요성을 완전히 이해했고,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다른 것을 기대하지 않으셨다.

 

마가의 독자들은 고난과 환난을 알았다. 그들은 예수가 그렇게 되셨던 방식으로 자기 십자기를 지고 죽게 되는 문자 그대로의 가능성에 직면했었다. 그들이 예수의 죽음에 대한 기록으로부터 깨달을 있었던 것은 그분이 하나님을 신뢰하셨기 때문에 죽음까지 순종하셨다는 점이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하나님께 토해낼 있고, 큰소리로 호소할 있다는 사실을 배운다. 신약성경의 많은 다른 본문들은 청중들에게 속죄에 대한 관점을 가르치기 위해서 사용될 있다. 본문은 쓰라린 고통과 손실을 당하고, 삶에서 하나님과의 거리를 매정하게 느끼는 사람들을 돕는데 가장 사용될 있다.

 

 

참고: NIV적용주석-마가복음(솔로몬 발간)에서 발췌하여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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