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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 속에서 TALK POINT 뽑기/단편들 모음

몸의 변혁적 현실 - 복음서들의 증거

by pooh_in_the_Way 2021.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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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커스 보그/톰 라이트의 《예수의 의미》(한국기독교연구소 발간)에서 발췌

 

7장 몸의 변혁적 현실

 

 

 

 

복음서들의 증거

 

복음서들로 돌아가면, 우리는 독자들이 (단순히 현대 신약학의 태동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여러 세기 동안 인식하고 있었던 모든 수수께끼들을 발견하게 된다. 부활절 아침의 이야기들,  마태오 28, 마르코 16, 루가 24, 요한 20장의  야기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기 매우 힘들다. 우리는 과연  사람의 여인들이 어떤 순서로 무덤에 갔으며, 언제  혹은  이상의 남자 제자들이 같이 갔는지, 그들 모두가  천사들이 도대체 몇이었는지, 예수가 어디에서 혹은 어떤 순서로 나타났는지에 대해 결코 확실하게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이처럼 부정확하다는 사실과  이야기들이 숨을 헐떡 이는 특징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야기들의 독특한 맛을   아니라 특수한 가치를 주고 있다. 일부 사람들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변호사들과 판사들은 수많은 사건들에서 보게 되는 증거들의 상태란 으레 이런 것들이라표  목격 자들의 증언이란 으레 이런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경우들에서, 표면적인 불일치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증인들이 공모(共謙)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뜻한다.

 

우리는 또다시 초기 공동체들에서 이야기들이 어떤 기능을 수행하였는지를 유념해야만 한다. 개인이나 가족, 마을, 혹은 공동체에 중요한 이야기는 변하지 않게 마련이다. 그런 이야기는 항상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를 위해 전해진다. 누군가 그런 이야기들을 수집하여 더욱  이야기의  속에서  이야기들을 편집할 때는, 물론 다른 요인들이 개입되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루가 24장은 루가복음 전체의 결론으로서  들어 맞으며, 요한 20 역시 요한복음 전체의 결론으로서, 서문25) 주제와 균형을 이루며,  들어맞는다. 그러나  편집자들은 다른 부활 이야기들(그들이 다른 부활 이야기들을 알고 있었다고 전제하여)  들어맞도록  이야기의 세부사항들을 마음대로 고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이야기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였는데, 왜냐하면 이것이 그들의 공동체가 애초부터  이야기를 전한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전한 기본적 이야기는 고린토전서 15장의  야기와 똑같은 것이다. 비록 바울의 발전된 신학과 성서 주석은 전혀 없지만 말이다. 그것은 예수의 몸이 어떻게 소생되지도 않고 무덤 속에서 썩도록 내버려지지도 않고, 오히려 새로운 형태의 육체로 변형되었는가(transformed into a new mode of physicality) 하는 이야기로서, 이것은  제지들과  후의 모든 독자 들에게 충격적이며 놀라운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이런 측면은  이전의 유대교 문헌과 상상력에서는 전례가 없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에제키엘 37, 다니엘 12, 마카베오하 7장과  밖에 이와 비슷한 구절들을 모두 합친다 해도 복음서들 속에 나오는 그림에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가 별처럼 빛나지 않았는가?)  이야기들은 실망하였지만 성서를 읽고 있었던 예수의 제자들의 소망을 투사한 (wish-fulfiling projection)으로는 설명  수가 없다.   야기들은 부활한 예수의 육체성 ( 무덤, 예수를 만질  있었으며 느낄  있었다는 사실, 그가 아침 식사를 준비한 , 그가 생선을 먹은 ) 아니라, 그가 마음대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며, 잠근 문을 통해 지나갈  있으며,  때는 사람들이 알아   없다가 다른 때는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  있는 능력(“제자들 중에는 감히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  분이 바로 주님이시라는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기에서 예수를 뵙고 엎드려 절하였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모두를 주장한다.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라는 터툴리안의 말을 인용할 생각은 없지만,  이야기들 속의 한결같은 기이함,   모든 이야기들 속에 나타나는 똑같은 기이함은 바울의 발전된 부활신학에서도 한결같이 나타나는 것으로서, 이것은 매우 당혹스러운 사건에 대한 그들의 진정한 회상임을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이것은 마치  기자들이 비록 이것이 어리석고 비범한 이야기처럼 들릴  알지만, 이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물론  이야기들의 진리 (tath value) 단순히  이야기들  역사성에 있다는 말이 아니다.  이야기들은 신화적이며 종말론적인 은유적 의미들의 층들로 가득  있기 때문에,  의미들을 완전히 탐구하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야기들은 비유들,   이야기들의 진리 실제로 탕자 있었는지 없었는지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비유들과는 다르다.  이야기들의 심층적 요점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인 창조주 하느님이 그의 백성을 해방시켰으며 피조물들을 새롭게 만들 었다는 점이다. 만일 이것이 피조물 자체 안의 사건과 관계되지 않은 의미로 번역된다면, 이것은 스스로를 해체하여 영지주의(Gnosticism) 가까  것이다. 만일 이런 이야기들이 예수가 그의 백성들에게, 육체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현존한다는 근본적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었다면, 그들은  작업을 매우 서틀게 하였던 것이다. 만일  대답이 그렇다, 그러나 보다 육체적 이야기들은 후대에,  초기의 믿음이 보다 구체화되었을  만들어진 것이다라면, 루가가 그런 (예수가 생선을 잡수신) 이야기를 엠마오 도상의 이야기와 같이 매우 아름답고 은유적인 이야기 바로 옆에 놓은 것은 그의 머리가 매우 둔한 때문이었다고 말해야  것인가? 우리는 그가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점수를   없겠는가? 또한 우리는  이야기들의 분명히 매우 중요한 은유적 차원들이 기능을 발휘한 것은 궁극적으로 단지 그들이 묘사하는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을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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