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커스보그/톰 라이트의 《예수의 의미》(한국기독교연구소 발간)에서 발췌
8장 부활절의 진실
성금요일과 부활절의 완결
신약성서 시대 이래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항상 함께 이해되었지, 별개로 이해되지 않았다. 죽음과 부활이 결합된 형태로 된 것은 의미가 있다. 성금요일(Good Friday)과 부활절은 역사적으로 또한 신학적으로 하나에 속한다.
이 장의 결론부분에서 나는 신약성서 자체 안에서 발견되는 죽음과 부활의 완결된 형태에 대한 다섯 가지 의미를 간단히 설명하고자 한다. 이 모든 의미들은 초대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생겨난 부활절 이후의 회고적 해석들(retepective interpretations)이다. 이 모든 의미들은 성금요일과 부활절이 예수의 생애의 절정이며 기독교 공동체 생활의 핵심이라는 의미를 강력하게 증언하고 있다.
거부/해원
성금요일과 부활절을 거부(rejection)와 해원(解宽, vindication)의 형태로 이해한 것은 매우 단순하며 매우 오래된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최초의 해석이었을지도 모른다. 예수를 처형한 것은 당시 종교적 및 정치적 당국자들이 예수를 거부한 것이다. 지배체제는 그를 살해하였다. 예수의 부활은 예수에 대한 하느님의 해원(God’s vindication of Jesus)이다. 그것은 단순한 거부와 승인(no-yes)의 형태이다. 즉 예수의 죽음은 그의 일에 대한 지배체제의 거부(no)였으며, 예수의 부활은 예수에 대한 하느님의 승인(yes)이었다. 그러므로 부활은 또한 이 세상의 지배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거부(no)이기도 하다.
이런 형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이 예수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고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행 2:36; 참조 2:23-24; 3:13-15; 4:10-11)와 같은 구절에 나타나 있다. 예수가 주님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흔히 “하느님의 오른편에 올리셨다”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 표현의 핵심적 의미는 종교적이며 동시에 정치적이다. 즉 이 세상의 주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였지만, 예수가 주님이지 그들이 주님이 아니다. 따라서 이런 형태는 더욱 큰 이야기, 즉 지배체제와 이스라엘의 하느님 사이의 오래된 갈등의 이야기로서 모세에서 시작하여 히브리 성서의 사회적 예언자들을 통해 계속된 갈등의 이야기의 일부분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주님되심(lordship)과 파라오(Pharaoh)의 주인됨 사이의 갈등의 연속이며 그 절정이다.
권세들의 패배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이해한 두번째 중요한 방식은 첫번째의 연장으로서 “권세들”’(the powers)을 패배시켰다는 것이다. 이것은 파라오와 출애굽의 이야기를 우주적 차원에 투사한 것이다. 이런 이해에 따르면, 예수를 처형한 사람들은 단순히 예루살렘의 정치적 및 종교적 당국자들이 아니라 이 시대를 통치하는 권세이다. 신약성서는 이 권세를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른다. 즉 권세와 정사들(prindpaiities and powers), 우주의 기본적 정령들, 공중의 권세, 사탄, 용, 지옥의 짐승 등이 그것이다. 신약성서의 세계관에서는 이런 것들이 영적인 권세들이다. 이것들이 이 세상의 기관들 속에 구체화되었기 때문에, 정치권력도 포함되지만 육체가 없는 영적 권세들도 포함된다.(대표적 학자는 월터 윙크이다)
이런 권세들은 우리를 노예로 삼고 있다. 이런 표현의 진리는 우리가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많은 것들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권세 아래 살아가며, 우리들의 노예상태는 단순히 정치적인 것만이 아니다. 우리의 싸움은 단순히 살과 피의 싸움이 아니라, 권세와 정사들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이런 이해와 비슷한 출애굽 이야기에서와 마찬가지로 노예상태는 인간의 조건을 나타내는 포괄적인 은유가 되었다.
이런 해석의 핵심적 주장은 성금요일과 부활절이 권세를 패배시켰다는 주장이다. 그리스도 안의 하느님이 “십자가로 권세와 세력의 천신들을 사로잡아 그 무장을 해제시키고 그들을 구경거리로 삼아 끌고 개선의 행진을 하셨습니다.”(골 2:15) 이것의 내적인 논리는 분명하다. 즉 예수는 권세들에 의해 삼켜졌고 권세들은 그를 사로잡았다. 첫번째 이해와 마찬가지로 부활은 예수에 대한 하느님의 긍정(yes)이며, 권세에 대한 부정(no)이다.
성금요일과 부활절은 우리가 권세로부터 해방된 것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주님되심은 이 세상의 주인들로부터 개인적이며 실존적인 해방에 이르는 길이다.
길의 계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세번째 이해는 새로운 생활로 변화하는 길(the way or palh of transformation to new life)을 계시한 것으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죽음과 부활은 기독교인의 길의 핵심에 놓여 있는 내면적인 영적 과정을 나타내는 은유가 된다.
이 은유는 매우 오래 된 것이다. 최초의 신약성서 저자인 바울은 자신 이 겪은 변화를 말하기 위해 이 은유를 사용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죽었다고 말하는데, 십자가는 그 자신의 내면적인 죽음을 나타내는 은유이다. 즉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그는 말한다. 그 내면적 죽음의 결과는 새로운 정체성이다. 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 2:20, 롬 6장에서는 바울이 죽음과 부활이라는 표현을 통해 세례의 의미를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십자가에 대한 이런 은유적 이해는 또한 넓게 퍼져 있다. 그것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에 관한 유명한 말씀, 즉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말씀의 의미이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그를 따라 죽음과 부활의 길을 가는 것이다. 성금요일과 부활절은 예수가 가르친 길, 즉 예전의 존재 방식에 대해 죽고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 태어나는 길 (the path of dying to an old way of being and being born into a new way of being)을 구체화한다. 그가 가르친 길과 그의 생애가 끝맺음한 길 사이에 뚜렷한 일치를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자신이 그 길(the Way)을 육화(肉化)하였다는 뜻이다. “예수는 길이다.” 예수가 길인 것은 죽음과 부활의 길이라는 뜻이다.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계시
성금요일과 부활절은 또한 신약성서에서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깊은 사랑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런 이해는 기독교의 이미 자리 잡은 이야기, 즉 예수를 하느님의 사랑받는 독생자(God’s only and beloved son)로 보는 이야기에 달려 있다. 이 틀 속에서는 예수의 죽음이 예언자에 대한 처형이거나 이 세상의 지배자들이 예수를 거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느님에게 가장 귀중한 것, 즉 하느님의 독생자로서의 예수를 하느님이 포기한 것이다. 이것이 요한복음 3:16, 즉 하느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하느님의 독생지를 주셨다는 말씀의 핵심적 의미이다.
하느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가? 독생자를 줄만큼 사랑한다. 이런 이해는 성서 전통 전체에 퍼져 있는 보다 큰 이야기, 즉 하느님은 사랑하시는 분(divine lover)이라는 이야기의 일부분이다. 히브리 성서의 복음이 표현하듯, “너는 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사랑이다.”(사 43:4) 성금요일 은 우리를 위해 하느님의 독생자가 죽은 날로서 하느님의 사랑의 깊이를 구체화한 것이다.
죄를 위한 희생제물
“예수는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Jesus died fcr our sins.)는 것은 기독 교에 대한 나의 소년 시절의 이해에 핵심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수많은 찬송가들 속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대부분의 성만찬 예배문의 핵심이다. 실제로 이런 해석은 너무 넓게 퍼져 있어서 이것은 흔히 예수의 죽음의 “진짜”(real) 의미인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약간 길게 풀어 내겠다.
누군가 나에게 “당신은 예수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가?” 하고 묻는다면,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아니오’’와 “그렇다”이다. 만일 그가 “당신은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죄를 위한 희생제물(a sacrifice for sin)로 보았다고 생각하는가?” 혹은 “당신은 하느님이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이 오직 예수의 희생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뜻이라면, 나의 대답은 “아니오”이다. 그러나 만일 그의 질문이 “그 진술이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매우 진정한 은유인가?”라는 뜻이면, 나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이에 대해 설명하겠다.
나는 우선 이것을 예수 자신의 목적(Jesus’ own purpose)이 아니라, 부활절 이후에 희생제사의 이미지를 이용하여 그의 죽음을 은유적으로 해석한 것 (a post-Easter metaphorical interpretation of his death using sacrificial imagery)으로으로 본다는 점에서부터 시작하겠다. 죄를 처리하는 방식으로서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은 예수의 세계에서 핵심적인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예수의 죽음의 시기와 장소는 그런 이미지가 매우 가까웠음을 뜻한다. 즉 그는 유월절, 즉 유월절 어린양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절기에 죽었으며, 또한 그는 예루살렘, 즉 성전과 희생제사의 장소에서 죽었다.(기술적으로는 예루살렘 성벽 밖) 성전과 성전의 희생제사는 “예수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은유의 언어학적 모태이다.
이 은유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가 죄를 위한 희생제물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1세기 유대교의 상황에서 무엇을 뜻했을 것인지를 물어볼 필요가 있다. 이 진술은 부정적 의미와 긍정적 의미 모두를 갖고 있는데, 이 두 가지 의미 모두 매우 철저한 것이다.
그 부정적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전 신학(temple theology)에서 성전은 죄에 대한 용서를 독점하는 기관이었다고 주장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희생제물을 통해서만 속죄될 수 있었던 특별한 종류의 죄와 불결함이 있었다. 이것을 연장하여 성전은 하느님에게 나아감을 독점하는 기관이라고 주장하였는데, 그 이유는 하느님과의 화해가 적절한 희생 제물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는 죄를 위한 희생제물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성전의 독점, 즉 죄에 대한 용서와 하느님에게 나아감에 대한 성전의 독점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이 은유는 성전의 역할을 철저하게 뒤집어엎는다. 결과적으로 “예수는 희생제물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는 성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성전 없이도 하느님에게 나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것은 성전 반대(anti-temple) 선언이다.
긍정적인 측면에서는, “예수가 희생제물이다”는 선언이 하느님의 철저한 은총과 우리가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들여졌다는 것에 대한 은유적 선언이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처럼, 예수가 죄를 속죄하기 위해 “한번에 다”(유일회적으로, the once for all, 히 7:27; 9:12; 10:10, 12) 바쳐진 희생제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분리된 이유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는 것들이 무엇이든 간에 하느님이 이미 처리하셨다는 뜻이다. 즉 우리 자신의 죄의식, 무가치함, 혹은 실패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에게 받아들여 질 수 없는 것처럼 생각되면,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이 이미 그런 것들을 처리하셨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지적하였던 것처럼, “그리스도는 율법의 끝이다”라는 말은 필요조건 체제(system of requtements), 즉 하느님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일정한 필요조건이 있고, 그 필요조건을 채우지 못하면 받아들여지지 못하던 체제는 이제 끝이 났다는 뜻이다.(롬 10:4) 물론,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의 생활에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면, 우리 자신과 하느님과의 관계는 극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예수의 죽음에 대한 이런 이해와 예수 자신의 지혜적 가르침 사이에는 놀라운 일치성이 있다. 예수는 지혜의 교사로서, 관습과 전통, (종교적) 기관과는 별도로 하느님에게 직접 접근할 수 있음을 가르쳤다. 그의 죽음이 죄를 위한 유일회적 희생제물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그의 가르침과 똑같은 것, 즉 하느님은 (종교적) 기관을 통한 매개 없이도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것이다.
나는 이 부분의 결론에서 “예수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선언을 서로 매우 다르게 이해하는 두 가지 방식에 대해 지적하고자 한다. 일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그 선언은 기독교 믿음 체계의 본질적인 교리적 요소로 간주된다. 이런 이해방식에서는 그 선언이 교리적 필요조건이 된다. 즉 우리는 예수가 희생제물임을 믿음으로써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된다는 식이다. 즉 여기서는 필요조건 체제가 그대로 남아 있으며, 예수를 믿는 것이 새로운 필요조건이다. 그러나 그 선언을 하느님의 철저한 은총에 대한 은유적 선언으로 간주할 경우에는 매우 다른 이해를 갖게 된다. 즉 “예수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 그 필요조건 체제를 없애버렸다는 뜻이지, 새로운 필요조건 체제를 확립했다는 뜻이 아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신약성서에 나타난 다섯 가지의 일차적 이해를 살펴보았다. 그 각각은 예수에 관해 주장한다. 처음 두 가지는 예수가 주님이지, 지배체제와 권세들이 주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세 번째이해는 예수의 생애의 끝을 변화를 위한 길을 구체화한 것으로 이해한다. 네번째는 예수의 죽음이 하느님의 독생자의 죽음으로서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을 육화(肉化 incamation)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섯째는 예수를 유일회적 희생제물, 즉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위한 기초로서 율법을 끝장낸 유일회적 희생제물로 이해한다.
또한 이 다섯 가지 이해는 각각 기독교인의 생활에 매우 중요한 핵심적 주장을 표현한다. 즉 지배체제와 예수는 서로 반대된다. 하느님은 이 세상과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는 권세들로부터 우리가 해방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신다. 변화의 길은 내면적인 죽음과 새로 태어나는 길이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다. 하느님은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있으며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신다. 이 모두는 오늘날 기독교인의 생활을 매개하기 위한 풍부한 의미를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