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4: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마4: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마4: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마4: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유대의 전승 가운데는 메시아가 사탄에게서 시험을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다른 장면이 보입니다. 아주 짧지만, 그러나 분위기는 예수와 사단의 힘의 대결로 그려져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기에, 이 사단과의 논쟁은 후에 유대 종교지도자들과의 논쟁과 그들의 대적함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기 직전이니, 이제까지 자신들의 권세가 펼쳐지는 이 땅에서 왕 노릇 하던 마귀도 긴장하겠지요. 그는 어떻게 해서든 예수로 실족케 하여야 했겠지요? 그렇다고 예수의 어려움이나 곤궁할 때의 약점을 비집고(사십 일을 금식하였음으로, 육체의 극도의 연약함 속에 있었다고 상정하여) 마귀가 예수에게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하여 돌로 떡을 만들어보라는 시험을 했다는 식은 예수가 누군지를 전혀 인식하지 않는 조악한 주장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의 공생애는 4:17부터 시작됩니다. 따라서 16절까지는 예수의 공생애의 의미와 가치가 무엇이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그의 메시아직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를 선보이는 서론입니다.
마귀의 시험은 우선 예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시험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이 아들이어든",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요? 얼마 전에 예수는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음성, "내 사랑하는 아들, 내 기뻐하는 자"라는 분명한, 예수의 신분에 대한 확인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마귀는 예수에게 시험하기를 '너 스스로 그것이 참말인지 알아보고, 내게 드러내 보아라' 하는 투로 보입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인가?" 하는 의혹이 든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향한 믿음에 금이 간 것입니다. (성령, 곧 하나님의 영의 이끌림 속에) 하나님의 현존과 통치에 미심쩍은 마음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앞서 감에 시작부터 틈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명하여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는 일은 예수에게는 그의 능력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일일 것입니다. 마귀의 제안에도 이미 예수의 능력을 알고 있다는 투입니다. "명하여"하고 하지요. 이는 창조주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말씀으로 창조하신 일에 버금가는 일임을 알기에 마귀는 그의 능력을 의심하려는 의도는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면 마귀의 첫 시험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예수가 자신의 메시아직을 수행함에 그때그때의 정황에 따라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 스스로 해결하려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한편 하나님의 종으로서, 이스라엘 백성 앞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의 삶에 구현하는 자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대답을 보십시오. 예수는 구약성경에서 신명기 8:3의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이깁니다.
신8:1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신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신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신명기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여 광야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시험받는 것을 배경으로 합니다.
그런데 이 신명기 말씀은 만나를 먹이신 사건을 그 역사적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16장에 나옵니다.
출16: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출16:2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출16: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출16:4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출애굽기 16장은 바로 앞 14-15장의 홍해를 건넌 사건 이후입니다. 출애굽 하여 홍해를 건너자마자 광야이었습니다. 광야에 들어오자마자 이내 이스라엘 백성은 불평합니다. 먹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주립니다. 광야에서는 양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만나를 주십니다. 그러나 4절을 보면, 먹을 것이 없다는 불평 속에는, 배고프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배고파서 죄를 짓는다는 핑계가 들어 있음이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곳에까지 왔고, 그들은 하나님이 지정하신 산에까지 이르러 하나님을 예배하여야 하는 선별된 민족입니다. 그런데 광야에 들아오자마자 이내 배가 고팠고, 그러자 다시 애굽의 종살이 시절이 더 나았다는 불평, 하나님이 주도하여 출애굽 시킨 모든 일을 모독하는 죄를 저지릅니다. 이스라엘의 불평,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고 신앙을 지키려 하여도, 현실적인 문제가 더 시급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답은, 그러면 너희가 범죄하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것이 내적 조건인가 외적 조건인가를 보자는 것이며, 그들의 불평 원인,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하여 만나를 주어, 율법의 준행 여부를 시험하여 보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말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의롭고 거룩하게 사는 것은 우리 원래의 마음인데, 배고파서 그렇지 못했다는 것인데, 배가 부르면 범죄 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대답은, 그러면 너희에게 날마다 만나를 주어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해주면, 배가 불러서는 죄를 범하지 않은가를 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8장에까지 왔습니다. 40년이 흘렀습니다. 출애굽 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는 일은 2년 남짓이면 족하였습니다. 그런데 40년이 지나서면까지 그들은 아직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가네스바나아에서의 범죄 사건으로 그렇습니다. 2년 반 만에 바로 여리고 요단강 맞은편에 도착합니다. 12명의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그들이 정탐하고 돌아온 보고는 공포와 절망의 극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대성통곡하며 작당을 하여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셨습니다. 소위 출애굽 1세대가 광야에서 모두 죽기까지 그 행진은 멈추어진 셈입니다. 38년이 더 걸렸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가 그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 앞에 범죄 한 민족이었습니다. 자, 그러면 이 사십 년의 광야 생활은 그저 죽기만 기다린 시간이었을까요?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일하시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의 백성들을 낮추사 배우시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자, 그러면 예수의 대답은 어떤 의미로서 이 말씀으로 마귀의 첫 번째 시험을 이기셨나요? 예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나에게는 힘보다는 원칙과 목표와 그 주도권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필요하다. 나는 그것으로 종속되는 자이다"라는 선언인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광야시험에서만 아니라 첫 인류의 실패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의 인류의 타락,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사건의 본질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 중에 가장 영광스러운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아 영혼이 있고, 인격이 있고, 그래서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도록 위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권자나 최종 결재권자가 아닙니다. 그것을 확인하려 세워 둔 것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이었습니다. 최초의 금령을 받은 이유이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권위와 질서에 승복함으로써만 자신의 지위와 내용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 아담의 타락이었습니다. 결국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존재는 인간의 존재와 인간이 향유하는 복과 특권과 영광이 어떤 조건에서만 가능한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자유권리를 반역함에 써서 본인이 누리는 모든 조건에 필요하였던 보호장치를 깨뜨렸습니다.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따서 먹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다"는 것인데, 그것은 선악을 구분하는 진리를 알았다는 것이 아니라, 선악의 기준을 자기 마음대로 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시험을 이긴 자리는, 하나님을 섬기며 기뻐하며 규례를 지킴으로 인간의 참된 내용과 복을 누리는 자리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멋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자리가 아닌 것입니다. 떡으로만 살지 않고 여호와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