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수는 공생애 전체에 걸쳐 마치 자신이 새로운 출애굽을 시작하고 성취하여 가듯 행동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노예 상태이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서 그들을 구출하러 오신 것처럼 말입니다. 첫 번째 출애굽이 이전에는 숨겨졌던 ‘야웨’(여호와, 비로소 “스스로 있는 자”로 모세에게 드러내셨다)라는 이름의 의미를 밝히 드러냈듯이, 이제 예수는 친히 인간의 모습을 입으시고 행동하시는 야웨 그분을 밝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아울러 하나님 백성의 최종적인 구속을 실현하고, 이로써 온 세상의 빛이 될 이스라엘의 운명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이 위대한 주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마지막 여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성전에서의 예수의 행동은 자신이 메시아임을 주장한 상징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긴 이야기가 자신 안으로 집약되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믿었음을 보여 주신 것이라고 주장한 셈입니다. 아울러 이 행동을 통해 예수는 자신의 존재와 활동으로 성전을 대체하라는 소명을 받았다고 믿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그곳에 마지막으로 머무는 동안 다락방에서 베푼 위대한 상징적인 식사(유월절 만찬, 예수는 그것을 새언약이 성취된 '주의 만찬'으로 새롭게 하였다)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이스라엘의 구속이 그리고 온 세상의 구속이 성취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 두 가지 행동, 즉 성전과 다락방에서의 유월절 만찬이 사실 절정에 해당하는 상징이었고, 이 두 가지는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더 크고 의미심장한 상징적 행동이 성취될 것임을 가리키는 표지였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으로 향하였던 예수의 마지막 여정은 오랜 기다림 끝에 야웨께서 시온에 복귀하시는 것을 상징하고 구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의 정화와 다락방에서의 성만찬으로 절정에 이르는 이 여정에 대해 예수는 처음부터 이 일들이 어떻게 귀결될 것인지를 충분히 알고서 행하였습니다. 예수의 행동은 에스겔이 옆으로 눕고 예레미야가 항아리를 부수는 행동 같은 상징적인 것이었습니다. 예언자들은 실제를 몸소 보여 줌으로써 메시지를 전합니다. 예수는 야웨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신다는 메시지를 선포하는 데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그 절정의 사건을 친히 행동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의인이라 인정받아 이스라엘의 하나님 보좌에 함께 앉게 될 것이라 믿었고 또 이를 적절한 언어로 표현하였습니다.
2
예수가 이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들어오면서(자꾸 사용하는 ‘마지막’이란 말이 어색할 수 있습니다. 공관복음서는 예수가 그의 공생애 기간 내내 갈릴리에서부터 사역을 시작하여 유대 땅을 거쳐 그 사역의 마지막 여정이 예루살렘으로 끝나는 것처럼, 그래서 마치 예수가 그의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처럼 그려져 있습니다. 예수의 사역의 목적이 십자가임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적인 구성이라고 봅니다. 요한복음은 성전 정화 사건이 2장에 기록되어 마치 예수의 사역 초기의 사건으로 그려져 있을 뿐 아니라, 7장, 그의 형제들과의 대화에서도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소위 예루살렘 입성은 그의 여러 번 중 최후의 방문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예수는 타고난 유대인이기에, 그가 성인이 된 이래, 매년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야웨의 약속, 즉 그분이 심판과 구원을 위해 시온으로 되돌아오시겠다는 약속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던 만큼 그보다 더 중요한 것, (그분이 처하신 상황에서) 더 긴급한 어떤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 고안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따라서 그 비유의 취지는 다음과 같은 말라기서의 경고를 이어받으려는 것입니다.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말라기 3장 1-2절) 임박한 야웨의 귀환에 대한 준비를 경고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누가복음에서는 이 야웨의 귀환에 대한 비유를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바로 앞에 배치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9장 28절부터, 예루살렘 입성 장면인데, 바로 앞 누가복음 19장 11절부터 27절까지, 은 열 므나의 비유가 나옵니다. 왕(주인)이 그의 종에게 과업을 준 뒤에 그들을 평가하기 위해 되돌아오는 비유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있는 소위 다섯 달란트의 비유가 병행 단락인데, 다만 그 배열 위치가 다릅니다.
다시 누가복음으로 돌아와, 예수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진입하는 동안 군중의 ‘호산나’ 찬송 소리를 들으며, 흐느껴 우시는 모습에(누가복음 19: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지금 감람산에서부터 내려와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기 전입니다. 호산나 찬송이 가장 크게 불러질 때입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종려주일 예배에서 가장 소홀히 하는 기록입니다) 초점을 맞춥니다. 그리고 그분이 말씀하신 경고의 메시지는 이 장면이 바로 야웨께서 시온으로 귀환하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네 원수들이 장차 예루살렘에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않을 것은 ‘네가 보살핌 받는 날’(난하주에 ‘심판’이라고 보입니다. 또는 ‘방문의 때’)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탄식합니다. ‘방문의 때’는 전문적인 용어로, 이 경우에는 야웨의 오심을 가리키며, 이것은 단지 그분의 백성을 가볍게 ‘방문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앞의 비유에서의 매우 부담스러운 의미로서) 그들과 정산을 하고 모든 일을 결말짓기 위해 그들을 ‘방문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 비유는 다른 비유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에 그 순간이 임했다고 경고합니다. 바로 야웨께서 마침내 되돌아오신다는 경고였습니다. 그것은 단지 이스라엘의 구출과 축복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평화에 관한 일”(눅 19:42)을 거부했던 자들에게 내려질 끔찍한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3
누가복음 19장에서 한 가지 사건을 덧붙여야 합니다. 삭개오 사건(누가복음 19장 1절부터 10절)입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순례를 할 때에 다니는 길인 완만한 오르막길이 시작되는 곳, 순례 여정의 숨을 마지막으로 고르는 곳인 여리고에서, 세리장이던 삭개오가 예수를 만나 구원을 받은 사건입니다.
예루살렘 입성과 성전 정화, 그리고 유월절 성만찬 사건을 내다보면서, 이 삭개오 사건을 해석해 보면, 이 일련의 사건들을 통하여, 예수는 포로생활에서의 귀환이 이미 일어나고 있고, 그것은 그 자신의 사명이며, 따라서 그는 누가 회복된 이스라엘에 속하는지를 선포할 권리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이 행동하였습니다. 삭개오 사건은 한 마디로, 삭개오가 자기 돈으로 무엇을 했든 안했든 예수가 자신의 권세에 의거해서 삭개오가 아브라함의 참된 아들이라고 선포했다는 것과 구원이 “오늘” 그의 집에 임했다고 선포한 것이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삭개오가 율법에 따라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가서 희생 제사 제의에 참여함을 통해서 얻을 수 있었던 것을 예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삭개오에게 주었다는 말입니다. 삭개오가 자기 재산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것은 예수의 평결 자체가 아니라 이웃들에 의해서 그가 이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는 것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치 자기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규정된 제물을 드리라는 말을 들은 나병환자들이 치유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적인 인증, 깨끗케 되었다는 보건증을 얻기 위해서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각각의 경우에서 중요했던 것, 각각의 그러한 행위를 그토록 걸림돌이 되게 만들었던 것은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이 죄사함, 사랑, 은혜 등등에 반대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러한 은사들을 성전과 그 제의 바깥에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일련의 행위는 유대 당국자들에게는 분명 토라와 성전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에게는 이미 토라와 성전에 대한 심판과 같습니다. “이제 토라와 성전과 그 안에서 모든 제의는 그 기능을 상실했다.”
4 [톰 라이트의 《모든 사람을 위한 마태복음/마가복음》에서 발췌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 겉옷이 자신의 유일한 겉옷이라면 이것은 아주 특별한 행동이다 ... 그것은 자신이 겉옷을 벗어 바닥에 깔아 주는 그 사람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칭송한다는 뜻이다. 그 행위에는, 필요하다면 그 사람을 위해 자기가 가진 다른 것도 다 줄 수 있다는 암시가 들어 있다.
예수님 주변에 모여든 무리는 아마도 겉옷이 하나뿐인 이들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자신의 겉옷을 길에 펼쳤다. 그중에서 성경을 아는 사람이라면, 과거 이스라엘의 어떤 유명한 왕이 이미 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으로 선포되었을 때, 그의 추종자들이 충성의 표시로 자신의 겉옷을 그의 발아래 깔았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을 것이다(왕하 9:13). 예수님을 둘러싼 무리는 이 사건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어떻게든 표명하고 싶었다.
그들은 또한 나무에서 잘라 낸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위한 축하 행렬을 만들었다. 이 행위 또한 ‘왕’과 관련된 함의를 지닌다. 예루살렘과 그 주변 마을은, 200년 전 이스라엘을 억압하던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와 그의 이방 군대를 정복하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유다 마카비우스(마카베오)의 유명한 이야기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고, 그 무렵에는 그 이야기가 일부 기록으로 남아 있기도 했다. 마카비우스도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무리의 환영을 받으며 성으로 들어왔다(마카베오하 10:7, 개신교 성경에는 없습니다. 가톨릭 성경에는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정화하고 재건했다. 그는 백 년 넘게 지속된 왕조의 시조가 되었다. 헤롯 가문도 마카비우스 가문과 결혼했고, 대제사장들도 그와 비슷한 지위를 주장했다.
...이 무리는 ‘왕’을 위한 찬가 혹은 성가를 부르기까지 했다.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부르며 환호한 것 이상으로 노골적 표현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예루살렘 성은 다윗 왕이 천 년 전 자신의 수도로 삼은 곳이고, 거의 5백 년 동안 유대인들은 다윗과 같은 왕이 와서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구해 주기를 기다리면서 기도했다. 분명 그들은 ‘이제 때가 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들의 행동은, 야고보와 요한과 그들의 어머니가 앞 장에서 한 말과 결국 같은 것이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유대인의 정당하고 진정한 왕이라고 생각했고, 그가 그 왕으로 추앙받기 위해 수도로 간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지금이 바로 그분이 왕으로 영접 받는 순간이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바라는 왕이 되실 것이다! 그 사실을 분명히 알리자!
... 무리의 외침이 이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호산나'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곧 구원하시리라라는 기도와 그분에 대한 활력 넘치는 찬양을 혼합한 히브리어 단어다. 이 흥겨운 노래의 시작과 끝은 예루살렘과 성전으로 올라가는 내용을 담은 시편 118:25-26에서 가져왔다. '호산나' 뒤에 이어지는 문장의 문자적인 뜻은 "오시는 이여, 복 받으소서"인데, 히브리어와 아람어로는 "어서 오세요"라는 말을 그렇게 표현한다. 그 노래 중간에는 위험한 기도가 삽입되어 있다. "우리 선조 다윗의 왕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것이 이 장면의 핵심이다.
...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쉽게 풀리는 일은 없다는 것을 아셨다. 마태는 그 점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오신 것은 다윗처럼 혹은 유다 마카비우스나 헤롯처럼 왕위에 오르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으시기 위해서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소위 ‘승리의 입성’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에 예수님이 부여하시는 의미는, 그들이 이 사건에서 보고자 하는 의미와 상당히 다르다. 오늘날 우리가 이 이야기로부터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내용은 아마도 그 점일 것이다.
... 그러나 예수님은 반드시 예수님의 방식을 통해 응답하신다. 사람들은 예언자를 원했지만, 이 예언자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도시가 곧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24장). 그들은 메시아를 원했지만, 이 메시아는 왕좌가 아니라 이교도의 십자가에 오를 것이다. 그들은 악과 압제로부터 구출되기를 바랐지만, 예수님은 로마의 지배와 부자의 착취라는 표면적 악뿐 아니라 악의 뿌리로부터 그들을 구해 주실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소원을 가장 깊은 차원에서 들어주시기에, 그들이 겉으로 의식하고 표현하는 소원은 거절하시거나 기다리라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다.
... 그렇다면, 놀랍고도 장엄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우리의 기대와 하나님의 응답이 서로 일치하지 않을 때를 보여 주는 좋은 예다(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시는 16:23을 보라). 불행히도 무리는 실망할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들의 실망은, 비록 잔인하지만 표면적 차원의 실망일 것이다. 더 깊은 차원에서 보자면 그 위대한 도시에 예수님이 들어가신 것은 사실상 구원이 시작되었음을 뜻한다. 무리가 부른 ‘호산나’는 정당했음이 밝혀질 것이다. 비록 그들이 생각한 이유 때문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 교훈을 배우면 우리는 지혜와 겸손, 그리고 진정한 기독교의 믿음으로 크게 한 발자국 다가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