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라는 암기식의 빠른 대답이 나올까봐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죽고자 의도하였다고 결론을 내리든 안 내리든, 그러한 의도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의 충분한 이유가 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예수는 충분히 죽고자 하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고 자신의 죽음에 미리 모종의 신학적 해석을 부여하였다는 강력한 견해를 취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직접적인 사형 집행의 주체인 로마인들이 어떤 생각에서 예수를 십자가 형으로 처형하였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인들만이 아닌, 이 사건에 연루된 여러 주체들의 목적들과 의도들은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라는 질문은 거기에 인간의 필연적인 의도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 질문을 구성하는 또 다른 당사자가 하나 더 있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유대 사회는 정치와 종교가 하나인 사회이니까, 유대 당국자들이라고 해도 됩니다. 예수의 죽음에 깊게 관여한 이들은 산헤드린 공회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국회와 사법기관을 합친, 최고의 권력기구입니다. 유대 당국자들은 왜 예수를 사형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로마인들에게 넘겨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던 것인가?
그리고 이제 다시 이 모든 것의 한복판에서, 원래의 질문을 받아야 하는 세 번째 당사자, 예수는 죽을 생각이 없었는데 어찌어찌 하다 잡혀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이야기를 줄여서 이야기하자면,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기 위하여 이 세상에 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의 길이 예수의 탄생과 공생애에 있어서의 목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이와 관련해서 세 번째 질문은, “예수는 왜 죽으려 했는가?”이어야 합니다. 역시 “예수 자신의 의도는 무엇이었는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 이후의 또 다른 당사자, 곧 교회를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또 하나의 그룹을 더합니다. 우리는 또한 다음과 같이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질문이 길어집니다: “예수가 죽고 나서 극히 짧은 기간 내에 주후 1세기의 일부 유대인들은 왜 메시야를 자처한 이 인물의 죽음, 사실 이것 자체는 그 시기와 장소에 있어서 흔치 않거나 주목할 만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만, 그 죽음을 ‘그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셨으니’라는 말과 같은 견지에서 평가하였던 것인가?”에까지 대답하여야 합니다.
다시 정리해보자면,
- 로마 당국자는 왜 예수를 십자가형으로 처형하였는가?
- 유대 당국자는 왜 예수를 죽이려고 로마 당국자에게 넘겼는가?
- 그러면, 예수 자신은 (이 위기를 모면하려고 애쓰지 않고 순순히) 자신을 넘겨 주었는가?
- 그리고, 예수가 죽자 기독교는 태동하지 못하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야기는 아무 의미없이 지나간 이야기로 관심조차 받지 못한 채 사라져 간 것이 아니라, 이방인은 물론이고 수많은 유대인들조차,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그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셨으니’라고 고백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데, 이 질문과 그 답변을 구성함에 한 가지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대답은 역사적 배경 속에서 도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로마 당국자의 대답이 그것일텐데, 그들은 유대인들의 고발을 받아야 하지만, 유대인이 가지고 온 고발 이유가 신학적인 문제라면 상관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미리 한 가지를 살핀다면, 예를 들어, 예수가 자칭 메시아라고 하니 사형에 처해 주십시오, 라고 했다면, 로마 당국자의 판단은, 그 메시아라고 한 것으로 로마의 통치에 반역의 의지가 있느냐라는 부분만을 들여다 봅니다. 다분히 그들의 관심 안의 문제로서만 해석하고 판단하여 재판을 집행할 것입니다. 어떤 이유는 신학적인 고민으로부터 나온 것이고 어떤 것들은 정치적인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가져온 인간의 동기들을 묻는 역사적 질문과 흔히 기독교의 많은 분파들이 이야기하는 일련의 신학적 대답들(유대인들이 이야기하는 “신성모독죄”도 마찬가지이지만, 기독교인들의 대답은 이런 역사적 고민들을 무시하고 오직 신학적으로만 접근하여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와 같은)이 충돌하고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실제로 이런 문제에 유대 당국자들의 고민의 흔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고발을 위하여 찾아 놓은 예수의 죄목에는 종교적인 요소들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관점에서, 예수는 백성을 어그러진 길로 가게 한 거짓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빌라도 총독 앞으로 가져 간 죄목은 정치적인 것입니다. 로마에 대한 반역의 의지를 가진 불순분자라는 것입니다.
"왜 예수가 죽었는가?"라는 주제를 왜 이리 복잡하게 끌고 가느냐 하면, 복음서 기자들은 신학적 대답에 대해서는 단지 암시만 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역사적 대답, 단지 사실의 기록에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흔히 복음서 기자들은 “십자가의 신학”이라 불리는 것을 지니고 있지 않은 듯 보입니다. 우리가 듣고 싶어 하는 신학적 대답, 소위 십자가 신학은 사도 바울이 예수 사후 10년쯤 지나 정립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복음서 기자들이 보여주는 외관상의 “역사”는 교회의 신학적 관점을 이야기 속에 집어 넣어서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우리가 십자가에 대한 역사적 설명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세심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좀 장황한 설명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펴 보아야 합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너무 쉽게 신학적 대답으로 곧장 가기 때문에, 항상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의 실생활과 분리되어 있어, 가장 기본적이되 최고의 기독교 신학이 너무 가볍게 취급되고 있지 않나 하는 마음에, 위 네 가지 질문에 대하여 차례차례 열어 보겠습니다.
교회 절기로서는 지금 몇 주간으로 사순절입니다. 예수의 부활 직전까지 사십 일을 예수가 걸어간 길을 따라 묵상하며 기도하며 예배하는 기간입니다. 이 사순절의 절정은 고난 주간입니다. 그런 마음에서 이 글들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