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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가 예수를 심문하여 십자가형을 선고한 사건에서의 예수의 죄목을 무엇이었고, 그가 어떻게 이 죄를 판단하였는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먼저 십자가형에 대하여 이야기하자면, 이것은 그 처형방법의 끔찍함보다 먼저 로마 세계 전역에 걸쳐서 강력한 하나의 상징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것은 최대의 모욕과 수치와 고통을 주는 형벌이었습니다. 십자가형은 이렇게 크고 명료한 소리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곳을 통치하고 있다. 너희는 우리의 소유이다. 우리는 너에게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 반란과 반항이 아무 소용없고 제국의 힘은 이에 대해 전혀 자비가 없다.” 십자가형은 로마와 카이사르의 절대 주권을 냉혹하고 잔혹하게 역설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반란 주모자들에게 행해지는 것으로, 십자가형은 명료하고도 공포스러운 의미를 지니는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는 로마에 대항한 반역자로서 처형되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되었을 때, 당시 예루살렘에서의 일반적인 인상으로는, 예수가 메시야를 자처하다가 실패한 사람들의 긴 계보 속의 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예수를 고소한 유대 당국자들은 예수를 반역 주모자로 몰아, 이 죄목으로 빌라도에게 넘겼고 또한 빌라도는 이러한 죄목으로 예수를 처형했음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 두 당사자는 예수가 그러한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할 만한 타당한 근거가 있습니다.
이제 복음서 본문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예수의 재판 부분은 4 개의 복음서가 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만 조금씩 다를 뿐입니다. 요한복음을 보겠습니다.
요18:28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요18:29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
요18:30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요18:31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
요18:32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요18:33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요18: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요18:35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요18: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요18:37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요18:38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앞 부분의 다섯 절, 빌라도의 짜증을 읽을 수 있습니다. 유대인 당국자들은 유월절을 바로 앞두고 있기 때문에 이 모든 사안을 해지기 전에 끝내야 하므로, 새벽에 빌라도 총독을 깨워야 했습니다. 더욱이 유대 당국자들은 유월절을 앞두고 정결법에 따른 종교적 거리두기로 재판정 안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관저 바깥에 위치함으로써 재판정과 관저 바깥으로 오고가야 하는 번거러움에 짜증이 배가되었을 것입니다. “아니 새벽부터 왜 이리 야단이야? 꼭 이 유월절이 시작되기 전날 웬 수선인가? 여기까지 왔다면 누군가 죽이고자 하는 것인데, 로마에 대한 중대 문제 같으면 내가 모를 리 없고 내가 알아서 잘 처리하고 있는데, 이른 새벽, 이 난리를 펴면서까지 나한테 왔다면 너희 종교 문제로 죽일 만한 사람이 있다는 것인데, 제발 너희 문제는 너희가 스스로 해결하란 말이야! 그래 일전에(요한복음 18:3) 군사들을 출동시켜 달라고 하기에 내가 허락하여 너희가 잡아 들인 자가 있었는데, 예수라는 청년이었잖아. 그런데 지금 여기 예수가 붙잡혀 왔네, 이 문제로라면 틀림없이 너희 문제잖아!” 유대 당국자의 대답은, “여기 사형을 받아야 하는 행악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총독에게 나아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에게 고발하여 재판을 받아야할 만한 사안이라면 우리 율법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당신이 관장하고 책임져야 할 중대한 죄목입니다.” 빌라도가 외면할 수 없습니다. 빌라도가 관여하여야 할 문제로서 사형을 선고할 만한 일이라면 정치적 문제이고, 그것은 반역에 연루된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에 다시 빌라도가 관정에 들어갑니다. 예수를 불러 묻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이에 예수는 직접적인 답은 피하고 되묻기를, “그 질문이 네가 스스로 하는 질문이냐? 아니면 남에게 들은 말이냐?”라고 묻습니다.
지금 빌라도에게는 두 가지 의혹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과연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인들의 마음을 단결시켜서 로마에 반항할 실제적인 반역 주모자냐? 하는 의혹이 그 하나입니다. 당시 유대의 지도자들은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마저 로마에 아부하여 자기네들의 지위와 부를 보존하는데 목적이 있었지 국가를 위하여 일하지 않았습니다. 빌라도 보고서에서는 이들을 모두 사기꾼으로 보고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 같은 상황 하에 있는 유대인들이 이제 제대로 능력 있고 백성들의 마음을 묶을 수 있는 강력한 지도자가 등장하기만 한다면 민중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로마에 저항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는 정치적 의도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당연히 그런 만한 인물이었습니다. 예수에 대한 경계심이 빌라도에게 없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신학적인 궁금증입니다. 그가 보고 듣기에, 예수는 자칭 메시아입니다. 그는 갈릴리 전역을 돌아다니며 나병환자를 단숨에 고치며 귀신을 쫓아내며 바다 위를 걸으며 바다와 광풍을 잠잠케 하며,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능력자였습니다. 그런데 어찌 이렇게 붙잡혀서 초라하게 자기 앞에 있어 자기 손에 생사를 맡겼는가? 라는 궁금증이 있습니다. 이 신출귀몰(神出鬼沒)의 능력을 가진 이 그리스도가 어찌하여 이같이 험한 꼴을 당하도록 가만히 있으신가? 아니 여기까지 오도록 무슨 재주를 부려 이 험한 자리를 피하지 못하고 허수아비 같이 이 허물 좋은 못난 자들에게 붙잡혀 여기까지 끌려 왔단 말인가? 하는 점이 두 번째 의혹입니다. 다시 말해, 첫 번째 질문은 정치적인 질문으로서 자기의 지위와 책무를 지키려는 질문이며, 두 번째 질문은 영적이고도 종교적인 질문인 것입니다. 빌라도는 지금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질문 속에서 이 같은 두 가지 의문들을 동시에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의 의중을 파악한 예수가 되묻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 묻는 너의 질문이 네 지위를 안전하게 확보하기 위한 질문이냐? 아니면 영적이고 종교적인 진리를 깨닫기 위하여 묻는 질문이냐?”라는 뜻으로, “이것이 네 스스로 하는 질문이뇨? 아니면 남이 네게 한 질문이뇨?”라고 묻는 말입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분명하게 선을 그었습니다. “내가 유대인이더냐?” 다시 말해 “내가 로마인이지 어찌 유대인이더냐? 나는 지금 나의 세상적 지위와 정치적인 책임하에서 네게 묻고 있는 것이지 진리에 관해서는 네게 묻고 있지 않다! 난 너희들의 진리 따위는 관심 없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덧붙입니다. “너희 사람들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나에게 넘겨 주어 네가 너에게 물을 내용으로 묻는 것이 아니냐, 도대체 네가 무슨 일을 한 것이냐?”
이 같은 빌라도의 태도에 예수는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그래 네가 말한 바대로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이라면, 나는 유대인의 왕 맞다. 그러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만일 이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내 종들이 싸워서 저 유대인들에 넘겨주지 않았을 것이다!” 빌라도는 이 말에 겁을 먹게 됩니다. 아니, 그의 제자들이라고는 열두 명 밖에 없는데 게다가 그 중 하나는 배반하고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졌는데, ‘내 나라가 이 땅에 속한 것이라면 내 종들이 가서 싸워 나라를 쟁취하였을 것이라고?’ 이 말대로라면 내가 알지 못하는, 어디에 감추어 놓은 부대가 또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다시 묻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왕이 맞지 않느냐?” “그렇다! 나는 왕이다!” 이 말에 드디어 나와야 할 말이 나왔으므로 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부연하여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영원과 진리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지 못했고 나를 이렇게 결박하여 넘겼으며 나도 세상에 관한 싸움이 아니기 때문에 너의 포박을 받고 있는 것이다. 진리에 속한 자들은 내 음성을 듣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은연중에 빌라도는 자신이 구원의 나라의 일원이 되게 하는 진리를 받아들인 것인가라는 결단의 상황으로 몰린 것을 알아 차립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말합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다시 말해, “진리? 지금 진리로 왈가왈부할 때냐? 그래, 진리가 밥 먹여 주냐?”는 뜻의 말입니다. 일차 심문이 이것으로 대화가 끝납니다.
빌라도는 예수가 말하는 왕국에 대하여, 이 세상의 정치적인 권세와는 전혀 다른 왕권과, 그 왕권이 진리로서 증거되어지고, 그래서 로마에게 반역의 의지가 전혀 없는, 실재적인 위협이 없는 왕국인 것으로 판단합니다. 그래서 결국 백성들에게 “예수에게는 죽일 만한 죄가 없더라!”(요한복음 19:4)고 이야기합니다.
여기 역사적인 보조 자료 하나를 소개합니다. 빌라도 보고서라는 문서입니다. 이 빌라도 보고서는 터키의 성 소피아 사원에서 발견되었는데, 1974년 이스라엘의 어느 월간지에 전문이 게재되어 모든 사람들이 읽게 되었습니다. 법정에서 만들어진 공문서로서, <예수의 체포와 심문 및 처형에 관하여 가이사에게 보낸 빌라도의 보고서>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빌라도가 당시에 유대 총독이었지만 치안을 유지할 수 있는 충분한 군대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하소연이 자주 나옵니다. 유대인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키므로 원근에 있는 다른 총독들에게 군대를 지원해 줄 것을 요구하지만, 모두 거절하기에 실제적인 어려움이 많을 뿐만 아니라 그 진압이 더디어 유대 땅이 항상 소요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황제의 이해와 아령을 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의 총독쯤 되면 고위 관리로서 정치적인 경쟁심 때문에 총독들 사이에 상항에 따라서는 협조를 해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빌라도가 이 같은 상황 하에 있었기 때문에 자기 소신대로 통치를 하지 못하고 유대인들이 원하는 대로 끌려갈 수 밖에 없었다는 것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고서에는 밀정을 민간에 파송하여 예수의 언행들을 낱낱이 보고받았다고 합니다. 혹 여러 군중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예수가 정치적인 위험인물이 아닐까? 하는 우려에서였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가 전혀 위험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빌라도의 판단은 나름대로의 충분한 사전조사와 확신 속에서 내린 결과입니다.
빌라도가 예수에 대하여 할 수 있는 선처, 유월절 전에 죄수 하나를 방면하는 관례에 따라 예수를 놓아 주어 이 사건을 종지부찍으려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외칩니다. “우리는 바라바를 원합니다.”
18:39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요18:40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그러자, 백성들은 바라바를 석방하라고 외칩니다. 바라바는 ‘강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만만치 않습니다. 여기 ‘강도’ 로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로 ‘레스테스’는 강도나 약탈자이기보다는 폭력적인 사람이라는 뜻이 강합니다. 당시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 ‘레스테스’를 열심당(Zealots)로 보았습니다. 로마인들의 시각에서는 열심당원들은 근절해야만 하는 살인과 약탈을 일삼는 폭력배들이고, 유대인들에게는 자유를 위해 싸우는 영웅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바라바는 잡범이 아니라 정치적인 죄수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라바를 풀어달라 했습니다. 이어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목 박으소서”라고 외칩니다. 빌라도는 결국 유대인들의 “못 박으시오!”라는 여론에 밀립니다. 할 수 없이 빌라도는 예수를 죽는 데 내어주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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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가 그의 모든 청중들에게 모종의 혁명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여호와가 마침내 왕이 되고 계신다면, 카이사르를 비롯해서 그 밑의 수많은 다른 통치자들은 그들의 권력이 적어도 상대화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들과 실천을 통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끊임없는 재정의는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그의 직전에 등장했던 갈릴리 사람 유다(헤롯 대왕의 뒤를 이어 그 아들 아켈라오가 유대 땅을 다스렸으나 폭정으로 인하여 곧 그 통치권을 박탈 당하고, 수리아 총독의 관할 통치가 시작됩니다. 마침 구레뇨 총독은 서기 6년 징세할 세금의 규모를 정하기 위하여 정기적인 호적 등록을 시작합니다. 이에 갈리리 사람 유다가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열심당(Zealots)이 조직됩니다)나 한 세대 후에 등장하게 될 시몬 바르 기오라(서기 63-70년의 유다 전쟁에서 예루살렘에서 로마군의 공성전에 맞서 항쟁한 반란군을 이끌었습니다)와 동일한 범주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비록 고위 제사장들과 빌라도가 예수에 관한 심문을 아주 철저하게 수행하지는 않았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몇몇 심각한 차이들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생각해 보아도 빌라도는 특별히 유능하거나 저명한 관리가 아니었습니다. 유대 땅에서의 그의 통치는 흔히 도발적이고 난폭하였습니다.
빌라도에 대한 필로의 묘사는, 비록 틀림없이 수사적인 효과를 위하여 과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인용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필로는 빌라도가 헤롯 궁전에 황금 방패들을 세움으로써 유대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던 사건을 묘사하고 있는데, 필로가 보기에는, 이 사건은 자신의 동상을 세우려는 가이우스(Gaius)의 계획이 실행되는 경우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미리 알아보려고 한 소행이었습니다. 필로는 방백들의 대표단이 빌라도와 대면하여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를 디베료(티베리우스)에게 말하겠다고 위협한 것으로 묘사합니다. 이때에 빌라도의 반응은 시사해 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는 그들이 실제로 사절단을 보내서 총독으로서의 그의 여러 가지 처신들, 즉 뇌물을 받은 것들, 사람들을 모욕한 일들, 강탈 행위들, 무례하고 제멋대로 불의를 행한 것들, 끊임없이 반복된 재판 없는 처형들, 무수한 잔악무도한 행위들을 폭로할 것을 두려워하였다. 따라서 그의 온갖 보복적인 행위들과 난폭한 성격으로 인해서 그는 곤경에 처해 있었다. 그는 이미 헌정된 것들을 철거할 용기도 없었고, 그의 신민들을 기쁘게 할 일을 하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이와 동시에 그는 이러한 문제들과 관련된 티베리우스의 일관된 정책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
우리의 현재의 논의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흥미로운 것은, 수사학적 표현 배후에서 엿볼 수 있는 “방패” 사건에 관한 필로의 기사가 빌라도 앞에서의 예수의 재판에 관한 요한의 기사와 아주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이 두 사건에서 빌라도는 그의 유대인 신민들이 원하는 것을 하지 않고자 하는 마음과(그는 가능한 한 유대인 당국자들의 기를 꺾어 놓고자 했습니다) 자신에 관한 소식이 새어나갈 경우에 티베리우스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 사이에서 갈등하였습니다.
결국 유대인 당국자들은 빌라도의 최고의 약점을 노립니다.
요19:12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이것은 우리의 현재의 논의 속에서 쟁점이 되는 문제를 제기합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돌리기 의하여 빌라도의 인품을 미화하였다고 말하는 주장이 한동안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요한과 나머지 사람들이 빌라도를 연약하고 우유부단하며 포악하고 진리나 정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두 가지 절박한 사정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것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만들고자 시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섣부르게 빌라도를 영웅 또는 성자로 묘사한 적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지금 로마의 총독이나 유대 당국자들은 치열한 수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손을 씻는 저 유명한 장면은 분명히 역사와 마태의 편집 속에서 단순히 그의 냉소주의적 태도를 보여주는 절정으로 읽혀져야 합니다. 빌라도는 총독이었습니다. 그는 예수의 죽음에 대하여 책임이 있었습니다. 손을 씻는 것은 완전히 자신의 권한 안에 놓여 있었던 일에 대하여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듯이 책임을 회피하려는 공허하고 경멸스러운 상징이었습니다.
기록들로부터 드러나는 것은 빌라도는 예수가 선하고 고상하며 거룩하고 의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를 구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빌라도는 언제나 고위 제사장들이 원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을 행하고자 했기 때문에, 이때에도 고위 제사장들이 원하는 것과 정반대의 것을 행하고자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빌라도의 통상적이고 확고한 행동양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서는 빌라도는 방해를 받았습니다. 공관복음 전승에 나오는 비교적 짤막한 기사들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좀 더 긴 기사에 비추어 보면 더 많은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이것들을 종합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내용이 드러납니다.
첫째, 빌라도는 예수가 통상적인 혁명 지도자, “레스테스”(lestes) 또는 의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예수가 메시야를 자처하는 자였다면, 그는 매우 이례적인 경우가 됩니다. 이러한 인식의 일부는, 우리가 짐작할 수 있듯이, 죄수 자신의 애매모호한 언급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네 개의 기사 모두에 나와 있는 대로, “너희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이 말은 ‘그 말은 너의 것이다, 네 맘대로 해석해라’ 등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의도적인 전가의 말로 해석되어집니다.
둘째, 그러므로 빌라도는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처형하고자 하는 나름대로의 이유들을 갖고 있고, 반란죄를 그 편리한 핑계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셋째, 이것은 빌라도에게 그가 통상적으로 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것, 즉 그들의 요청을 거부할 여지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빌라도는 실제로 그렇게 하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무리들이 유월절 관습의 일부로써 예수를 놓아달라고 요청하기를 바랐던 것으로 보이지만, 무리들이 예수 대신에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요구함으로써 그 의도가 무산되었습니다.
넷째, 빌라도가 실패하게 된 것은 유대 지도자들이 그가 이 반란자 왕을 처형하지 않는다면 카이사르에 대한 불충성의 죄를 지게 될 것이라고 단호한 어조로 지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감정적으로 정치적으로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완벽하게 의미가 통합니다.
로마 당국자들의 견지에서 볼 때, “예수는 왜 죽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빌라도가 정의 앞에서 냉소적인 파워 게임을 했을 뿐만 아니라(이것이 통상적인 것이었습니다), 또한 이 경우에는 두 당사자 앞에서 자신만의 이익을 노골적으로 취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질문에 더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유대 당국자들, 특히 고위 제사장들은 왜 예수를 반역 선동자로서 빌라도에게 데려 갔던 것인가? 그리고 예수는 왜 선동죄라는 죄목에 대하여 스스로를 변호하지 않았던 것인가? 살필 차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