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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전적으로 성경 읽기
마태복음부터 처음 읽기/마 27:1-66

마 27:39-44 동족 유대인에게 모욕을 당하다

by pooh_in_the_Way 2022.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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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27: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마27: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마27: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마27: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마27: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마27: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우리는 앞서 산헤드린 공회원이 예수를 신성모독으로 정죄한 후 그를 조롱한(26:67-68)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그들은 (십자가에서 벗져진 채 십자가에 못 박힌 그 모습대로) 무방비 상태로 있는 예수에 대해 다시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른 유대인과 일반 대중(39)과 십자가에 함께 달린 강도들까지 합세합니다. 따라서 이 장면은 27-31절에 제시된 이방 군병들의 조롱에 상응하는 유대인의 공격으로 볼 수 있습니다. 두 민족은 자신과 관련된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예수의 주장을 조롱합니다. 로마 군병들은 왕권에 대한 정치적 주장에, 유대인은 성전 건물 및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장과 관련된 종교적 문제에 초점을 맞춥니다. 유대 백성을 대표하는 다양한 계층(공회원, 지나가는 시민, 붙잡힌 폭도 등)의 결집은 예수가 자신의 세대에 의해 완전히 버림받는 통렬한 장면을 보여 줍니다.

 

39-40, 처형 장소는 경고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을 택하였습니다. 일반 백성을 대표하는 지나가던 자들의 조롱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라는 구절로 묘사됩니다. 이 구절은 시편 22 7(“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에서 고난당하는 의인을 보고 조롱하는 자들에게 사용되었습니다. 시편에서 그들이 조롱한 내용(“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43절에 나타납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이 지나가던 자들은 예수의 주장에 대해 두 가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전에 대한 위협(26:61)과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주장(26:63)입니다. 산헤드린 청문회의 기소 내용에 대한 소식은 이미 새어나갔겠지만, 예수에 대한 이 두 가지 혐의는 갈릴리 선지자에 대한 항간의 소문에 기초한 것으로 보입니다. 성전을 파괴하고 다시 세울 수 있는 기적적인 능력을 가졌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특별한 주장을 했든, 그는 십자가에서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의 무기력한 현재 상태는 자신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한다는 것입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구절은 마귀의 두 가지 시험(4:3, 6) 서두에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는 다시 한 번 자신과 하나님의 특별한 관계를 통해 신체적 고통을 피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혹은 이미 겟세마네에서 극복하였습니다(26:53-55). 사실 예수에게 십자가에서 아버지의 목적을 성취할 것을 요구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관계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방인 군병들조차 54절에서 이러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41-43, 두 번째 그룹의 조롱자들(“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마태는 공회를 구성하는 세 부류를 모두 제시함으로써 예수가 유대의 지배층 전체로부터 완전히 거부당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들의 조롱은 일반 대중에 비해 신학적으로 복잡합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들 역시 예수에게 “자기를 구원하라”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도전합니다.

 

첫 번째 요구는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는 주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마태복음에서 “구원하라”는 예수의 사역을 묘사하는 신학적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1 21절은 예수가 직접 한 말씀이 아니라 천사의 진술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는 신체적 치유와 구원이라는 마태복음의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구원”은 많은 사람들이 메시아 주장과 연계할 수 있는 용어입니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호산나”라고 외친 것(21:9, 15)을 예수에게 자기 백성을 구원하라는 요구로 해석한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요구와, 예수가 자신의 죽음과 고난에서 “구원”(마태복음에서 말하는 일반적 구원 개념이다)할 수 없는 무능력에 대한 대조는 분명한 익살에 해당합니다.

 

두 번째 요구는 메시아로서의 왕적 주장과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의 왕” 역시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분위기를 반영한 것으로 로마가 어떤 뜻으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표현했든 유대인의 입에서 나온 보다 분명한 메시아적 호칭이었습니다. 이 구절에 덧붙인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는 조롱은 예수를 기적을 행하는 자로 따랐던 순진한 갈릴리 사람들에 대한 조롱으로 보입니다. 이곳 예루살렘에서 그는 기적을 억제하였으며, 확실히 지금이야말로 이러한 기적을 행할 때라는 것입니다(42절과 43절의 "이제[지금]”가 반복된 사실에 주목해서 읽을 때). 기적을 행하는 자가 자신도 지키지 못한다면 굳이 믿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내용적으로나 70인역의 어법에 있어서 명백히 시편 22 8절을 반영하고 있습니다("그를 구원하실지라”와 "하나님이 원하시면”은 동일한 단어를 사용합니다). 고난당하는 의인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조롱을 당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헌신에 대해 실제적인 도움으로 응답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내용만으로도 성경을 반영한 것이지만, 이어지는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라는 구절은 이러한 암시를 더욱 확장합니다. 지혜서 2 12-20절에는 악인이 의인을 대적할 계획을 세우며, 특히 “하나님의 자녀”(2:13)라는 주장으로 인해 분노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주장은 2 16(“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라고 자랑한다”)그의 말이 사실인지 보자. 그의 인생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지켜보자. 왜냐하면 의인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이 그를 도와주실 것이고 그의 원수들의 손에서 그를 구출하실 것이기 때문이다”(지혜서 2:17~18, 사역). 지혜서 2:18에서 사람들은 의인을 향해 만일 그가하나님의 아들이면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실 것이라고 놀립니다. 물론 지혜서와 차이점도 있습니다. 지혜서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하는 이는 의인이지만, 마태가 묘사하는 예수는 아버지의 계시를 알고 계시는 유일한 아들(3:17; 17:5)로서 어느 누구도 소유할 없는 유일성을 가진 아들이며(11:27), 신적인 존재로서의 아들(14:33)이십니다.

 

그들이 시편 22 8절의 주제를 택한 것은 이러한 주장과 차이점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지혜서를 알고 있는 마태복음 독자는 당연히 유대 당국자의 말에서 악인의 냉소주의 및 경건한 자에 대한 박해에 관한 지혜서의 묘사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44, 세 번째 그룹에 해당하는 십자가에 함께 달린 강도들의 비방은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공회원보다 훨씬 세속적이고 단순합니다. 만일 그들이 바라바와 연관이 있다면(16-17, 18절 주석 참고), 예수에 대한 그들의 적개심은 충분히 마태가 15-23절에서 두 예수를 유월절 특별 사면의 후보로 제시함으로써 설정했던 두 가지 “석방” 프로그램 사이의 대조를 강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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