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마23:14 (없음)
마23: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화 선언은 선언을 듣는 자들, 그들의 죄, 그들에게 임할 심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수께서 위선적인 자들을 향해서 화를 선언을 할 때 그 대상에 대한 묘사는 본문이 진행될수록 구체적이고 강해집니다. “눈먼 인도자여”에서 “어리석은 맹인들”으로, 그리고 마지막(17, 24절)에는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33절)로 불려집니다.
예수의 논박은 일곱 가지 “화”를 중심으로 제시됩니다. 첫 번 째 여섯 차례의 화는 세 쌍이 세 가지 주제와 연결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 쌍(13-15절)은 사람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것에 대한 언급입니다. 두 번째 쌍(16-24절)은 종교와 윤리의 중요한 원리보다 사소한 일에 관심을 가지는 왜곡된 관점에 초점을 맞춥니다. 세 번째 쌍(25-28절)은 겉과 속의 정결을 대조합니다. 일곱 번째 화는 하나님이 보내신 자들의 살해에 동참한 죄를 지적함으로써 비난의 절정에 이릅니다.
그러면, 일곱 화는 누구를 위한 경고와 책망인가? 2인칭인 화 선언은 직접적으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유대 지도자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된 심판, 선지자적 심판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종교 지도자들의 문제를 지적하시지만, 그들은 귀를 닫고 예수를 적대적으로 대하기 때문에 결국 이 메시지를 듣고 자신들에게 교훈으로 적용해야 하는 대상은 제자들 또는 교회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문제에 대한 책망을 교훈으로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첫째 화(13절)와 둘째 화(15절)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의 관계를 다루는 점에서 쌍을 이룹니다. 두 구절은 위선적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열정이 어떤 결과를 낳는가를 보여 줍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뿐 아니라 타인의 운명도 비극적으로 이끕니다.
13절, 예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위선자들로 규정하고 그들에게 화를 선언하십니다.. 화는 심판을 의미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겉모습과 달리 실제로는 하나님의 뜻과 반대의 행동을 한 것은 “위선”입니다. 6:2~18에서 위선이 마음에 있는 실제 모습과 겉으로 드러난 모습의 차이를 의미했던 것처럼, 23장의 위선도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실제 행위의 차이를 가리킵니다. 이들은 위선자들에게 내려질 화를 면할 수 없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할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뜻에서 먼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들에게 화를 선언하신 것은 천국을 닫는 것, 다른 사람들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23:13의 “닫다”는 천국에 사람들이 들어가는 문을 닫아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국에 들어간다는 표현(5:20; 7:21; 18:3; 19:23. 24; 21:31)은 구원과 영생을 얻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문의 이미지는 7:13~14에 나온 것이며, 25:10에서는 문이 닫히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율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으로 인도하는 교사들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백성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바르게 인도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23:2) 자신들이야말로 토라의 올바른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권위를 갖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백성을 그릇된 방향으로 인도해서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만듭니다. 위선자들의 잘못된 방향의 열정은 “현재적으로” 천국에 들어가려는 사람들 바로 앞에서 그 문을 닫아 버립니다. 위선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받은 자들 역시 동일한 운명에 처해집니다.
15절은 첫 번째 화의 주제를 발전시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수고해서 개종자를 만들지만 자신들보다 더 악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후기 구약 시대와 제2성전기 유대교에서 개종자는 유대교로 개종한 비이스라엘 출신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주후 1세기 전후로 유대인들이 23:15의 경우처럼 실제로 개종 행위를 열심히 수행했는지 여부는 논쟁거리입니다. 바다와 육지를 건너서 개종자를 얻는다는 표현은 이방인들을 향한 바리새인들의 적극적인 개종 행위를 말하는가? 아니면 바리새인들이 이방 지역의 유대인들에게 가서 동족 유대인들을 바리새파 운동으로 이끌려는 노력을 뜻하는가? 첫 번째 견해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1세기 전후에 적극적인 이방인 개종 행위와 개종 운동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행 2:11; 6:5; 13:43). 유대인들은 유대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없애고 여호와 신앙을 적극적으로 소개함으로써 이방인의 개종을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종 운동을 전개했다는 사실에 대해 회의적인 두 번째 견해에 따르면, 이방인들을 위한 개종 행위에 열심을 보인 자료가 거의 없습니다. 당시의 자료는 유대교 신앙의 좋은 점을 강조해서 헬라 문화 속에서 이 신앙이 존재해야 할 이유를 변증한 것이지, 개종을 위한 증거가 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당시에는 두 종류의 개종자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첫째, 어떤 개종자들은 할례와 율법을 철저히 지킬 의무를 받아들였습니다(행 2:10; 6:5; 13:43). 이런 식의 개종은 사실상 유대인으로 만드는 귀화를 의미했습니다. 개종을 위한 선교는 유대교 내부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고,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런 선교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오히려 적대적이었습니다. 구약과 유대교의 선교는 예루살렘으로 이방인들이 몰려드는 구심력 운동이었으므로 기독교 사도들의 원심력 운동과 같은 식의 선교와는 달랐습니다. 둘째, 어떤 개종자들은 할례와 율법 전체를 철저히 지키기보다는 회당의 예배에 참여하고 유대인들의 삶을 존중하고 유대교를 지지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로 불렸습니다(행 13:50; 16:14; 17:4, 17; 18:7). 요약해 보면, 23:15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는 행위는 이들의 행위를 강조하려고 사용한 수사적 과장법이며, 실제 행위였다고 하더라도 소수 열성분자들에 의해 행해진 일로 보입니다.
이렇게 애써서 개종자 한 사람을 얻어냈으나 실제 결과는 천국의 아들(8:12; 13:38)이 아니라 게헨나의 아들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개종자가 개종시키는 자보다 더 열정적인 현상은 흔히 나타납니다. 게헨나의 자식은 “악한 자의 아들들”(13:38)이며, “천국의 아들들”과 대조를 이룬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면서 개종시킨 사람을 자신들보다 더 게헨나의 자식이 되게 한다는 표현은 그들이 게헨나의 자식들인 점을 전제합니다. 천국에 들어 가지 못하게 하는 것(13절)과 지옥 자식에 되게 하는 것(15절)은 같은 의미입니다. 율법학자인 서기관들과 율법 준수에 헌신한 바리새인들은 신학과 신앙의 공식적인 대표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바른 방향을 향한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올바른 뜻을 전하는 자들을 배척하고, 이를 참된 열정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르침과 삶은 도리어 사람들을 천국의 문으로 향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열심히 개종을 위해 노력하지만 결과가 기대했던 것과 정반대라는 점에서 13절과 15절은 연결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