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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부터 처음 읽기/마 23:1-39

마 23:1-1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시다

by pooh_in_the_Way 2022.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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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23:1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마23: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마23: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마23: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마23:5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마23:6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마23: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마23: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마23:9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마23: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마23: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마23: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23:1~12에서 예수는 제자들이 경계해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행위를 언급하고 제자들이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덕목을 가르치십니다.

 

1절, 그때 예수께서 무리와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본문을 보면,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를 함정 빠뜨리는 실패함으로써, 그리고 예수의 신학적 질문에 전혀 답을 하지 못함으로써 예수의 권위에 압도당한 떠났을 것입니다1절에는 무리가 제자들과 함께 등장하지만, 8절의그러나 너희는 표현은 강화가 전개되면서 실제로 예수께서 교육하시는 대상이 제자 공동체임을 암시합니다.

 

2-4, 먼저 예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행동이 제자들이 따르지 말아야 모습임을 가르치십니다. 그들의 문제 하나는 모세의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모세의 자리는 회당에 있는 의자를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회당에 모세의 자리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권위와 존경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모세의 자리는권위 상징하는 표현이라고 있습니다. “모세의 자리에았으니”라는 말씀은 모세의 권위로 가르친다는 비유적 표현일 있습니다. 모든 바리새인이 공식적인 선생의 역할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서기관 못지않게 자신들이 모세 전통의 참된 계승자라고 생각했습니다. 표면상 이 진술은 서기관의 가르치는 권위를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있지만, 이어지는 본문에서 예수는 이러한 권위에 반박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이어지는 3절처럼 반어법적 문장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은 것을 지적하셨는 , 이제 자리는 제자 공동체가 차지하는가? 본문은 베드로나 교회에게 주어진 권위를 암시하는가(16:18~19; 18:18)? 23:10~13 흐름을 고려하면, 제자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삶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2절이 모세의 자리에 앉는 특권을 강조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2절에서 예수는 누가 모세의 자리를 앉는 특권을 대체하는지 설명하기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태도 자체를 문제 삼으십니다. 그러므로 청중은 2절을 통해서는 대체하는 권위를 상상하지 말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문제를 인식하고 나서 3절로 나아가야 합니.

 

예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행위를 배우지 말고 그들이 말하는 것은 행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제자들은 율법을 어기는 자들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이 가르치는 율법을 성취하는 자들입니다. 제자들은 바리새인들의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명령 또는 율법에 나타난 뜻을 행하는 사람들입니다(22:10). 그런데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 (바리새인들이 가르친) 율법의 원래 의도된 의미를 배웁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실천함으로써 의미를 성취할 책임을 맡았습니다. 하늘나라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열매를 맺는 백성(21:43)에게 주어집니다.

 

제자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존재인데, 하나님의 뜻은 모세의 율법에 들어 있기 때문에, 예수의 제자는 모세의 율법이 요구하는 것에 순종해야 합니다. 필자가 반복해서 언급하는 것처럼, 모세의 율법이 요구하는 것은 예수의 해석을 통해서 밝혀지며, 예수의 해석이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신 목적을 드러냅니다.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는 것은 위선을 의미합니다. 예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자신들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폐한다고 평가하셨습니다(15:3~9).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예수의 관점에서 그들의 행위(= 열매) 선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들은 하나님이 계명을 주신 원래의 뜻을 밝혀 주시는 예수의 해석과 삶을 원칙으로 삼아서 모세의 법을 행하고 지켜야 합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행동을 하지 않음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짐만 지우고 그것에 대처할 수 있는 도움은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서기관들이 먼저 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웠다는 것은 서기관의 규례를 만들어 낸 광범위한 해석학적 연구와 논의를 암시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만든 전통은 일상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지고 가기에 너무나 힘든 짐이었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우는 예는 음식 규례(9:10~13), 엄격한 안식일 규례(12:1~13), 정결 예식에 대한 규례(15:2) 등에 나타납니다. 무거운 짐을 묶고 지우는 것은 안식일의 규례처럼(12:1~14)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율법 해석을 통해서 백성에게 무거운 짐을 부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짐은 가볍지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따르는 사람들은 무거운 짐을 지느라 힘들어 했습니다. 그들이 짐을 무겁게 하고 시간이 흐를 수록 무겁게 했으니 사람들은 짐이 무거워서 움직일 없었습니다. 따라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따르는 자들은 예수를 따르는 “쉬운 멍에”와 “가벼운 짐” 대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채(11:28), 자유를 주기보다 종이 되게 하는 엄청나게 불어난 법의 무게에 허덕여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힘든 짐을 사람들의 어깨에 지우고도 사람들을 위해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려 하지 않습니다. 손가락에 신체적인 문제가 있지 않는 , 손가락을 움직이는 행위는 가장 쉬운 동작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들에게는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도와줄 마음이 없었습니다 이렇듯 무거운 짐을 사람들을 도와주지 않는 태도는땅의 백성 율법 준수에서 멀다는 바리새인들의 편견 때문일 수도 있다고 해석하였기 때문입니다.

 

5-7,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대한 두 번째 책망은 그들의 종교적 행위가 하나님의 인정보다 사람의 인정을 얻으려 했다는, 그들의 위선적으로 행동하는 문제입니다. 본문은 앞서 예수가 “외식하는 자”에 대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 인간의 칭찬을 얻기에만 열중한다고 언급한 6 1-6, 16-18절을 상기시킵니다. 이제 예수는 거기에다 의복과 사회적 지위에 초점을 맞춘 다른 사례를 더하십니다. (5), 모임에서의 위치(6), 인사를 받는 (7)으로 드러납니다.

 

그들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경건한 모습을 보여 주는 방법 하나는 경문 띠를 넓게 하고 옷술을 길게 하는 것이었습니다경문은 문자적으로는보호 장치라는 뜻입니다. 도구는 성경 본문을 선택해서 담아 놓는 가죽함(“테필린”) 가리키며, 주로 출애굽기 13:1~10, 11~16, 신명기 6:4-9, 11:13-21 함에 담아 이마에 달았다. 경문을 달고 다니는 것은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야 함을 기억하고 순종하기 위함이었다.  관습은 출애굽기 13:9, 16, 신명기 6:8 문자적으로 이해한 것이며, 예수의 시대에도 실행되고 있었습니다.

 

옷술은 민수기 15 38-39절과 신명기 22 12절에서 요구하는 유대인의 옷의 끝자락 군데에 다는 (‘치치트’)입니다. 성경 시대에 술은 예수님처럼 평상시 겉옷에 달았으며 (9:20:14:36) 특히 기도를 위한 옷술이 발전된 것은 후의 유대교에서입니다. 옷술 역시 영적인 도움을 위한 것이지만( 15:39) 그것을 길게 것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앙심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그만큼 성경을 많이, 열심히 암송하고 순종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고 경문과 옷술을 크게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사회적 기회는 세속 생활(만찬장이나 시장)과 예배에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잔치의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합니다. 윗자리는 제일 중요한 손님을 위한 자리로서 주인 바로 옆에 마련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가장 존중받는 자리에 앉음으로써 자신이 최고로 가치 있는 위치에 있음을 드러내는 것을 즐겼습니다. 그들은 또한 종교적으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보여 주려고 회당의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을 원했습니다.

 

랍비”(rabbi)위대한 이라는 뜻으로 율법 교사들, 모세의 법과 유대 전통을 가르치도록 공식적인 승인을 받은 사람에게 붙여진 칭호였습니다. 랍비 칭호는 예수 당시에는 율법을 가르치는 권위 있는 교사나 지도자에게 붙여 졌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시장에서 인사를 받는 것과 사람들에게 랍비로 불리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영예를 누리는 문제를 지적하십니다. 예수에게 적용된 경우(26:25, 49; 9:5; 10:51; 11:21; 1:49; 3:2 ) 호칭은 직무적인 의미보다 평판에 근거한 존칭으로 사용된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는 8~12절에서 제자 공동체를 향해 어떻게 스스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문제를 피할 있는지를 가르치십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는 랍비(8), 아버지(9), 지도자(10) 불리는 것을 즐기지 않도록 경고하고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는 제자들의 행동 지침을 말씀하시면서 그리스도의 삶을 모본으로 제시하시기 때문에, 8~12절은 기독론(그리스도) 교회론(제자 공동체) 무게를 둡니다. 제자들이 예수의 삶을 따라야 한다는 교훈은 단락뿐 아니라 1~12절에 나타난 마태의 의도입니다.

 

8절, 공동체를 향한 지시를 예고하는그러나”(de, ) 시작하는 8절은 23장의 초점이라고 있습니다. 제자들은랍비칭호를 즐기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에게 명의 교사만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는 강조하십니다. 10절에서 예수는 다시 한번 자신을 유일한교사”(혹은지도자”) 언급함으로써 유일한 교사의 정체를 강조하십니다.

 

제자 공동체가 분의 교사를 것은 교회가 예수의 가르침에 절대적 기반을 두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너희는 형제이기 때문에 랍비로 불리는 것을 거부해야 합니다. 예수의 말씀은 형제들 사이에는 권위주의 체계 또는 높고 낮음의 계층이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평등한 가치를 드높이는 것이 기독교 공동체의 정체성이기 때문에 불필요한 칭송으로 특정인이 높임 받는 것은 예수께서 책망하신 위선의 길에 가깝습니다. “또한 랍비 호칭은 상대방을 높이는 것으로 기독교 공동체의 특징이 되어야 형제자매 사이의 가족적인 관계성을 무너뜨릴 있다.” 본문은랍비호칭을 거부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형제와 자매의 관계인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에 급진적으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랍비로 불리길 좋아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행동을 따라하고 싶은 유혹에 시달릴 것이고, 그때는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으므로, 그들의 행동을 닮지 말아야 합니다.

 

 9절, 예수는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것을 경고하십니다. 아버지는 구약 지혜 전통에서 지혜를 가르치는 교사를, 예수 당시에는 존경받는 장로, 존경을 받다 죽은 사람, 랍비를 가리켰습니다. 땅의 아버지는 랍비나 개인 교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어, 1~2세기의 유대인들은아버지칭호를 랍비의 이름 앞에 붙였습니다. 육신의 아버지가 아이들을 책임지듯이 유대인 율법 교사들은 그들의 학생들을 책임집니다. 이와 같은 대조는 구절에서 예수를 유일한 교사로 조한 것과 연결됩니다. 제자들에게 유일한 선생이 예수라면, 유일한 아버지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는 오직 분입니다. 제자들의 생명은 모두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서 왔습니다. 예수는하나님 아니라너희의 아버지. 하늘에 계시는 이라고 묘사하시는데, 표현은너희의 아버지, 땅에 있는 대조됩니다. 제자들은땅에 있는 그들의 아버지로 부르지 말고하늘에 계시는 아버지로 불러야 합니다.

 

교회의 정체성은 형제자매의 관계입니다. 형제의 개념은 아버지 아래서 서로 평등과 결속력을 전달합니다. 형제자매로 이뤄진 공동체는 서로 윗자리에 앉으려 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좇아서 마음대로 살지도 않습니다. 예수는 지금 나이든 어른을 묘사하는 호칭으로서의 아버지를 비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분이신 아버지 아래서 분이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살면서 서로 등등한 가치를 존중하고 가족이라는 공동의 가치를 존중할 것을 가르치십니다.

 

세 번째 호칭인 지도자는 신약 성경에서 이곳에서만 나타나며, 70인역에서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 단어의 원래적 의미는 길을 안내하는 “인도자” 또는 “지도자”이지만, 흔히 선생이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따라서 사실상 8절의 “선생”과 동의어이며, 영어의 “멘토”와 동일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8절과 마찬가지로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러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놀랍게도 마태는 이곳에서 예수가 “메시아”(그리스도)라는 호칭을 3인칭으로 언급한 것으로 묘사합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 호칭을 자신에게 사용하는 것을 금했으며(16:20), 예수 자신도 지금까지 이 호칭을 사용하는 것을 피했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예수가 자신의 사역을 메시아적 관점에서 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으며, 여기서도 8절처럼 자신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문제는 1절에 의하면 제자들과 함께 일반 대중도 말씀을 듣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앞서 8절에서 주된 청중은 예수의 제자들임을 살펴보았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마태는 이 호칭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의 독자나 당시 제자들에게는 명확한 사실이지만, 본문의 어법 자체는 “그리스도”가 예수님이라고 직접 언급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공동체에 그리스도는 고난을 통해 승리하신 이미지가 강합니다. 그리스도는 참된 인도자이지만 겸손히 섬기는 종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높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 사람은, 역설적으로, 고난의 길을 가신 그리스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지도자라는 칭함을 받지 말라는 경고를 듣는 대상은 일차적으로 지도자로 칭함을 받기 쉬운 또는 실제로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지도자가 그리스도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누구의 제자인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존경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따르도록 하는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들은 연약한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만들 있습니다. 인간 지도자를 따르면 공동체는 분파주의로 흐르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제자 공동체는 사람 사람에게 기대어 엉뚱한 방향으로 흩어지지 말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11-12, “너희 중에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0절에서 (고난을 받은)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명령은 자연스럽게 11-12절로 이어집니다. 인정받는 지위를 추구하는 태도를 비판하시고(5~7) 구체적인 지침을 알려 주신(8~10) 예수는 어떻게 행동하는 사람이 사람인지를 가르치십니다(11~12). 11절의너희 제자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제자 공동체에서 자는 공동체를 섬기는 사람이어야 합니(20:26).

 

예수께서 여러 차례 제자들의 권위를 언급하셨기 때문에(13:52; 16:19; 18:18; 19:24-27, 28; 28:18) 제자들은 자신들의 위치가 섬김 받는 것으로 오해할 있습니다. 그러나 유일한 선생이신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고 강조하신 삶은 섬기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비슷한 내용이 18:3 등장했습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핵심은 겸손입니다. 제자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달리 존경받는 칭호를 사용하기보다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하고 사람들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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