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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부터 처음 읽기/마 23:1-39

마 23:37-39 예루살렘을 두고 이르시다

by pooh_in_the_Way 2022.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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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23: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마23: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마23:3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는 청중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서 예루살렘으로 확장하십니다. 본문은 예수의 애가(37), 심판(38), 약속(39) 순서로 구성됩니다.

 

37절, 예수는 예루살렘을 인격화해서 선지자들을 죽인 (23:34; 5:12; 7:2) 예루살렘에 보냄 받은 자를 죽인 행위를 지적하십니다. 예루살렘은 유대 민족의 상징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민족의 멸망을 뜻합니다. 예루살렘은 심판을 피할 없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같은 운명에 놓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도 이들처럼 하나님이 보내신 메신저들을 핍박하고 죽였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마지막 메신저인 예수를 죽일 것입니다(16:21; 20:17~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암탉이 병아리들을 모으듯 민족을 품기 원했습니다. 어미 새가 새끼들을 날개 아래 품는 것은 안전과 양육과 평안을 주기 위한 행위로, 어머니가 자녀를 돌보는 것처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품으신 사랑을 강조하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자녀를 날개 아래에 모으기 위한 마지막 기회는 아들이신 예수의 사역으로 주어졌습니다. “얼마나 자주라는 표현은 아마도 공관복음에는 기록되지 않지만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유대 지역 사역을 암시하는 내용일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회복되는 길은 예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뜻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백성은 예수의 사역을 거부했습니다. 이제 멸망의 책임은 모으려고 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이를 거부한 쪽에 있습니다.

 

38, 예수는 하나님의 포용을 거부한 결과로 예루살렘이 멸망당할 것을 예고하십니다. 여기서보라 구약에서 선지자가 경고를 전할 사용한 표현입니다(, 삼상 2:31; 5:8). 예루살렘에 대한 예수의 심판 선언은 단순한 예고에 그치지 않고 예루살렘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으로서, 선언의 결과로 예루살렘은 멸망합니다.

 

너희 이스라엘, 예루살렘, 성전 무엇을 뜻하는가? 10:6 15:24 이스라엘의 집이 나오지만너희의 너희이스라엘 동일시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입니다. 21:13(“ 집은 기도하는 ”) 24:1~2(성전의 파괴) 고려하면, 너희 집은 성전을 가리킨다고 있습니다. 성전은 ”, 하나님의 집이었으나 역설적으로너희의 으로 용도가 왜곡되고 맙니다. 23:37~38 예루살렘과 너희 사이의 관계는 이사야 64:10~11 예루살렘과 성전이 황폐하게 된다는 부분과 연결됩니다. “주의 거룩한 성읍들이(“우리의 거룩한 ”) 광야가 되었으며 시온이 광야가 되었으며 예루살렘이 황폐하였나이다. 우리 조상들이 주를 찬송하던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불에 탔으며 우리가 즐거워하던 곳이 황폐하였나이다.” 70인역의우리의 거룩한 황폐하게 됐다 마태복음 23:38너희 황폐하여 버려진것과 병행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예수는너희의 사용해서 성전이 황폐해서 버림받게 것을 강조하십니다. 27:51~54에서 보게 내용처럼, 하나님이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실 산들이 진동하는 이미지( 64:1) 64 전체의 그림은 예수의 죽음과 예루살렘 성전의 버림 받음을 연결하는 마태의 묘사와 유사합니다. 또한 본문은 예레미야 12:7 22:5 암시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는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전한다고 있다. “그러나 너희가 말을 듣지 아니하면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노니 집이 황폐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2:5). 이미 예수는 21:13에서 예레미야 7:11 인용해 성전의 운명을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성전의 운명은 그것을 중심에 두는 예루살렘의 운명과 분리되지 않고 어떤 유대 문헌은 성전과 예루살렘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너희 집을 예루살렘 성전 혹은 성전을 중심으로 삼는 예루살렘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해 보입니다.

 

버림받아 하나님의 영광(쉐키나) 성전을 떠나는 개념을 상기시킵니다. 예수께서 성전을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것입니다. 예수와 성전의 운명을 연결해 보면, 예수는 성전을 떠나게 되고(24:1~2), 그의 죽음 직후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고(27:51), 예루살렘이 멸망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떠남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것으로서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직결됩니다.

 

39, 38절에서 예루살렘 성전의 운명을 언급하신 예수는 39절에서 자신의 운명에 대해 예언하십니다. 그들은이제부터예수를 없습니다. 이곳에는 예언이 없으며, 조건만 존재합니다. 혹은 유일한 예언은 “이제부터 너희는 결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라는 강조적 부정뿐이며, 여기에 이어지는 절(......때까지”)이 유일한 예외가 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때까지”, 그들은 예수를 환영할 때까지 그를 보지 못하겠지만, 두 번째 구절의 부정사 구문은 이러한 환영이 현실화될 것이라는 보장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는 공회를 향해 “이제부터”(이 후에) 그들이 인자가 왕권을 가지는 오는 것을 볼 것이라고 말하지만(26:64), 그때에도 예수를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로 환영할 것이라는 암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마태가 로마서 11 1-32절의 바울처럼 미래적 회개나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기대를 주었는지의 여부에 대한 논의는 본문에서 어떤 자료도 찾을 수 없습니다. 본문은 예루살렘이 메시아와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하지만, 이 조건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어떤 암시도 주지 않습니다. 현재로는 단절이 결정적입니다.

 

예수는 39절을 끝으로 제자들 외의 대중을 향한 가르침을 마치십니다. 24-25장은 제자들에게 사적으로 가르치신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23장은 성전에서 가르치신 장면이므로 예수는 말씀을 마치고 성전을 떠나십니다. 성전을 떠나서 성전을 향해 성전의 운명을 말씀하시는 장면은 자연스럽게 24:1 이하의 본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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