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통전적으로 성경 읽기
마태복음부터 처음 읽기/마 15:1-39

마 15:1-20 바리새인들의 전통에 대한 비판

by pooh_in_the_Way 2022. 4. 8.
728x90

마15:1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마15:2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마15:3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마15:4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마15:5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마15:6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마15:7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마15: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마15: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마15:10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마15:11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마15:12 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마15: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마15:14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시니
마15:15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
마15:1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마15:17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 알지 못하느냐
마15: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15: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마15: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단락은 사실상 예수의 갈릴리 사역 가운데 마지막 에피소드입니다. 갈릴리 밖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조사하기 위해 왔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적대자들을 만난 장면은 마태복음에서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우리는 앞서 12 38절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이라는 조합을 보았습니다. 여기서는 마태복음 다른 곳에서 있는 것처럼 바리새인에게 강조점이 주어지며 따라서 바리새인들 앞에 나옵니다. 12절에는 아예 서기관이라는 언급이 나오지 않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그들이 제기한 문제는 특히 바리새인의 관심사에 어울립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빵을 먹을 손을 씻지 않음으로써 장로들의 전통을 범했다고 따집니다. 마태가 (마가와 달리) 정결 규례에 대한 장로들의 전통( 7:3~4) 설명하지 않는 것은 마태의 독자들이 전통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말한 “(장로들의) 전통 문자적으로는 “전해 내려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성경을 해석해서 만든 전통이고 구두로 전승된 바리새 전통을 가리키는 전문용어입니다.

 

장로들의 전통의 권위는 근거를 시내산에서 모세가 받은 율법에 둡니다. 유대교에서 바리새 운동을 이끈 원로들의 가르침을 의미하며, 전통은 과거부터 유대인들을 거쳐서 내려왔습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바리새인들은 이전 세대로부터전해 내려온장로들의 전통을 사람들에게전해 내려주었으나 전통이 모세의 법에 기록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사두개인들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만 장로들의 전통을 비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장로들의 전통에 근거해서 모든 유대인에 대해 자신들의 권위를 주장했습니다. 구약 성경의 기록이 끝난 뒤에 구두 전통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구두 전통이 토라의 의도를 담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구두 전승(토라)”기록된 토라 같은 권위로 받아들였습니다. 구두 전통을 중시하는 자들은 토라 자체로는 유대 공동체를 가르치기에는 너무 모호하다고 여겼고, 구두 전승을 반영하는 미쉬나는 토라를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하기 위해 세밀한 부분까지 다룹니다.

 

예수는 그들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비난하는 근거를 지적하십니다. 말하자면, 예수는 손을 씻지 않는 문제에 대해 답하지 않고 그들이 근거로 삼는 장로들의 전통을 언급하십니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예수의 말씀은 그처럼 의문스러운전통 그들의 비난의 근거라면 정당성을 인정받을 없으며 따라서 대답할 이유도 없다는 것입니다예수의 반문은 그들의 원래 질문을 꼼꼼히 반복하고 있지만 그들이 범했다고 말하는 전통 대신 하나님의 계명(이 경우 십계명 가운데 다섯 번째 계명)을 제시하며 전통은 그들이 계명을 따르지 않는 근거가 된다고 지적하십니다. 예수는너희하나님, “전통계명 대조하십니다. “ 너희의 전통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질문이 대답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장로들의 전통에 충실했는데, 그런 행동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을 범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관점에서 장로들의 전통은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것으로서 지켜야 타당성이 없습니다.

 

4,  이 대조는 이어지는 구절을 통해 더욱 분명해집니다. 예수는 장로들의 전통이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예로 부모 공경에 대한 하나님의 계명과 장로들의 전통을 지적하십니다. 4절의 앞부분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구약의 십계명에 나오는 내용이며, 뒷부분은 출애굽기 21:17 나오는 부모를 저주하는 행위에 대한 사형 판결을 다룹니다. 십계명의 5계명을 어기는 죄에 대한 심각한 결과를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이르셨으되”는 “너희는 이르되”()와 대조를 이루며 서기관의 전통을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와 대조되는 단순한 “사람의 계명”(9)으로 범주화하십니다. .

 

5, 계속하여 너희는” “너희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내가 드려 유익하게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라고 말하는 자는 부모를 공경할 필요가 없다 말한다고 지적하십니다. 5절의 헬라어 본문에는하나님이라는 용어는 없지만 문맥의 흐름상 드려지는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5절에서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 것은 고르반(qorban)”이라 지칭되는 서기관의 관습입니다. 고르반은 구약의 법에 따라( 27:28; 18:14) 하나님께 드려지는 희생제물이나 예물을 가리켰는데, 세속적이거나 일반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지 못하게 금지된 것을 가리키는 용어가 됐습니다. 이렇게 바쳐진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다른 사람이 소유권을 주장하지 못하도록 하여, 자기 이외의 사람들이 이것을 사용할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친척이나 다른 사람들과 나누지 않기 위해서 고르반 규례로맹세 했습니다. 마가복음을 참조해서 예를 들어 보면, 어떤 남자가 자신의 재산을 고르반이라고 맹세하면 부모는 아들의 재산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할 없었고 아들은 재산을 부모에게 필요도 없었습니다. 만일 아들이 부모가 죽은 이후 고르반을 자신을 위해 사용할 경우에, 아들은 전통을 악용해서 부모를 섬기지 않는 근거를 삼은 것이 됩니다. 고르반을 근거로 전통으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어기게 되는 셈입니다. “하나님께 드림 대한 장로들의 전통은 부모에게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태도를 정당화시킴으로써 결국 실제적으로는 5계명,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너희의 전통과하나님의 말씀 대조하신 것입니다.

 

예수는 장로들의 전통에 의존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위선자들로 규정하십니다. 예수께서 사람에게 직접 위선자라고 부른 장면은 본문이 처음입니다. 예수는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사람들을 22:18에서 위선자들로 부르시고, 23장에서는 여섯 차례에 걸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위선자들이라고 하실 것입니다. 위선자들은 자신들뿐 아니라 그들이 가르치는 백성을 재앙의 길로 인도하며, 실제로 이런 비극은 수난 내러티브에서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사야 29:13 인용해서 그들의 행위를 비판하십니다. 이미 예수는 13:14-15에서 이사야 6:9 인용해서선지자적 심판이라는 주제를 강조하셨는데, 동일한 목적으로 이사야의 본문을 여기서도 사용하십니다. 이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비판의 대상으로 좁히십니다. “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위선은 마음과 입술의 불일치로 나타납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말하지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가르친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을 위한 행위란 자신들의 이득을 위한 위선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계명 15:2 장로들의 전통”, “너희의 전통”(3, 6) 가리키며, 하나님의 계명(3)이나 하나님의 말씀(6) 대조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시는 것을 가르치거나 행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행하지 않거나 가르치지 않는 사람들의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십니다.

 

10절, 예수께서 무리를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심으로  앞 선 이야기를 확장하시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무리는 대화를 지켜보는 배경 역할을 하지만 이제 예수는 바리새인과의 직접적인 대화를 멈추고 그들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 역시 여전히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을 것입니다. 12절 그들에게 걸림이 된 말씀이라는 것을 보면 11절 말씀을 듣고 곧 떠난 것으로 보이기에, 아직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11절은 예수께서 그들이 처음 제기한 정결 문제에 대해 지금까지 직접적인 대답을 미루셨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모든 사람이 “깨닫기” 원하십니다. “깨닫다”라는 동사는 13장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제자들과 대비되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나(13:13-15, 19) 참 제자에게는 뚜렷이 나타나는 반응(13:23, 51)을 묘사합니다. 그것은 예수의 비유를 통한 가르침이 요구하는 “깨달음”이며, 이제 예수는 또 하나의 “비유”를, 15절에서 베드로가 지목한 이 비유를 진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비유를 통해 교훈을 얻고자 한다면 “듣고 깨달아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진정한 의미를 알고 참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에 듣고 깨달으라라고 무리를 부르시고 계신 것입니다.

 

11,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이 핵심 진술은 15절에서 “비유”로 묘사되지만 특별히 비밀스러운 내용은 아닙니다. 이 구절은 본질상 속담이나 경구에 가까우며, 일반적인 진리에 대한 간결한 진술에 해당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부정한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생각하고 제자들을 비판했지만 예수는 반대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는 내면의 정결함을 중요하게 다루십니다. 유대인들의 정결 예법 때문에 제자들이 더럽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완악한 바리새인들은 마음이 부정하므로 그들의 전통에 따른 정결 제의를 지킨다고 해서 정결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모든 제의적 더러움이 음식에 의한 것만은 아닙니다. 질병이나 신체적 유출 또는 부정한 사람이나 물건과의 접촉을 통해서도 더러워집니다. 그러나 외적인 접촉을 통한 더러움의 원리는 레위기의 음식 규례( 11; 참고, 17:10-16)에 분명히 나타나며, 예수는 여기서 이러한 원리에 대해 제쳐 두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17-19절에서 자세히 보여 주는 바와 같이, 정말로 더러운 것은 외적인 것이나 제의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이고 도덕적인 것입니다. 이 진술은 단순하고 명확하며 이 선언에 담긴 실제적인 함축은 구약 성경 및 제의적 정결에 관하여 랍비 사상에 젖어 있는 자들에게 요원한 내용입니다.

 

12, 제자들의 질문, “바리새인들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아시나이까”, 11절의  말씀으로 바리새인들이 자리를 떠난 것으로 보입니다.

 

13, 예수께서 대답 대신 주신 비유,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공적인 선언은 간략했으나 이제 13장의 패턴을 따라 제자들에게 공적인비유에 대한 사적인 설명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심으심”이라는 비유는 이사야 61 3절을 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본문에서 시온에 있는 하나님의 구속된 백성은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로 불립니다. 이사야 5 7, 60 21절과 그 외 많은 구약 성경 본문에서 포도나무와 각종 나무를 심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세우고 돌보심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심으심”이라는 구약 성경 이미지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뿐 아니라 모든 백성에게 해당되는 비유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많은 백성이 그들의 특별한 지위에 따라 살지 못하였음을 보여 줍니다. 장로들의 전통으로 백성을 속박한 바리새인들이 결국 하나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집단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14, 그러나 두 번째 비유는 지도자의 역할에 직접 초점을 맞춥니다. 그들은 맹인을 인도하는 자이며 이러한 공격은 23 16, 24절에서 반복됩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면(7-9절이 강력히 주장한 바 대로), 다른 유대인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이 왜곡된 종교적 가치관이라는 동일한 “구덩이”로 이끌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23 1-12절에서도 다시 나타나지만, 예수가 무리의 지도자들을 공격한 것은 백성이 이러한 악한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15-16, 베드로가 대답하며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옵소서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반문하시며, 제자들이 무리와 마찬가지로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를 지적하십니다.

 

17,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알지 못하느냐”, 이러한 생리적 묘사는 몸으로 들어갔다가 나가 버리는 물질적 음식은 동물적 생존의 한 요소이며 마음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이제 진정한 “더러움”의 도덕적 본질이 분명해집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더러운” 것은 “말”(11절의 “입에서 나오는”이 암시하듯)뿐 아니라 더 광범위한 행위 문제가 포함됩니다. 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일반적으로 “악한 생각”이라는 총체적 범주로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5 21-28절에서 이미 설명한 대로 행위와 말은 마음이 품고 있는 악한 생각이 겉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여섯 가지 항목 가운데 네 가지는 십계명에서 직접 인용한 것입니다. 나머지 두 항목(음란과 비방)은 앞선 죄(간음, 거짓 증언)를 확장한 것으로 5 21-28절이 우리에게 살인과 간음의 구체적인 행위 뒤에 있는 광범위한 죄악을 보여 주듯이, “간음”과 “거짓 증언”의 제한적인 정의에 구속받지 말 것을 경고합니다. 왜냐하면, “음란”은 어원상 “창기와의 성행위”를 뜻하는 ‘포르네이아이’를 번역한 것으로 불법적 성행위라는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되지만, 하나님을 배신한 것을 음란하다고 하며, “비방9 3, 12 31절처럼 “신성모독”으로 번역할 수 있기 때문에 십계명의 첫 번째 돌판( 20:7)에 기록된 하나님에 대한 범죄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생각”은 본문의 목록 가운데 유일한 정신적 항목이라는 점에서 이어지는 모든 항목을 도입하는 역할을 하며 이러한 죄들이 어떤 마음에서 기원되는지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악하다는 표현은 인간이 악을 행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본문은 “더러운 것”이 어디서 나오느냐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에 악하다는 언급이 사용되었을 뿐입니다. 마음에서 선한 것도 나올 수 있습니다.

 

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11절에 제시된 예수의 선언과 17-19절의 설명은 정결에 관한 논의는 이제 2절에서 바리새인들이 제기한 질문을 넘어서게 합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