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통전적으로 성경 읽기
마태복음부터 처음 읽기/마 15:1-39

마 15:21-28 가나안 여자의 믿음

by pooh_in_the_Way 2022. 4. 7.
728x90

마15: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마15: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마15: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마15: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마15: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마15: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마15: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마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태복음 15:1-20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의 논쟁이 벌어진 곳이 이스라엘의 갈릴리라면, 15:21~28의 사건이 일어난 곳은 이방인들의 지역입니다.

이 사건은 8 5-13절에 제시된 백부장의 믿음 사건과 많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본문에서 도움을 요구하는 것은 “환자”가 아니라 환자와 관계가 있는 주인/부모이며 둘 다 이방인입니다(백부장은 로마 군대의 지휘관으로 로마인입니다). 또한 두 사건에서 예수는 처음에는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의 부탁을 꺼리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호소자의 “믿음”이 어떤 유대인보다 칭찬을 받습니다. 또한 두 본문에서(마태복음에서는 이 두 본문에서만) 치유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말씀만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8 5-13절에서 예수의 꺼림은 이내 백부장의 믿음에 대한 칭찬으로 바뀌지만 이곳의 대화는 예수가 “무관심한 척”했기 때문에 여자의 입장에서는 훨씬 힘들고 고통스럽게 진행됩니다. 그 결과 여자가 믿음으로 이룬 궁극적 치유가 더욱 강조됩니다.

이 내러티브에서, 독자에게 불안감을 주기에 충분함 요소가 있습니다. 예수의 거부 행동이나 이방인을 “개”로 표현한 것이, 현대인들에게는 매우 민망하게 보입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 메시아에게서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식의 태도는 절박한 호소인에게 민감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무례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결국 예수는 여자가 구한 것을 정확히 들어주었고 그녀의 믿음에 대해 백 부장을 제외한 누구보다 강력한 어조로 칭찬하십니다.

이 사건에서 27절에 제시된 여자의 대담한 대답이 급진적으로 상황을 바꾸게 되며, 그녀의 대답은 예수의 칭찬 말씀의 근거가 됩니다. 전통적인 유대인이 이방인을 하나님의 은혜에서 제외한 것을 이 여자는 받아들이지 않는 것으로, 인종적 신분보다 믿음을 근거로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8:11-12)에게 주어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진정으로 깨달았음을 보여 줍니다.

 

21절, 예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의 논쟁이 벌어진 장소를 떠나셨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는 목적을 위해 현재는 이들의 공격을 피해 다른 지역을 향하십니다. 그러나 앞에서 몇 번 언급한 것처럼 마태복음에서 예수께서 물러나시는 장면은 단순히 곤란한 상황을 피하는 목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물러나실 때마다 실제로는 하나님 나라의 운동을 더 적극적으로 펼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필요한 충돌을 피한다고 해서 두려움을 피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방 여자가 이스라엘 영역인 국경 근처에 온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이방 지역으로 가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예수는 이방 지역에서의 활동을 마친 다음 예루살렘에 가실 것입니다. 16 21절부터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대적과 반대와 죽음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향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이러한 만남을 시작할 때가 아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물러나고 이번에는 아예 유대 지경 밖으로 나가십니다.

대표적인 이방 도시들인 두로와 시돈은 자주 쌍으로 사용됩니다. 갈릴리 북단은 두로와 시돈이 주요 도시로 있는 페니키아와 인접해 있으며, 두 도시 모두(특히 두로)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의 뿌리 깊은 대적으로 책망해 온 지역입니다. 마태는 예수가 도시 안이 아니라 그쪽 “지방”으로 갔다고만 언급합니다. 16 13절에서도 이교도의 도시인 가이사랴 빌립보에 대해 동일한 용어가 사용됩니다. 이것은 (요나의 니느웨 사역과 같은) 이교도 지역에 대한 사역이 아니라 예수와 제자들이 유대의 대적과 유대인 무리를 피해 잠시 물러났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그곳 사람들과 접촉했다는 어떤 암시도 없으며, 예수가 처음 만난 자는 22절의 여자와 30절의 무리지만 그들과의 만남에 대한 간절함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가나안 여자가 “나왔다”, 곧 자신의 마을에서 예수가 있는 곳으로 왔습니다. 본문은 여자가 “그 지경에서” 나왔다고 묘사할 뿐 아니라 특히 “가나안”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이 만남의 인종적 요소를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가나안”이라는 말이, 마가복음에서 “수로보니게”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과 같이, 인종적 용어가 아니라, 구약 성경의 전통적 어휘 가운데 하나,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셨고 그들의 우상 종교는 여호와의 백성의 신앙적 정결에 끊임없이 위협이 되었던 민족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모든 “가나안”이 이스라엘의 메시아에게 동정적 사역을 받아야 한다는 마태의 관점이 그의 유대인 독자에게는 복음의 보편성에 대한 강력한 상징이 되었을 것입니다.

가나안 여자가 와서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주, 다윗의 아들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제 딸이 심하게 귀신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집 안에 남겨졌을 것으로 보이는) 그녀의 딸이 귀신의 공격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중입니다. 귀신 들림은 사탄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특징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예수는 사탄의 하수인인 귀신들을 쫓아내심으로써 사탄의 나라를 무너뜨리십니다. 따라서 지금 막 하나님 나라는 이방 지역으로 확장되고 있는 중입니다.

“다윗의 아들”은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부르는 칭호입니다. 가나안 여자는 확실히 유대교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예수가 이스라엘에 보냄 받은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인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칩니다. 여자는 유대인 고유의 존칭을 사용함으로써 유대 메시아의 도움을 바라는 한 이방인의 “변칙적” 호소로 관심을 끌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제자들을 성가시게 할 만큼(23) 끈질긴 여자의 호소에도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유대인의 “가나안 사람”에 대한 일반적인 태도를 생각할 때, 여자는 자신의 요구에 대한 예수의 침묵(언어 폭력은 아니지만)이 놀랍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는 전통적인 유대 선생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가 계속해서 호소했다는 것은 (어머니의 간절함은 물론) 사회적 관습에 도전하려는 놀라운 의지를 보여 줍니다. 예수의 침묵이 여자의 간절한 호소를 고조시켰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와서 부탁하면서 말씀드립니다. “그녀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계속) 부르짖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뒤에서", 그들의 이기적인 분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여자가 외치는 소리의 내용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우리 뒤에서”라면서 자신들을 귀찮게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여자를 고쳐서 보내기를 부탁한 것일까? 아니면 지금 당장 여자를 쫓아 주기를 원한 것일까? 전자로 보입니다. 열두 명의 힘센 남자가 여자를 쫓아낼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예수께 알린 것은 “보내소서”라는 요구가 “그녀가 원하는 것을 해 주어서 가게 하소서”라는 의미임을 말해 주며, 24절에 제시된 예수의 대답은 이러한 해석이 옳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제자들의 요청에 대해 예수는 자신이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냄 받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얼핏 보기에 예수는 제자들의 입장을 지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직접적으로는 제자들에게 대답하셨으나 가나안 여자가 듣도록 의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킵니다. “보냄 받았다”는 신적 수동태(과거형)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은 23절에 함축된 요구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입니다. 여자의 호소는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정당하게 수행할 수 있는 고유한 영역 밖의 일입니다. 지금 예수는 잃어 버린 양이라는 동일한 은유를 사용함으로 10 5-6절에서 제자들에게 부과한 것과 동일한 제한을 자신에게 적용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은 본질적으로 지리적인 반면 현재 예수는 이미 지리적으로 갈릴리 영역 밖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선언은 이 여정의 목적이 사역의 연장이 아니라 휴식임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가 이 이방인 지역에 온 것은 이곳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휴식을 취하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26절은 이것이 중간에 삽입된 휴식에 관한 언급이 아니라 이방인 사역임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예수는 23절의 침묵이 함축하고 있는 내용을 구두로 표현한 것입니다. 즉 이방인은 유대 메시아의 사역에 아무런 권리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광범위한 복음적 상황에서 볼 때 이러한 제한은 일시적인 것입니다(10:5~6,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8 5-13절의 백부장 사건과 8 28-34절의 가다라 지방에서의 귀신 축출 사건에서 보면 예외 없는 규칙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본문의 전체적 상황에서 볼 때, 이것은 이 주제에 대한 예수의 결론적 말씀이 아님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23절에 제시된 무관심한 침묵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전통적 유대의 거부감은 여자가 자신의 호소를 얼마나 확실하게 붙들고 있는지를 검증하는 시험대가 됩니다. 27-28절에서 여자는 도전을 제시하며, 메시아의 사역은 긍정적으로 확장됩니다.

이스라엘을 돌봐야 하는 목자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는 목자가 필요한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회복하기 위해 보냄 받은 목자였습니다( 9: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구원 역사의 순서에서 이스라엘을 돌보는 목자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약속의 성취였습니다. 당연히 이 사명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돌봄으로 끝난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천국 사역은 “이방의 갈릴리”(4:15)에서 출발했고, 데가볼리(4:25)와 같은 곳에서 이방인들이 예수를 따랐습니다. 또한 예수는 8:11~12에서 이미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 안에 들어와서 메시아의 잔치를 누릴 것을 말씀하셨고 갈릴리 호수의 동쪽에 있는 이방 지역 데가볼리에서 귀신 들린 자들을 치유하셨습니다(8:28~34). 곧 이어 일어날 반전을 통해서 이방인 선교를 위한 예수의 관심이 강조될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메시아(22)는 구원의 대상을 이스라엘에 국한시키지 않으며(1:3~6; 2:1-2; 4:15, 24~25), 188) 이것은 마태복음 전체에서 드러난다. 마태복음 전체에서 보면(8:5-13, 28~34; 28:19~20) 복음 전파가 지역적으로 제한되는 것은 임시적이며(10:5~6), 예수의 부활 이후 제자들은 온 세상으로 파송받습니다.

25
, 지금까지 멀리서 소리치던 여자가 예수에게 나아옵니다. 여자는 "절하며" 존경하는 자세를 취합니다. 이 구절에 제시되는 “절하며”는 “경배하다”는 뜻으로서 예배의 의미인지 존경의 의미인지는 문맥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아마 "주”라는 호칭과 함께, 이 용어 자체에는 아직 신성에 관한 요소가 담겨 있지 않습니다. 다만 여자가 예수의 “권위”를 믿고 간청하는 호소로 보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자녀(아이들)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 23절에 제시된 예수의 침묵과 24절의 진술에 담긴 부정적인 어조 이후에 여자에 대한 첫 번째 직접적인 언급으로 제시된 이 작은 비유는 상처가 될 수 있는 또 하나의 모욕적 언사를 더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는 24절에 진술된 유대인 메시아 사역의 임시적 제한을 반복하고 분명히 할 뿐 아니라 그들에 대해 어떤 문화에서도 품격이 떨어지는 “개”라는 또 하나의 은유를 사용합니다. 이 상황에서 개는 의도적으로 이방인을 상처 주기 위한 모욕적 용어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의 주석들에서 이 개가 애완용 개라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그것이 집에서 기르는 애완용 개이든 떠돌아 다니는 개이든 유대인에게는 모두 부정한 동물로 여겨집니다.

집주인은 자녀가 먹는 음식을 집어서 개에게 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분명한 것은 예수의 비유에서, 개는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비유어이며,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이미지이고, 자녀는 이스라엘의 자녀를 의미합니다. 당연히 자녀는 개가 함께할 수 없는 권리와 특권을 가지며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어서는 안 됩니다(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마가복음에는 적어도 개들에게도 기회가 있다는 암시는 주어집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이것은 자녀 다음에는 개가 먹을 차례가 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여기 마태복음에서는 이러한 작은 위안조차 제공하지 않습니다.

 

27, 뜻밖의 반전이 일어납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방인 여자에게서 나온 예기치 않은 적극적인 반응에서, 논쟁의 절정에 이릅니다. 그녀의 대답은 예수의 말씀에 담긴 분명한 함축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강력한 거부입니다. 여자는 예수의 비유에 정면으로 맞선 것입니다. 만일 이방인이 “개”라면 적어도 개의 권리는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는 비록 찌꺼기라 할지라도 그것을 얻어먹을 권리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메시아로서 "다윗의 자손"인 예수는 먼저 자기 백성에게 가야 하지만 그의 사역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자의 대답은(그녀가 이러한 사실을 알든 모르든) 이스라엘을 택한 것은 그들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모든 민족에 대한 축복의 수단으로 이방의 빛이 되기 위해서라는 중요한 성경적 진리(12:3; 49:6)를 요약합니다. 그러니, “주여 그 말씀은 옳소이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의 부정적 진술을 받아들이는 대신, 다만 예외를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공감할 수 없는 이유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집안의 개들은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개가 밥상에서 떨어지는 음식을 받아먹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자는 물러서지 않고 예수께 간청합니다.

28
, 예수의 대답은 지금까지 대화에서 보여 준 태도와 완전히 반대입니다. 예수는 여자의 말이 정당하다고 인정하며, 인종적 묵종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대담한 태도를 칭찬하십니다. 여자는 결국 논쟁에서 이겼습니다. 그녀의 요구는 즉시 응답을 받습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멀리 떨어져 있지만, 딸에게서 귀신이 물러났음은 확실합니다. 예수는 여자의 큰 믿음을 칭찬하면서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는 주의 기도 내용 중 "뜻이 ... 이루어지다"와 유사합니다. 만일 굳이 둘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다면, 여자가 원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뜻을 반영하며 예수는 여자의 기도를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으로 인정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명령이 떨어지는 바로 그 순간 여자의 딸이 낫습니다. 본문은 여자의 믿음을 두드러지게 합니다. 예수는 감탄사를 붙입니다, “오, 여자여!

구약은 종말에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될 것을 구원 역사의 중요한 요소로 예언했습니다. 앞에서 백부장의 믿음에 대한 예수의 말씀이 이방인들이 하늘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것을 강조한 것처럼(8:11-12), 본문 역시 이방인들이 자녀의 빵 부스러기를 먹는다는 그림으로 이방인들이 구원의 혜택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메시아는 하나님의 자녀를 먹이러 왔으나 이방인들도 먹이는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렇다면 여자의 생각이 예수의 마음을 바꾸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예수가 24절과 26절에서 선언한 기조를 바꾸었다는 점에서는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은 새로운 사역으로의 실제적인 방향 전환으로 볼 수 있는가? 이 본문만 놓고 보면 타당한 결론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부장과의 만남, 특히 8 11-12절의 예언적 말씀을 기억하는 독자는 예수가 이미 인종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것입니다. 데가볼리에서 귀신을 쫓아낸 사건(8:28-34)은 예수가 이방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거리끼지 않음을 보여 줌으로써 이 곳 본문의 전례를 제공합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예수가 여자의 적극적인 반응을 받아들이기 전에 메시아 사역의 초점이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에게 맞추어진다는 사실을 상기시킴으로 긴장을 고조시킨 이유에 대해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추측일 뿐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본문이 유대인 선생과 가나안 여자 사이의 인종적 교착 상태만 확인한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여자의 호소가 받아들여지고 예수는 주저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그녀의 “믿음”을 칭찬합니다. 본문은 끝까지 읽어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으며 첫 부분의 가혹한 인종적 언어는 독자적 주장이 아닌 상호 논쟁의 주제라는 전체적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 이방인 사역은 예수의 예외적 양보가 아닙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어지는 단락(29-38)이 자녀들의 떡을 “개들”과 함께 나누는 장면(32-38)을 포함하여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유대 지역 밖에서 일하는 모습을 제시한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15장 후반부 전체는 유대인이 이방인과 별도로 지켜 왔던 제의적 “정결”을 완화한 전반부의 메시지를 실천에 옮깁니다. 이 과정에서 가나안 여자의 대담한 고집은 기독교 운동의 궁극적 세계화에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본 단락은 여자의 믿음을 강조함으로써 그녀가 의지한 예수의 정체를 드러냅니다. 가나안 여자는 큰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녀의 믿음이 딸의 병을 치료하는 통로가 됐습니다. 예수의 치유하는 권위를 믿고 끈질기게 기도하는 여자의 믿음에 예수는 반응하셨습니다. 본문은 믿음이라는 주제만 강조하지 않고 여자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해하고 있음을 내포하며 구원 역사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위치를 알립니다. 말하자면, 여자의 믿음은 구원 역사에 대한 이해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종말에 이방인들이 유대인을 통해서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구원사의 진리가 여자가 예수를 만나서 딸의 치유를 경험한 것으로 성취됩니다. 여자는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이방인들을 불쌍히 여기신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구속사적인 해석은 본 단락 이후의 장면들이 이방인들의 지역에서 벌어진 것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예수는 다윗의 아들로서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이방인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예수는 구원 역사의 관점에서 예수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구원이 주어지고, 그다음에는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빵 부스러기가 선물로 주어집니다. 예수를 믿고 의지한다는 것은 미신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정체를 구원사의 전망에서 파악할 때 기도는 더욱 확신에 차게 되고 더욱 간절해집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께서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다시 무릎을 꿇습니다. 예수를 긍휼을 베푸는 메시아로 믿기 때문입니다.

 

728x90